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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 10. 발승암 기문 본문

책/한문(漢文)

연암을 읽는다 - 10. 발승암 기문

건방진방랑자 2020. 3. 2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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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부질없는 짓

 

 

내가 동으로 금강산을 유람할 적이다. 골짝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옛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써 놓은 게 보였는데 큼지막한 글씨로 깊이들 새겨 놓아 작은 틈도 없었으니 마치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거려 어깨가 부딪는 것 같기도 하고 교오의 묘지에 빽빽이 들어선 무덤 같기도 했다. 옛날에 새긴 이름은 이끼에 덮여 있었고, 새로 쓴 이름은 붉은 글씨가 환히 빛났다.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의 바위 위에 이르매 날아가는 새 그림자도 없었으며 오직 金弘淵김홍연이라고 새긴 세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심 참 이상하다고 여기며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에로부터 관찰사의 위세란 족히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만큼 대단하고, 또 저 양봉래楊蓬萊 같은 이는 기이한 경치를 좋아하여 그 발자취가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감히 이런 곳에 이름을 새기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저기다 이름을 새긴 자는 대체 누구기에 석공石工으로 하여금 다람쥐나 원숭이와 목숨을 다투게 한 걸까?”
余東遊楓嶽. 入其洞門, 已見古今人題名, 大書深刻, 殆無片隙, 如觀場疊肩, 郊阡叢墳. 舊刻纔沒苔蘚, 新題又煥丹硃.
至崩崖裂石, 削立千仞, 上絶飛鳥之影, 而獨有金弘淵三字. 余固心異之曰: “古來觀察使之威, 足以死生人, 楊蓬萊之耽奇, 足跡無所不到, 猶未能置名此間. 彼題名者誰耶? 乃能令工與鼯猱爭性命也.”

과정록에 따르면, 박지원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에 유언호ㆍ신광온申光蘊 등의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단락은 연암이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처음 알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그 문장 서술은 독자에게 잔뜩 호기심과 궁금증을 품도록 만들고 있다. 연암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인적이 미치기 어려운 높디높은 곳에다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은 김홍연이라는 자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왜 그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남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에다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은 걸까?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이름이란 무엇인가?

 

독자는 이 단락의 도입부가 보여주는 어조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잠시 그 대목을 보자.

 

 

골짝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옛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써 놓은 게 보였는데 큼지막한 글씨로 깊이들 새겨 놓아 작은 틈도 없었으니 마치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거려 어깨가 부딪는 것 같기도 하고 교외의 묘지에 빽빽이 들어선 무덤 같기도 했다.

 

 

특히 진하게 표시한 부분은 해학적 느낌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약간 비아냥거리며 비틀어서 말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골짜기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고금의 사람들이 바위에다 온통 새까맣게 이름들을 새겨 놓았는데, 저마다 큼지막하고 깊이들 새겨 놓았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마치 장터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연상하게도 하고, 빽빽이 들어선 무덤을 연상하게도 한다는 것. 이 연상 자체에 이름 새기기에 대한 연암의 부정적 시선이 스며들어 있다. 말하자면 연암은 이게 대체 무슨 짓들이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방금 인용한 구절 뒤에는 이런 말이 이어진다. “옛날에 새긴 이름은 이끼에 덮여 있었고, 새로 쓴 이름은 붉은 글씨가 환히 빛났다(舊刻纔沒苔蘚, 新題又煥丹硃).” 연암은 이 문장으로써 무엇을 말하려고 한 걸까? 그것은 곧, 사람들이 바위에 이름을 새겨 불멸을 꾀하지만 이는 부질없는 짓일 뿐이며, 이름을 새긴다고 해서 시간의 마모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는 그러한 메시지가 극히 암시적인 수준에서 제시되어 있을 뿐이지만, 뒷 단락에서는 이 점이 분명하게 제시된다.

 

이 단락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선명한 대조를 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골짜기 입구의 새기기 쉬운 곳에 다닥다닥 이름들을 새겨 놓은 데 반해, 김홍연은 새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는 천 길 낭떠러지 고절孤絶한 곳에다 홀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겨 놓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연암은 이런 대조를 통해 김홍연이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님을 슬쩍 시사하고 있다.

 

 

 

 

2. 가는 산마다 보이는 그 이름

 

 

그 후 나는 나라 안의 명산들을 두루 돌아다닌바,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西로는 천마산과 묘향산에 올랐다[각주:1]. 깊숙하고 외딴 곳에 이르러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올 수 없는 곳까지 왔다고 자부할 양이면 그때마다 늘 김홍연이 새겨 놓은 이름자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어 이렇게 욕을 했다.
홍연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리도 당돌한가!”
其後余遊歷方內名山, 南登俗離伽倻, 西登天摩妙香. 所至僻奧, 自謂能窮世人之所不能到, 然常得金所題. 輒發憤罵曰: “何物弘淵, 敢爾唐突耶?”

앞 단락에서 홍연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면, 이 단락에서는 홍연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분노가 명산의 외딴 곳에서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와 계속해서 조우함으로써 폭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암은 아직 김홍연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명산에 새겨진 그 이름자를 자꾸 접하면서 이 인물에 점점 빠져 들어 간다. 이처럼 이 단락의 연암은 흥미롭게도 김홍연에 대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김홍연에 대해 익히 잘 아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그런 이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연암은 35세 무렵 과거에의 뜻을 완전히 접었다. 이는 연암이 현실 속으로 들어가 입신立身하는 일, 벼슬을 통해 자신의 뜻을 현실에 펴는 일의 포기를 뜻한다. 연암은 왜 그랬을까? 그 직접적 계기는 절친한 벗 이희천의 죽음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소완정이 쓴 여름날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했으므로 다시 말하지 않는다.

연암이 이 무렵 산에 노닌 것은 과거 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마도 그는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국내의 명산들에 두루 노닐었으며,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험한 곳이나 외딴 곳을 찾는 것으로 보람을 삼았던 듯하다. 하지만 그런 곳에 이르러 가쁜 숨을 가누고 주위를 살펴보면 그때마다 늘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아무도 온 적이 없는 곳이라 여겼는데 김홍연이 이미 다녀간 것이다. 매번 이러하매 연암은 드디어 분통을 터뜨리게 된다. 이 자식, 어떤 놈이기에 매번 이러는 거야! 바로 이런 심정이 이 단락에 표현되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연암의 분노와 욕설은 딱히 적대적인 성격의 것이라기보다 다소간 해학적인 면모를 띤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 어조에서 그런 점이 느껴진다. 비록 화를 내면서이기는 하지만 연암은 김홍연에게 점점 더 다가서고 있다.

