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깝구나, 연암이 세초하여 없앤 책들
아들 박종채朴宗采는 아버지 연암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연암협에 계실 때 혹은 종일 마루를 내려오지 않고 혹은 어떤 사물을 주목하여 눈길을 돌리지 않고 침묵하여 말이 없는 채 두어 시간을 넘기곤 했다. 其在燕峽也, 終日不下堂, 或遇物注目, 瞪默不言者移時.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하셨다. 嘗言: “雖物之至微, 如艸卉禽蟲, 皆有至境, 可見造物自然之玅.”
매양 냇가 바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 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을 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쓴 조각조각 종잇장들이 상자에 가득 차고 넘쳤다. 毎臨溪坐石, 微吟緩步, 忽嗒然若忘也. 時有玅契, 必援筆箚記, 細書片紙, 充溢篋箱.
마침내 시냇가 집에 간직해두고서, “훗날 다시 생각하고 점검해서 조리가 일관된 연후에 책을 이루리라”하셨다. 遂藏之溪堂, 曰: “他日更加攷檢, 有條貫然後可以成書.”
뒷날 관직을 버리고 연암협에 들어가 꺼내 살펴보니 그때는 눈이 너무 나빠져서 작은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서글피 탄식하시기를, “애석타! 고을살이 십 수년에 한 질 좋은 책을 잃어버렸구나!”하시고, 이윽고 “끝내 쓸짝없이 되고야 말았으니, 헛되이 사람의 뜻만 어지럽힐 것이다”하시고, 냇물에 세초洗草해버리게 하셨다. 後棄官入峽, 出而視之, 眼昏已甚, 不能察細字. 乃悵然發歎曰: “惜乎! 宦遊十數年, 便失一部佳書.” 已而又曰: “終歸無用, 徒亂人意.” 遂令洗草溪下.
아하! 우리들은 그때 곁에 있지 않아서, 마침내 수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嗟乎! 不肖輩, 時未侍側, 遂失檢拾焉.
『譯註 過庭錄』(박종채 저/ 김윤조 역주, 태학사 간, 63쪽) |
아깝구나! 그 책이여.
인용
3. 글로 드러나는 情과 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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