 

 

 

 

  1. 연암은 35세 때인 1771년(영조 47) 과거科擧를 포기한 후 송도와 평양을 유람하며 천마산과 묘향산에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속리산, 가야산, 화양동華陽洞, 단양 등지를 유람하였다. 연암이 백동수와 함께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을 답사하여 그곳을 은거지로 정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본문으로]

 

 

3.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무릇 명산을 유람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히 위험한 곳까지 찾아가 온갖 어려움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기이한 경치를 구경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평소 이전에 산에 오른 일을 회상할 적마다 오싹해지며 자신의 무모함을 뉘우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산에 오르면 그만 지난날의 경계를 소홀히 해 가파른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깊은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기도 하며, 몸을 모로 하여 아슬아슬하게 썩은 잔도棧道[각주:1]를 밟고 낡은 사다리를 오르기도 하면서 왕왕 천지신명에게 무사하기를 빌며 살아 돌아가지 못할까봐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사朱砂[각주:2] 사슴 정강이 크기는 될 정도로 큼지막하게 쓴 붉은 글씨가 늙은 나무 등걸과 오래된 등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서렸는데, 어김없이 김홍연세 글자였다. 나는 마침내 험난하고 궁박하고 위태롭고 곤란한 상황에서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뻐 그로 인해 힘을 내어 더위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갈 수 있었다.
大凡好遊名山者, 非犯至危排衆難, 亦不得搜奇探勝. 余平居追思往䠱, 未甞不慄然自悔也. 然而復當登臨, 猶忽宿戒, 履巉巖, 俯幽深, 側身于朽棧枯梯, 往往默禱神明, 惴惴然尙恐其不能自還. 而大字硃塡, 如鹿脛之大, 隱約盤挐於老槎壽藤之間者, 必金弘淵也. 乃反欣然如逢舊識於險阨危困之際, 爲之出力而扳援先後之也.

동아시아에는 산에 노니는 것을 즐기는 문화가 있다. 그것은 연원이 아주 오래다. 가령 논어같은 책에도 요산樂山(산을 즐김)’이라는 말이 보이며, 공자가 태산에 올랐다는 말이 보인다. 그 후 한대漢代나 남북조 때에 이르면 고사高士들이 어지러운 현실을 피해 산수에 노니는 게 하나의 풍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유산遊山(산에 노님)’이라는 용어도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당대唐代에 이르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에 의해 산수유기山水遊記라는 문학 장르가 확립된다. 산수유기는 줄여서 산수기山水記라고도 하는데, 동아시아의 독특한 회화 장르인 산수화와 대응된다. 산수기와 산수화는 사대부가 지배 계급으로 자리 잡은 송대宋代 이후 대단히 성행하게 되며, 명대明代에 이르면 급기야 방대한 산수기 선집들이 여럿 엮어지게 된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경우 조선 전기에도 산수기는 창작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특히 사대부 문인이라면 너나없이 산수에 노니는 일과 산수기 짓는 일을 운치 있는 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는 중국 명나라 사대부들의 취미에 영향 받은 면이 적지 않다. 특히 18세기 조선 사회에는 중국에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선 데 대한 반감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거나, 당쟁을 피해 재야에 있거나, 당대의 정치 현실을 혐오하여 재야 선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산수 유람이 큰 유행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선비 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글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 단락의 앞부분에서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유산遊山에 탐닉하는 연암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연암은 연암대로의 개인적 이유가 있어 이처럼 산수 유람에 경도傾倒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당시 조선 사대부 사회의 문화적 풍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연암의 유산에의 탐닉을 보여주는 이 단락의 앞부분은 비록 흥미롭기는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그러나 그때마다로 이어지는 뒷부분을 말하기 위한 일종의 뜸들이기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늙은 나무 등걸과 오래된 등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隱約盤挐於老槎壽藤之間)” 바위에 붉게 새긴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가 보였다는 구절에서 우리는 당시 연암이 느꼈던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고립무원의 지경, 공포에 사로잡힌 상황에서 낯익은 이름이 나무 사이로 얼핏 보이자 연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반가움과 기쁨을 느꼈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연암은 마침내 험난하고 궁박하고 위태롭고 곤란한 상황에서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뻐 그로 인해 힘을 내어 더위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갈 수 있었다(乃反欣然如逢舊識於險阨危困之際, 爲之出力而扳援先後之也).” 연암은 드디어 김홍연과 벗이 된 것이다. 벗이란 무엇인가. 어려운 상황에서 힘이 되어 주고, 만나면 기쁘고, 그로 인해 자기가 격려 받고 용기를 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이 단락은 연암과 김홍연이 어느새 이런 의미의 벗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단락에 이르기까지 연암은 김홍연에 대해 뚜렷한 심리 변화를 보여준다. 연암은 1에서 김홍연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피력하고 있고, 2에서는 분노를 표하고 있으며, 이 단락에 와서는 고마움과 반가움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김홍연은 처음에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가, 곧 질시의 대상이 되며, 종국에는 우애의 대상으로 바뀌고 있다. 이처럼 연암의 심리가 변화하는 데 맞추어 글은 심한 기복起伏과 굴곡을 보여준다. 요컨대 김홍연은 처음에는 단순한 타자他者의 위치에 있었으나 거듭된 대면과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비타자非他者’, 혹은 또 다른 나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생각해보면 이 과정은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과정, 혹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손을 맞잡고 서로 깊은 유대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과 닮아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웃기는 것은, 연암이 아직도 실제로는 김홍연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연암은 바위에 새긴 이름자와의 대면만을 통해 김홍연과 친구가 된 셈이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부질없는 짓

2. 가는 산마다 보이는 그 이름

3.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4. 가뭄의 단비처럼 제공된 김홍연의 개인정보

5. 왠지 남 같지 않다 했더니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7. 이름이 곧 존재라는 착각

8. 이름이 남길 바라는 허망함에 대해

9. 이름에 집착하는 유교, 그 너머

10. 김홍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백동수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13. ()에 드러난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

14. 총평

 

  1. 잔도棧道: 발을 붙일 수 없는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듯이 하여 낸 길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주사朱砂: ‘단사丹砂’라고도 하는데, 붉은색의 염료다. 부적이나 글씨를 쓰는 데 사용한다. 명승지 같은 데 가면 바위에 이름을 새긴 뒤 붉은색을 칠해 놓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붉은색이 바로 주사이다. [본문으로]

 

 

4. 가뭄의 단비처럼 제공된 김홍연의 개인정보

 

 

어떤 이가 본래 김의 행적을 잘 알아 나에게 얘기해줬는데, 그에 의하면 김은 곧 왈짜[각주:1]였다. 왈짜란 대개 여항의 허랑방탕하고 오활한 이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른바 검객이나 협객俠客과 같은 부류를 말한다. 그는 젊은 시절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에 합격했으며, 힘이 세어 범을 때려잡거나 좌우 옆구리에 기생 둘을 끼고 몇 길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쩨쩨하게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이 본래 부유하여 돈을 물 쓰듯 하였고, 고금古今의 유명한 서첩書帖과 좋은 그림, 칼이며 거문고며 골동품, 기이한 꽃과 풀 따위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혹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천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준마駿馬와 송골매를 늘 좌우에 두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늙어 머리가 세었으며, 자루에다 끌과 정을 넣고 다니며 명산에 두루 노니는데, 이미 한라산에 한 번 올랐고 백두산에 두 번 오른바 그때마다 손수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겨 후세 사람들도 하여금 세상에 자기가 있었음을 알리려고 한다는 거였다.
或有素知金行跡爲道, 金乃濶者, 葢閭里間浪蕩迂濶之稱, 如所謂釖士俠客之流. 方其少年時, 善騎射, 中武科, 能力扼虎, 挾兩妓, 超越數仞牆, 不肯碌碌求仕進, 家本富厚, 用財如糞土, 傍蓄古今法書名畵, 劒琴彛器, 奇花異卉, 遇一可意, 不惜千金, 駿馬名鷹, 動在左右. 今旣老白首, 則囊置錐鑿, 遍遊名山, 已一入漢挐, 再登長白, 輒手自刻石, 使後世知有是人云.

이 단락에 이르러 글은 확 바뀐다. 앞의 123이 흡사 산수기에 방불한 서술이라면, 이 단락은 그와 달리 김홍연이라는 인물에 대한 서사敍事. 그래서 시냇물이 쭉 흐르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소를 이루어 잠시 구비 도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혹은 빠른 호흡으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이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연암은 앞에서 김홍연과의 기이한 인연을 이리저리 서술했으나 김홍연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고 독자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연암이 이처럼 독자를 잔뜩 궁금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이 대목에서 비로소 김홍연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고도로 계산된 글쓰기라 할 만하다. 금방 개략적인 정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 제공된 김홍연에 대한 정보는 충분한 것이 아니다. 연암은 김홍연을 잘 아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임을 밝히면서 김홍연의 인물 됨됨이 중 몇 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뭄에 단비라는 말이 있지만, 이 정도 정보도 독자로서는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이 단락에서 제시된 김홍연에 대한 정보가 세간 사람들의 에 비친 김홍연의 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대체로 외면적인 상이요, 이 외면적인 상에서는 김홍연의 내면 풍경 같은 것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이 역시 고도로 계산된 것이라 생각되지만, 연암은 이 글의 뒷부분에서 김홍연에 대한 내면 정보, 김홍연의 내면 풍경을 살짝살짝 드러내는 방식으로 글을 써 나가고 있다. 요컨대 김홍연이라는 인간에 대해 한꺼번에 말하지 않고 단락의 여기저기에 정보를 분산해 배치함으로써 독자가 외부에서 내부로, 개략적인 데서부터 정세精細한 데로,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으로, 행위로부터 마음으로 이동하며 김홍연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글쓰기 책략에서 우리는 인간 본질에 깊숙이 다가가고자 한 연암이 노력을 읽을 수 있다.

 

 

 

 

  1. 왈짜: 허랑방탕한 짓을 일삼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거나, 각종 유흥으로 소일하거나, 협객으로 행세하면서 당시의 도시 공간에 독특한 존재 방식을 구축하였다. 조선 후기에 상업자본과 도시의 발달에 따라 유흥 공간이 생성ㆍ확장되면서 이런 유의 인간이 서식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왈짜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인 「왈짜타령」이 유명하다. 당시 무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자리를 얻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을 ‘선달’이라고 불렀는데, 김홍연이 이에 해당된다. 김택영의 『소호당집韶濩堂集』에 실려 있는 「김홍연전金弘淵傳」에 의하면, 김홍연은 원래 개성의 부유한 양반집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독서보다는 기방妓房에 출입하는 걸 더 좋아했던 듯하고, 자식의 이런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그의 부친은 그로 하여금 무과에 응시하게 하였다. 하지만 김홍연은 끝내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지 못해 집안의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김홍연은 원래 출신은 양반이었으나 실제로는 중간계급으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협객의 부류였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5. 왠지 남 같지 않다 했더니

 

 

조선 후기 부의 축적으로 협객이 출연하다

 

조선 후기 도시의 발달과 상업 발전은 중간계급의 성장을 가져왔다. 특히 중인 서리층은 이런저런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많은 부를 축적해 갔다. 이들의 부는 판소리를 비롯한 서민 예술의 물질적 기초가 되기도 했으나 그 대부분은 유흥 공간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서화를 사 모으기도 하고, 골동품이나 값비싼 중국 물건, 사치품 따위로 집을 장식하기도 했다. 혹은 유협遊俠이나 협객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부는 서유럽의 발흥기 시민계급처럼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그 출로를 찾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의 중간계급은 비록 물질적 힘은 획득했지만 정치적ㆍ사회적 진출의 가능성은 봉쇄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퇴영적이거나 유흥적인 생활에 빠져 들기 십상이었다.

연암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김홍연은 개성 사람이었다. 조선 시대에 개성이 정치ㆍ사회적으로 얼마나 소외된 공간이었던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晝永簾垂齋記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당시 무과에 급제했다고 해서 다 벼슬을 한 건 아니다. 극히 일부만이 벼슬을 할 수 있었다.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권력가에 줄을 대거나 관계 요로에 뇌물을 주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다못해 관찰사의 비장裨將 자리 하나를 얻어 하기 위해서도 평소 그 집에 드나들며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김홍연은 개성 사람이 아닌가. 이러니 그가 말단 벼슬이라도 얻어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김홍연이 무과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하려 하지 않은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단락 중 김홍연이 쩨쩨하게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不肯碌碌求仕進)”는 구절에 특히 눈을 줄 필요가 있다. 아마도 연암은 이 구절을 아주 힘주어서 썼을 것으로 여겨진다. 쩨쩨하게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연암은 김홍연의 이런 면모에서 자신과의 기질적 동질성을 발견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연암은 쩨쩨한 인간을 누구보다 싫어했고, 비록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권력에 빌붙거나 현실에 영합해 벼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쩨쩨하지 않고 호쾌하며, 비루하게 벼슬하려고 하지 않은 김홍연에게서 연암은 신분을 넘어 어떤 유대감 같은 것을 느꼈을 법하다.

 

 

 

협객에게서 자신을 보다

 

연암은 젊은 시절부터 민간의 협객에 호감을 품고 있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좀스럽거나 약삭빠르거나 아첨을 잘하거나 고분고분한 인간 유형과는 정반대의 기질을 지닌바, 선이 굵고 오만하며, 위선적이지 않고 의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나 행위는 유교적 예법에 잘 들어맞지 않음은 물론 그에 저촉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점잖은 선비나 도학자라면 이런 부류의 인간에 호감을 가지기는커녕 그들을 불온시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연암은 왜 젊은 시절 이래 여항의 이런 인물들에게 호감을 보인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연암의 독서 체험과 관련된다. 연암은 10대 중반에 사기열전을 공부하면서 사마천의 글쓰기와 인간학에 심취한 바 있다. 몇 천 년의 중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문장가 두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사마천과 장자莊子를 꼽을 수 있을 터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에 장천마지莊天馬地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는 하늘과 땅이 있는데 장자의 문장이 곧 하늘이라면 사마천의 문장은 땅이라는 말이다. 장자는 인간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기라도 하듯 기궤奇詭하고 희한하기 짝이 없는 문장을 구사했다면, 사마천은 어찌 이리도 예리하게 인간의 심리와 본질을 통찰했을까 싶은 글을 남기고 있다. 두 사람의 문장은 모두 기세가 펄펄 넘치며 신출귀몰하다. 그래서 중국과 한국의 후대 문인들은 늘 장자와 사마천을 우러르며, 그들의 문장 필법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인들은 두 사람의 문장을 흉내만 내었을 뿐 그 정수精髓를 터득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장자와 사마천의 문장을 배우려면 기가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가 약한 사람이 기가 펄펄 넘치는 이 두 사람의 문장을 제대로 소화할 수는 없다. 연암은 타고난 기가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젊은 시절 사마천의 열전을 읽고 그 정수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며, 중년에는 장자를 읽고 상상력의 경계를 한껏 확장시킬 수 있었다.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지만 다시 본제本題로 돌아가자. 사기열전 중에 유협열전자객열전이 있다. ‘유협이란 협객을 말한다. 이 두 편의 열전에서 다룬 유협과 자객은 모두 유교적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인간부류로서, 질서와 예법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불온시 되거나 비판받아야 할 인간들이다. 그렇건만 사마천은 이들의 미덕을 찬양하고 기리어 역사에 편입하였다. 이를 두고 후대의 학자들은 두고두고 사마천을 비난하였다. 불온한 인물들을 미화하고 역사에서 다루었다는 게 비난의 이유였다. 연암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사기열전의 이 두 편, 특히 유협열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바로 이런 독서 경험과 관련해 연암은 젊은 시절 여항의 협객적 인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사기』 「유협열전을 읽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협객에 호감을 갖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연암이 사기열전에 경도되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연암이 협객에 호감을 품게 된 또다른 이유는, 연암의 기질 내지 연암의 현실 인식에서 찾아야 하리라 본다. 연암은 철들기 시작하면서 당대 조선 사대부의 위선적 행태 및 약삭빠르게 권력과 이익을 붙좇는 태도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며 그에 대해 몹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다 보니 좀스럽고 위선적인 사대부와 대척적인 지점에 서 있는 인간 타입으로 여항의 협객이라는 존재에 호감을 느끼게 된 게 아닌가 한다. 연암의 불온성이 이런 데서도 확인된다.

 

연암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광문이라는 자의 전廣文子傳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광문廣文은 원래 거지 출신인데, 협객적 면모가 없지 않았다. 연암은 자기 시대의 인물인 이 광문의 전기를 씀으로써 이 인물이 지닌 미덕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광문이 조선 팔도에 명성이 높자 그 이름을 팔아 역모를 꾀하려는 자가 나타나 당시에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연암은 광문이라는 자의 전廣文子傳을 쓰고 난 다음의 어느 시점에 다시 광문이라는 자의 전 뒤에 적다書廣文傳後라는 글을 써서 이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 가운데 당시 이름을 떨친 협객의 이름이 두엇 보인다. 가령 김군경이란 이는 미남자로서 기생을 끼고 담장을 뛰어넘을 정도로 용력이 출중했고 돈 쓰기를 물 쓰듯 했다고 했으며, 싸움꾼으로 유명한 표철주는 집에 돈이 많아 황금투구라고 불렸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광문의 친구들이었던 듯한데, 이제는 나이 들어 김군경은 용호영龍虎營에서 구실아치를 하고 있고, 표철주는 재산을 탕진해 가난하게 되어 집주름(부동산 중개업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연암은 이들을 자못 우호적인 눈길로 바라보며 그 삶을 운치 있게 그려놓고 있다.

이 단락에서 소개되고 있는 김홍연의 삶은 김군경이나 표철주의 삶과 비슷한 데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 편은 그 앞부분에서 김홍연의 호협豪俠한 삶을 말한 다음 뒷부분에서 그가 지금은 늙어 명산에 노닐며 바위에 손수 이름을 새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뒷부분은, “하지만 지금은 늙어 머리가 세었으며(今旣老白首)”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김홍연이 바위에다 이름 새기는 일을 시작한 것은 그가 늙어서의 일인 셈이다. 이 글의 1단락에서 연암은 바위에 새겨진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보고 김홍연이란 자는 대체 누구기에 석공石工으로 하여금 다람쥐나 원숭이와 목숨을 다투게 한 걸까(彼題名者誰耶, 乃能令工與鼯猱爭性命也?)”라고 혼자 중얼거린 바 있다. 그런데 이 단락의 끝 부분을 보면 김홍연은 석공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몸소 도구를 갖고 다니면서 자기가 직접 이름을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김홍연은 왜 석공도 없이 스스로 그 위험한 곳에 올라가 이름을 새기는 짓을 한 걸까? 석공도 없이 그랬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하필 노년에 들어 그런 짓을 한 걸까? 혹시 김홍연은 표철주처럼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노년에 그만 쓸쓸한 신세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세심한 독자라면 이 단락의 끝부분에서 이런 의문을 품음 직하다.

 

 

 

 

 

 

7. 이름이 곧 존재라는 착각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이 뉜가?”
김홍연이외다.”
이른바 김홍연은 뉜가?”
그 자가 대심大深이외다.”
대심이라는 이는 뉜가?”
자호自號를 발승암髮僧菴이라고 하외다.”
이른바 발승암은 뉜가?”
余問: “是人爲誰?” : “金弘淵.” “所謂金弘淵爲誰?” : “字大深.” : “大深者誰歟?” : “是自號髮僧菴.”
所謂髮僧菴誰歟?”

이 단락은 마치 선문답 같다. 단락 전체가 물음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문답이란 무엇인가? 통념과 지식을 허물어뜨려 깨달음, 즉 절대의 진리에 이르는 방편 아닌가. 이 단락에서 연암이 톡톡 던지는 물음은 이런 의미의 선문답적 물음이다.

연암은 먼저 김홍연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상대방은 대심이라고 답한다. 연암은 다시 대심은 누구냐고 묻는다. 상대방은 발승암이라고 대답한다. 연암은 다시 발승암은 누구냐고 묻는다. 상대방은 아무 말도 못한다. ‘김홍연은 성명이고, ‘대심은 자이며, ‘발승암은 호다. 이 셋은 모두 존재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존재는 아니다. 실제 존재와는 아무 상관없이 외부에서 덧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존재의 일부도 아니며, 존재의 고유한 본질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름에 집착하며, 어떻게든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이름이란 실재가 아니라 허상인데, 미망에 빠져 허상을 좇는 것이다. 연암이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 것은 이 점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이름이라는 건 허상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것을 실체로 착가해 손을 잡으려 하거나 그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 이름과 는 별개이니 그것을 남긴다고 해서 가 영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 문답에서 연암은 김홍연을 이른바 김홍연이라고 말하고 있고, 발승암을 이른바 발승암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름 앞에 이른바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름이란 기실 가상임을 보이기 위해서다. 가상은 아무리 추궁하더라도 실체에 이를 수 없다. 실체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발승암은 누굽니까라는 물음 앞에 상대방은 마침내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만다. 지금까지 이름에 대한 물음에 이름으로 대답해왔지만 더 이상의 이름이 없으니 대답할 도리가 없다. 이로써 이름이 실제 존재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뿐 아니라, 이름이 곧 그 존재라는 우리의 통념이 커다란 착각임이 현시된다. 이 문답을 통해 연암이 노린 효과는 바로 이것이다.

 

 

 

 

 

 

 

8. 이름이 남길 바라는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던 자가 대꾸가 없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각주:1]없다라는 분과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을 허구적으로 설정해 서로 문답하게 하는 글을 쓴 적이 있거늘 지금 나와 그대가 우연히 절벽 아래 흐르는 물가에서 만나 서로 문답하고 있네그려. 먼 훗날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있을 리가 있나선생일 터이니 이른바 발승암이란 자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러자 그는 발끈하여 얼굴에 노기를 띠고 말했다.
내 어찌 황당한 말을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정말 김홍연은 존재하외다!”
나는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너무 집요하이. 지난날 왕안석王安石[각주:2]나라를 비판하고 신나라를 찬미함(劇秦美新)[각주:3]이라는 글에 대해 변증辨證하면서 이건 필시 곡자운谷子雲[각주:4]이 지은 글이지 양자운揚子雲이 지은 글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소동파蘇東坡[각주:5]서경西京[각주:6]에 과연 양자운이 존재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네. 대저 두 사람의 문장은 당세에 밝게 빛나 역사책에 이름이 전하는데도 뒷사람이 그들을 논할 적엔 오히려 이런 의심을 두거늘, 하물며 심산유곡에 헛된 이름을 새겨 비바람에 깎이고 패여 백 년도 못 가 익힐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나!”
이 말을 듣고 그 사람 또한 껄껄 웃고는 가 버렸다.
談者無以應, 則余笑曰: “昔長卿設無是公烏有先生以相難, 今吾與子, 偶然相遇於古壁流水之間, 相答問焉. 他日相思, 皆烏有先生也, 安有所謂髮僧菴者乎?”
客勃然怒於色曰: “吾豈謊辭而假設哉? 果眞有是人也.”
余大笑曰: “君太執拗. 昔王介甫辨劇秦美新, 必谷子雲所著, 非楊子雲, 蘇子瞻曰: ‘未知西京果有楊子雲否也.’ 夫二子之文章, 烟蔚當世, 流名史傳, 而後之尙論者, 猶有此疑, 而况寄空名於深山窮壑之中, 而風消雨泐, 不百年而磨滅者乎?” 客亦大笑而去.

상대방이 아무 말이 없자 연암은 사마상여의 작품에 등장하는 두 허구적 인물인 없다님과 있을 리가 있나선생을 끌어와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사실 연암이 말하고자 한 바는 이름에 대한 추궁의 결과 상대방이 말문이 막혀 버린 대목에서 이미 다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선문답 같은 것으로, 도가 높은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다. 보통 사람이 볼 땐, 뭔 말인가 싶고, 말장난 하나 싶을 뿐이다.

그래서 연암은 바로 다음 구절에 없다님과 있을 리가 있나선생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부터는 7에서 나눈 문답의 주석이요, 부연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연암이 말하고자 한 바는, 모든 존재는 시간의 풍화 작용 앞에서 소멸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문답을 나누고 있는 우리도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는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릴 거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른바 발승암이라는 자가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상대방은 연암의 이 말을 연암이 발승암이라는 사람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는 화를 내며 이런 어투로 말한다. “정말로 김흥연은 있다니까요!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구요!(果眞有是人也)” 이 대목은 참 재미있다.

그래서 연암은 껄껄 웃으며, 다시 설명을 시작한다. 연암은 이번엔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끌어와 이야기를 펼친다. 나라를 비판하고 신나라를 찬미함劇秦美新이라는 글은 일반적으로 양자운이 지은 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글의 작자는 양자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양자운이라는 인물이 서경에 과연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까지 있다. 역사책에 이름이 전할뿐더러 그 저작이 지금 전해지는 이런 유명한 사람조차도 이런 판이니, 심산유곡에 이름자를 새겨 놓는다고 해서 불멸이 보장될 것인가? 불멸은커녕 백 년이나 가겠는가?

이 말에 비로소 상대방은 연암의 뜻을 깨닫고 웃으며 자리를 떴다고 했다. “껄걸 웃고는 가 버렸다(客亦大笑而去)”는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 역시 재미있다.

 

 

 

 

 

  1. 사마상여司馬相如(기원전 179~기원전 117): 한漢나라 초기의 저명한 문장가다. 특히 ‘부賦’라는 장르의 글을 잘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무제武帝에게 「사냥游獵賦」이라는 제목의 ‘부’를 바친 적이 있다. 이 글은 허구적인 인물인 ‘없다’라는 님과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의 문답을 통해, 임금이 동산을 화려하게 꾸며 거기서 사냥을 즐기는 일에 탐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원문에는 ‘없다’라는 님이 ‘무시공無是公’으로 되어 있고,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이 ‘오유선생烏有先生’으로 되어 있다. ‘무시’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뜻이며, ‘오유’는 ‘어찌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2. 왕안석王安石(1021~1086): 송나라 신종神宗 때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문장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신법新法을 통해 개혁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신법은 국가재정의 확보 등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급격한 개혁으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는 기존의 유학자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양웅揚雄에 대해서도 보통의 유학자들과 달리 그 행위와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본문으로]
  3. 「진秦나라를 비판하고 신新나라를 찬미함劇秦美新」: 진나라를 비판하고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찬미한 글인데, 양웅이 신나라를 세운 왕망에게 아첨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나, 일설에는 양웅이 지은 것이 아니고 양웅과 동시대의 인물인 곡자운谷子雲이 지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곡자운谷子雲: 곡영谷永을 말한다. ‘자운子雲’은 그 자다.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 등 겅젼 해석과 관련된 저작 외에 성제의 사치를 풍자한 부賦를 남기기도 하였다. 왕망이 정권을 찬탈해 신나라를 세우자 이를 찬미하는 문장을 써서 후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문장을 쓴 적이 없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5. 소동파蘇東坡는 소식蘇軾(1036~1101)을 말한다. ‘동파’는 그 호다. 소순蘇洵의 아들이자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린다. 촉蜀 사람으로, 구양수歐陽修의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으로 지목되어 지방관으로 전출되었고, 나중에는 해남도海南島로 유배되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며,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능했다. [본문으로]
  6. 서경西京: 서한西漢의 수도인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한편 동한東漢 때의 도읍인 낙양洛陽은 동경東京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9. 이름에 집착하는 유교, 그 너머

 

 

이상 살펴본 것처럼 이 단락은 그 필치가 경쾌하고 해학적이지만 그 속에 깊은 철리哲理가 담겨 있다. 한편 독자는 이 단락에 이르러 비로소 김흥연이 바로 발승이라는 사실을 고지告知 받는다. 그리하여 왜 이 글의 제목이 발승암기髮僧菴記인지를 간취하게 된다. 이 점 또한 묘미가 있다. 연암은 독자의 심리를 이리저리 저울질해가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대상 인물의 심리를 통찰하는 데 썩 뛰어날 뿐 아니라 독자 심리학에도 일가견이 있다 할 만하다. 천하의 문장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이름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것, 그것은 허깨비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 이는 20대 중반 무렵에 연암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연암은 이런 깨달음을 선귤당이라는 집의 기문蟬橘堂記관재라는 집의 기문觀齋記이 두 편의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름이 헛된 것이라는 데 대한 연암의 사유는 연암의 여러 글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 문제는 연암이 평생에 걸쳐 씨름한 화두의 하나로, 연암의 사유를 구성하는 몇 가지 주요한 원리의 하나이다. 연암은 기본적으로 유자儒者. 유교에서는 이름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공자도 논어에서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두려워할 게 없다(四十, 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일반적으로 유교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일에 놀라울 정도로 집착한다. ‘입신양명이니 불후니 하는 말은 모두 유교에서 나온 말이다. 연암은 유자였던 만큼 유교의 이런 문화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을 터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이름에 집착하는 이런 유교문화를 반성적으로 성찰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그다운 면모다. 이름에 대한 연암의 이런 반성적 사유는 불교 공부를 통해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연암은 인륜적 측면에서는 불교를 비판했지만 불교가 지닌 어떤 교리들과 그 사유방식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연암의 사유는 단순히 유교에 고착되지 않는 폭과 깊이를 확보할 수 있었다.

 

 

 

 

 

10. 김홍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백동수

 

 

그런데 이 단락에서 연암과 문답을 주고받는 사람은 과연 누굴까? 앞 단락에 의하면 그는 본래 김홍연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사람이 백동수白東修(1743~1816)가 아닐까 생각한다. 백동수는 서얼 출신의 무반武班으로, 이덕무의 처남이다. 연암은 35세 때인 1771년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 자와 더불어 명산에 노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용력이 절륜하고 무예에 출중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미한 신분 때문에 몹시 불우하였다. 이 글은 1779년경에 쓴 게 아닌가 추측되는데, 당시 백동수는 건달 신세였다. 훗날 그는 무직武職인 장용영壯勇營 장교將校를 거쳐 박천 군수를 지냈다. 정조 때 왕명으로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조선의 무예를 집대성해 놓은 책는 그와 이덕무ㆍ박제가가 힘을 합쳐 만든 책이다. 아마도 그는 무예에 정통해 있었던 듯하다. 백동수는 비록 생애 후반에 말단 벼슬을 얻어 함으로써 형편이 다소 나아지기는 했으나 그전까지는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

 

과정록에 보면 백동수가 연암 앞에서 술주정을 부리다 볼기를 얻어맞은 일이 서술되어 있다. 이 인물의 개성이 이 일화에 잘 집약되어 있다고 판단해 아래에 잠시 인용한다.

 

 

백동수는 힘이 몹시 세고, 몸이 매우 날랬으며, 지략이 있었다. 를 갖춰 아버지(연암)를 섬기기를 마치 비장裨將이 장수를 섬기듯 하여,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궂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조금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어디서 잔뜩 취해 갖고 와 아버지 앞에서 술주정을 했다. 아버지는,

자네 소행이 무례하니 볼기를 맞아야겠다!”

고 말씀하시더니 판자때기로 볼기짝 열 대를 쳐서 그 거칠고 경솔함을 나무랐다. 백군은 처음에 장난으로 그러시는 줄 여겼는데 나중에 그것이 꾸지람인 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백군은 감히 다시는 술을 마신 채 아버지를 뵙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내가 언젠가 연암공의 책망을 들은 적이 있소이다.”

라고 말했다 한다.

白博川東脩, 與先君同庚. 膂力絕倫, 精悍有瞻. 畧事先君執禮, 如褊裨之事主帥, 夷險燥濕, 少無憚勞.

一日從他醉歸, 使酒於前. 先君曰: “君無禮, 可受杖.” 以剪紙板, 打其臀十, 戒其粗率.

白君初以爲戱, 後乃知其誨責也. 自是不復敢被酒入謁曰: “吾嘗被燕岩公責矣!”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그로부터 9년 뒤다[각주:1]. 나는 평양에서 김을 만날 수 있었다. 누가 그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김홍연입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의 자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대심! 발승암 아닌가!”
김군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보더니,
어떻게 저를 아시지요?”
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옛날 만폭동에서 이미 자네를 알게 됐지. 집은 어딘가? 옛날에 수집한 물건들은 잘 간직하고 있는가?”
김군은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가난해져 다 팔아 버렸지요.”
왜 발승암이라고 하나?”
불행히도 병 때문에 불구가 된 데다[각주:2] 늘그막에 아내도 없어 늘 절집에 붙어사는 까닭에 그렇게 자호自號하지요.”
그 말과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옛날의 모습과 태도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젊을 적의 그를 보지 못한 걸 참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其後九年, 余遇金平壤, 有背指者, 此金弘淵也. 余字呼曰: “大深, 君豈非髮僧菴耶?” 金君回顧熟視曰: “子何以知我?” 余應之曰: “舊已識君於萬瀑洞中矣. 君家何在? 頗存舊時所蓄否?” 金君憮然曰: “家貧賣之盡矣.” “何謂髮僧菴?” : “不幸殘疾形毁, 年老無妻, 居止常依佛舍, 故稱焉.” 察其言談擧止, 舊日習氣猶有存者. 惜乎! 吾未見其少壯時也.

그 사이 9년이 흘렀다. 이 단락은 9년 뒤 연암이 김홍연을 평양에서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 대화를 통해 김홍연의 만년 모습과 그 쓸쓸한 내면이 그려진다. 연암이 대뜸 김홍연의 자를 부르며 대심! 발승암 아닌가!”라고 말을 건네는 장면에선 한편으로는 연암의 장난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암의 기뻐하는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비록 자기 혼자 그랬던 것이기는 하나 오랜 동안 그를 알아왔던 만큼 연암에게는 김홍연과의 이 만남이 몹시 반가웠을 법하다. 그래서 마치 친한 벗을 부르듯이 자호自號로써 그를 불렀던 것이리라.

 

하지만 김홍연이 연암을 알 리는 없다. 그래서 김홍연은 연암을 물끄러미 보다가 어떻게 저를 아시지요?”라고 반문한다. 이 단락 초입의 이 대화는 붓끝이 살아있고, 신운神韻이 생동한다. 말은 간략하지만 연암의 기뻐하는 얼굴과 김홍연의 의아해하는 표정이 생생히 재현된다. 그래서 독자는 마치 그 현장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상황의 기미와 인간의 심리를 극히 절제된 묘사로 예리하고 깊이 있게 포착해내는 연암 문장의 특징과 묘미가 여기서 잘 드러난다.

이어지는 연암의 물음과 김홍연의 답변 역시 절묘하다. 연암은 이 문답을 통해 김홍연의 현재 처지를 그려 냄과 동시에 김홍연을 둘러싸고 있는 서글프고 쓸쓸한 분위기를 통해 그 내면을 살짝 느끼게끔 만든다. 묘한 것은, 김홍연 스스로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해 말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독자는 김홍연이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집도 아내도 없이 절간에 붙어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김홍연이 왜 자신의 호를 발승암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니 발승암髮僧菴이라는 말은 머리 기른 중이 사는 암자라는 뜻이다. ‘발승髮僧, 머리만 길렀을 뿐이지 아내도 집도 없이 절에서 연명하는 자신의 신세가 중과 다를 바 없음을 자조해붙인 이름이리라. ‘은 흔히 사대부들이 겸손의 뜻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이라 이름하고 이를 자호로 삼곤 하였다. ‘발승암이라는 호에 보이는 자는 이런 용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사대부들의 호에 보이는 자가 청빈과 겸손의 뜻을 붙인 것이라면, 발승암의 경우 자는 절의 암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홍연의 이 자호 속에는 지독한 자조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고, 독자는 그 말뜻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며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단락은 앞의 편들과는 전혀 다른 정서와 미감을 자아낸다. 이번 편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전에 가졌던 유쾌한 마음이 싹 가시고, 왠지 서글프고 쓸쓸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연암은 이 단락의 끝에서 그 말과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옛날의 모습과 태도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젊을 적의 그를 보지 못한 걸 참 애석하게 생각하였다(察其言談擧止, 舊日習氣猶有存者. 惜乎! 吾未見其少壯時也)”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김홍연은 늙고 병들어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협객의 풍모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연암은 그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지금도 저러한데 젊을 때는 오죽했을까. 그 걸출한 풍모를 못 본 게 한스럽다!’

 

우리는 이 단락에서 김홍연이 병으로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김홍연 자신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그것은 아주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어 무슨 장애이며 어느 정도의 장애인지, 그리고 신체가 얼마큼 손상되었는지에 대해서 통 알 수 없다. 왜 이렇게 모호하게 표현해놓은 걸까? 이렇게 묻는 까닭은, 장애에 대한 이런 표현 방식에 연암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연암은 김홍연의 장애에 연민을 느꼈고, 그래서 그것을 까발리지 않고 은근히 말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연암의 속 깊은 배려다. 혹 누가 당신이 연암 마음속으로 들어가 봤나요? 어찌 그런 줄 아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그럼요, 들어가 보다마다요!”

 

 

 

 

  1. 그로부터 9년 뒤: 앞 단락의 명산 유람시기를 고려하면 1779년경이 된다. 연암은 1778년 홍국영을 피해 연암협으로 이거移去했다. 그리고 1780년 5월에 연행을 떠나 같은 해 10월에 귀국한 후 서울과 연암협을 오가는 생활을 하며 『열하일기』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병 때문에 불구: 김홍연은 노년에 이르러 한쪽 눈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되었던 듯하다. 김홍연은 혹 천연두를 앓았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천연두에 걸리면, 죽지 않고 살아난다 할지라도 얼굴이 몹시 얽게 되고 또 실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실명한 사람의 대부분은 바로 이 천연두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어느 날 그는 나의 우거寓居에 찾아와 이런 부탁을 했다.
제가 이제 늙어 머잖아 죽을 터인데, 마음인즉슨 진작 죽었고 머리카락만 남아 있을 뿐이며, 거주하는 곳은 모두 중들의 암자입니다. 바라건대 선생의 문장에 의탁해서 후세에 이름을 전했으면 합니다.”
나는 그가 늙어서도 그 뜻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슬펐다. 나는 마침내 그 옛날 함께 산에 노닐던 객과 주고받았던 말을 글로 써서 보내주면서
一日詣余寓邸而請曰: “吾今老且死, 心則先死, 特髮存耳, 所居皆僧菴也. 願托子文而傳焉.” 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 遂書其舊與遊客答問者以歸之.

이 단락에서 연암은 이 글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우거란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집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연암이 잠시 유숙하고 있던 평양의 어떤 집을 가리킬 터이다. 김택영의 김홍연전金弘淵傳에 의하면, 당시 김홍연은 평양의 영명사永明寺에 기거하고 있었으며 연암이 평양에 왔다는 말을 듣고는 연암의 거처로 찾아와 자신의 기문記文을 부탁했다고 한다.

제가 이제 늙어 머잖아 죽을 터인데(吾今老且死)”로 시작되는 김홍연의 말은 너무나 처량하다. 한때 협객으로 날리며 멋지게 살던 그가 어찌 이리 됐나 싶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름에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집착이다. 그런데 이 집착은 김홍연의 비참한 처지와 관련이 있다. 4에서 우리는 김홍연이 산에 다니며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일을 늙어서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즉 김홍연은 몰락한 이후부터 자기 이름을 후세에 전해야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리 되었을까? 회한과 자기 보상에의 욕구 때문이이었을 것이다. 김홍연은 뜻이 크고 호방한 사내였으나 이 세상에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게다가 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은 장애인이 되고 말았으며, 절집에 기식寄食해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회한이 가득할 수밖에 없고, 회한이 가득하면 할수록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져 갔을 터이다. 이런 심리가 자기 이름만큼은 후세에 꼭 전해야겠다는 비정상적일 정도의 과도한 집착을 낳은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 집착은 급기야 대문장가 연암에게 글을 부탁하도록 만들고 있다.

김홍연의 요청에 대해 연암은 나는 그가 늙어서도 그 뜻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슬펐다(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라고 적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저토록 이름에 집착하는 김홍연의 심리를 안쓰러워하는 연암의 마음이 담겨 있다. 연암은 왜 김홍연이 저리도 이름에 집착하는지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득 그에게 연민을 느끼며 슬퍼하는 마음이 되었을 터이다. 또한 그래서 그에게 글을 써주었으리라. 이처럼 연암의 이 글은 연민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연민의 감정 위에 축조되고 있음을 각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는 하나 이름에의 집착은 결국 헛된 것이며, 김홍연 자신도 이점을 깨달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연암은 어떤 객과 주고받은 문답을 이 글의 한 부분으로 넣었을 터이다.

 

앞의 8에서 보았듯이 연암은 문장을 통해 후세에 이름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조차 회의를 제기한 바 있다. 그것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보다는 오래 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연암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김홍연의 부탁에 선선히 글을 써 줬다. 이런 게 바로 연민이다. 김홍연은 연암의 가슴속에 피어오른 이 연민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집착한 바대로. 그렇다면 김홍연의 집착이 옳았던 것일까? 그렇게 묻는 것은 우문愚問일 것이다. 또한 문장에 대한 연암의 회의가 저 긴 우주적 시간 속에서 볼 때 꼭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토록 빼어난 문장을 쓸 수 있으면서도 문장에 대해 이렇게 회의할 수 있는 것, 어쩌면 그 점이 여느 문장가와 다른 연암의 독특한 면모이고, 아이러니가 번뜩이는 연암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이 대목은 문학의 역할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글은 적어도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는 듯하다. 잊혀버릴 인간에 대해, 그 운명에 대해 기록함으로써 망각되지 않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잊혀 버릴 인간이란 대개 역사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일 터이다. 이런 소수자들이 망각되지 않아서 누가 좋을까? 소수자일까, 우리 자신일까? 결국 우리 자신이지 않을까. 그로부터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므로.

 

 

 

 

 

 

13. ()에 드러난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

 

 

그 글 끝에 다음과 같은 게[각주:1]를 붙였다.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 새를 의아해하네[각주:2].
흑백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니,
하늘도 판정하길 싫어한다지.
사람들 모두 두 눈 있지만,
한쪽 눈 없어도 또한 본다네.
하필 두 눈 있어야 밝게 보일까?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각주:3]도 있는데.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이마에 눈 하나를 보태기도 하네[각주:4].
또한 저 관음보살[각주:5],
변신하여 눈이 일천 개라지.
천 개의 눈을 어디에 쓰리?
장님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다마다.
김군은 몹쓸 병 걸려 몸이 불편해,
부처에 의지해 연명한다지.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대심大深이 뭇사람과 다르다 보니,
이 때문에 의아히들 여기는 게지.
且爲之說偈曰: “烏信百鳥黑, 鷺訝他不白. 白黑各自是, 天應厭訟獄. 人皆兩目俱, 矉一目亦覩. 何必雙後明, 亦有一目國. 兩目猶嫌小, 還有眼添額. 復有觀音佛, 變相目千隻. 千目更何有, 瞽者亦觀黑. 金君廢疾人, 依佛以存身. 積錢若不用, 何異丐者貧. 衆生各自得, 不必强相學. 大深旣異衆, 以玆相訝惑.”

기문記文이라는 양식에는 게송같은 것이 붙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은 기문이면서도 글 끝에 게송을 붙이고 있다. 파격적 글쓰기의 극치라 할 만하다. 이처럼 연암은 전통적 글쓰기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이른바 장르혼성混成을 통해 자신의 사유와 미학을 창의적이면서 자유롭게 펼쳐 나가고 있다.

 

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 속에 장애인에 대한 연암의 깊은 숙고熟考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수년 전 병신에의 시선(고전문학연구24, 2003, 12)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언급한 바 있는데, 이하의 서술은 그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까마귀는 자기가 검으므로 다른 새들도 으레 다 검은 줄로만 알고, 백로는 자기가 희므로 희지 않은 새들을 보면 의아해한다. 까마귀와 백로의 이 비유는 자기중심적인 판단, 자기중심적인 인식의 국한성 내지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흑이다 백이다, 옳다 그르다라고 말하며 싸우지만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옳음도 그름도 정상도 비정상도 없이 다 똑같을 따름이다. 모든 인식과 판단은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건 없다.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자기만이 옳고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견일 수 있다. 모든 사물은 평등하되 다만 다를 뿐인 것이다. 박지원이 까마귀와 백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눈이 둘이다. 하지만 눈은 꼭 둘만은 아니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이 하나인 사람도 있고, 눈이 세 개인 사람, 눈이 천 개인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꼭 눈이 두 개인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눈이 두 개인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할 경우 그런 사람만이 옳고 나머지는 다 옳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눈이 두 개라고 해서 눈이 하나뿐인 사람보다 나은 건 아니다. 또한 눈이 세 개나 천 개나 된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도 그 나름대로 사물을 본다고 할 수 있다. 심안心眼(마음의 눈)을 갖고 있음으로써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의 눈이 보통 둘이라는 이유 때문에 눈이 하나인 사람이나 장님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거나 얕잡아보는 것은 정당한 일은 아니다. 눈이 둘인가, 하나인가, 장님인가는 다만 차이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또 반드시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박지원이 으로 말하고자 한 메시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박지원의 이 게는 병 때문에 폐질인廢疾人(=장애인)’이 된 김홍연의 처지를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이 게가 보여주는 시선이 한갓 동정의 시선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한국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아주 심하다. 박지원의 이 게에는 장애인을 보는 독특한 시선(오늘날의 우리가 경청해야 할)이 발견된다. 그건 곧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 설정을 허물어버리는 시선이다. 장애인을 보는 박지원의 시선에는 정상/비정상의 엄격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우/열로 위계화되지도 않는다. 그의 시선에 따르면 장애인에 대한 긍정이 비장애인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도 아니요, 비장애인에 대한 긍정이 장애인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둘 사이에 가치의 우열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따라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선망하거나 경멸할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배제하거나 억압할 근거도 없다. 이런 시선에서는 차이를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가기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공동의 사회적 이상이 된다. 따라서 장애를 보는 이런 시선에서는 폭력 혹은 폭력의 메타퍼metaphor가 원천적으로 성립되기 어렵다. 박지원의 이런 시선은 장애인에 대한 부당하고도 비정상적인 억압과 경멸에 대한 논리적 시정이라는 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들 내면의 뒤틀림과 폭력성 및 억압/피억압의 사회적 모순 관계에 따른 자기의식의 분열을 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장애를 보는 박지원의 이런 시선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대해 박지원이 견지했던 저 도저한 상대주의적 인식 태도의 관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이 상대주의적 인식 태도가 차별과 독선과 자기중심성에 기초해있던 당대 조선의 현실 주자학 및 문화 패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을 다분히 갖는다는 점, 그리고 불교와 장자 사상의 수용을 통해 다양성을 긍정하면서 편견이나 차별심을 넘어서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요컨대 우리는 장애인을 보는 시선의 문제에 있어서도 박지원의 남다른 비판적 통찰과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많던 돈을 다 탕진하고 비참한 처지에 빠진 협객 김홍연에 대한 세간의 평이 그리 좋았을 리는 없다. 이 게는 그런 점을 의식한 듯 끝 부분에서 김홍연의 삶을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대신 그 삶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그리하여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積錢若不用, 何異丐者貧. 衆生各自得, 不必强相學)”라고 말하고 있다. ,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대로(즉 자신의 조건과 처지와 방식에 따라) 살아가면 되지, 굳이 남을 기준이나 모범으로 삼아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누구의 삶은 옳고 누구의 삶은 틀렸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게에는 삶과 인간에 대한 중년기 연암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 개개의 생을 편견 없이 긍정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1. 게偈: 산스크리트어 가타gāthā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어漢語로는 ‘송頌’이라 번역한다. 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합쳐 ‘게송偈頌’이라고도 한다. 부처를 찬양하거나 깨달음을 읊은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연암이 김홍연을 위로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이 ‘게’의 형식을 끌어다 썼다. ‘게’의 창조적 전용轉用이라 이를 만하다. [본문으로]
  2.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 새를 의아해하네: 까마귀는 자기가 검으므로 다른 새들도 다 검다고 믿으며 백로는 자기가 희므로 희지 않은 새들을 보면 의아해한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3.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눈이 하나뿐인 사람들만 사는 일목국一目國이라는 나라가 있다. 연암은 중국 고대의 책인 『산해경山海經』을 읽은 바 있다. [본문으로]
  4.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이마에 눈 하나를 보태기도 하네: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는 삼안인三眼人이 나온다. [본문으로]
  5. 관음보살: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 이름이다. 그는 여러 중생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그 화신化身의 하나인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손이 천 개이고 눈이 천 개인 관세음보살)을 지칭한다. 천 개의 눈(千眼)은 모든 세상을 비추는 것을 상징하고, 천 개의 손(千手)은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4. 총평

 

 

1

이 글은 전체적으로 김홍연 알아 가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김홍연을 알아감에 따라 작자의 심리상태가 수시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작자는 호기심에서 시작하여 분노와 우호의 감정을 거쳐 연민의 마음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역으로 이 연민의 감정에서 출발해 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의 기저에서 연암은 김홍연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주 따뜻한 눈길을 주고 있다. 김홍연에 대한 작가의 감정 기복에 따라 글도 심하게 출렁거리며 기복과 파란波瀾을 보여준다.

 

 

2

만년의 김홍연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이런 존재는 어떻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에 대한 인간학적 탐구의 기록이다. 이 글은 인간 존재와 그 운명에 대한 연암의 통찰력과 깊은 눈을 유감없이 잘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방식과 깊이, 여기서 우리는 연암문학의 한 본령과 만나게 된다.

 

 

3

이 글은 왠지 삐딱하다. 다시 말해 불온함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이는 생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암의 관점과 관련된다. 도덕적 관점에서 본다면 김홍연 같은 인물은 결코 긍정적으로 봐줄 수 없는 인물이며, 따라서 글을 통해 후세에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연암은 이 인물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끼고, ‘까지 동원해가며 그의 삶을 옹호하고 있다. 적어도 이 글만으로 본다면 연암은 도덕적 관점만으로 인간을 보거나 세상을 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삐딱하고 불온하다.

 

 

4

김홍연을 보는 연암의 이런 시선은 연암이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과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을 보는 시선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 이 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종종 맞물려 있다. 그러니 묻지 말 일이다, 누구를 위해 조종弔鐘이 울리는지를.

 

 

5

이 글은 기문記文이다. 기문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집이나 누정樓亭을 세운 연유를 밝힌 글이요, 둘은 산수에 노닌 일을 기록한 글이요, 셋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기록한 글이다. 첫 번째 것을 보통 누정기樓亭記라 하고, 두 번째 것을 산수유기山水遊記라 하며, 세 번째 것을 인물 기사人物記事라고 한다. 이 글은 그 제목(髮僧菴記)만 갖고 보면 꼭 누정기 같고, 열심히 명산을 쫓아다닌 일을 기록한 부분만 갖고 보면 꼭 산수유기 같으며, 김홍연이라는 인물의 일을 서술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인물 기사 같다. 이처럼 이 글은 이 셋의 그 어느 것만도 아니고, 그 모두다. 어떤 인물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장르로는 이라는 것이 있는데 연암이 이 장르를 택하지 않고 굳이 라는 장르를 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하나는 가 좀 더 자유롭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김홍연이 이라는 장르에 담을 만큼 특별한 미덕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6

연암의 동시대인은 이 작품을 이렇게 평했다.

붓이 춤추고 먹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으니, 시경에 나오는 북을 둥둥치자 / 펄쩍 뛰면서 칼을 휘두르네라는 구절은 이런 걸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筆舞墨跳, 詩云: ‘擊鼓其鏜, 踴躍用兵.’ 其此之謂歟).”

한편,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해짐을 구하는 것은 남의 기이한 글을 얻어 이름이 전해지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바위에 이름 새긴 일을 잔뜩 언급하기를 천 리의 연파烟波로 삼고 끝에 가서 기문記文을 청한다는 구절에서 강물이 한데 어우러지는 격이다. 문채는 날 듯이 춤을 추고, 음절은 유머러스하고 몹시 예리하다.”

 

 

 

 

 

인용

지도 / 목차 / 작가 / 비슷한 것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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