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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연암을 읽는다 - 9. 홍덕보 묘지명 본문

책/한문(漢文)

연암을 읽는다 - 9. 홍덕보 묘지명

건방진방랑자 2020. 3. 2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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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중국사람에게 홍대용의 부고를 알리는가?

 

 

덕보德保[각주:1]가 숨을 거둔 지 사흘째 되던 날 어떤 객이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 가는 길이 삼하三河[각주:2]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는데 이름은 손유의孫有義[각주:3]이고 호는 용주蓉州. 3년 전[각주:4]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땅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다[각주:5]는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토산품 두어 가지를 정표情表로 두고온바 용주는 그 편지를 읽어 내가 덕보의 친구인 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떠나는 객에게 다음과 같은 부고訃告를 용주에게 전하게 하였다.
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曩歲, 余自燕還, 爲訪蓉洲不遇, 留書俱道德保作官南土, 且留土物數事, 寄意而歸. 蓉洲發書, 當知吾德保友也. 乃屬客赴之曰
 
 
건륭乾隆[각주:6] 계묘년癸卯年 모월 모일에 조선의 박지원은 용주 족하足下[각주:7] 머리 숙여 아뢰나이다. 우리나라의 전 영천 군수榮川郡守 남양南陽[각주:8] 홍담헌洪湛軒 [각주:9] 대용大容, 덕보德保가 금년 1023일 유시에 운명하였나이다. 평소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풍증이 생겨 입이 돌아가고 말을 못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닥쳤습니다. 향년 53세입니다. 고자孤子[각주:10] [각주:11]은 곡을 하며 슬픔에 잠겨 있는지라 손수 글을 써 부고하지 못하나이다. 게다가 양자강 이남은 편지를 전할 길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이쪽을 대신하여 오중吳中[각주:12]에 부음訃音을 전해 천하의 지기知己들이 그 운명한 일시日時를 알도록 해 주신다면 살아있는 분이든 돌아가신 분이든 여한이 없을 것이옵니다.
乾隆癸卯月日, 朝鮮朴趾源頓首白蓉洲足下, 敝邦前任榮川郡守南陽洪湛軒諱大容字德保, 以本年十月廿三日酉時不起. 平昔無恙, 忽風喎噤瘖, 須臾至此. 得年五十三, 孤子薳, 哭擗未可手書自赴, 且大江以南, 便信無階. 並祈替此轉赴吳中, 使天下知己, 得其亡日, 幽明之間, 足以不恨.”

이 묘지명은 그 서두가 대단히 파격적이다. 보통 묘지명은 대상 인물의 자나 호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며, 본관은 어디며, 가계家系는 어떠하며, 언제 운명했으며, 대상 인물과 글 쓰는 이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등에 대해 서술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묘지명은 그런 것 일체 없이 다짜고짜 덕보가 숨을 거둔 지 사흘 째 되던 날(德保歿越三日)” 중국으로 출발하는 어떤 객에게 부고를 전하게 된 경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어서 부고의 내용이 소개된다. 이 부고를 통해 비로소 독자는 죽은 이가 누구이며, 언제 죽었으며, 죽기 직전의 관직은 무엇이었으며, 무슨 병으로 죽었으며, 향년이 몇 세며, 상주가 누구인지 등등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게 된다. 연암은 부고를 독자들에게 직접 들이미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독자는 마치 당시의 현장을 직접 접하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연암은 왜 이 글의 첫 단락에서 대뜸 중국인에게 보낸 부고 이야기부터 하는 것일까? 국내의 인사도 아니고 외국의 인물에게 부고를 보냈다는 걸 이리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글을 계속 읽어야 한다.

이 단락의 끝 부분에 보이는 천하의 지기(天下知己)”라는 말을 잘 기억해두기 바란다. 그 이유는 뒤에 밝혀질 것이다.

 

 

 

 

 

  1.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1731~1783)의 자字다. 옛날에 친한 친구 사이에는 자로 불렀다. [본문으로]
  2. 삼하三河: 직예성直隸省 순천부順天府의 현縣 이름이다. 당시 중국 북경에 간 우리나라 외교 사절단은 이곳을 거쳐 귀국하였다. [본문으로]
  3. 손유의孫有義: 삼하현三河縣에 살고 있던 한족漢族의 선비로, 자는 심재心栽이고, 호는 용주蓉州다. 일찍이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이 귀국길에 올라 삼하를 지났는데, 이때 손유의가 홍대용을 찾아와 서로 알게 됐으며,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하였다. [본문으로]
  4. 3년전: 1780년을 말한다. 이해 연암은 중국 외교 사절단의 정사正使로 임명된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중국 여행길에 오른바 있다. 이때 홍대용은 중국의 손유의에게 연암을 소개하는 편지를 써서 연암에게 건네준 적이 있다. 연암은 손유의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그 집에 홍대용의 친서 및 자신의 편지를 남겨두고 왔다. [본문으로]
  5. 남쪽 땅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다: 당시 홍대용이 경상도 영천에서 고을 수령을 한 것을 이른다. [본문으로]
  6. 건륭乾隆 계묘년癸卯年: 정조 7년인 1783년을 말한다. 이해에 홍대용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건륭乾隆’은 청나라 제6대 황제인 순황제純皇帝의 연호다. [본문으로]
  7. 족하足下: 상대방을 몹시 높이는 말로, 요즘의 ‘귀하’쯤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8. 남양南陽: 홍대용의 본관이다. [본문으로]
  9. 휘諱: 이름을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큰 실례로 여겼기에 ‘꺼린다’는 뜻의 ‘휘’ 자를 ‘이름’을 뜻하는 말로 쓰게 되었다. [본문으로]
  10. 고자孤子: 아버지를 잃은 자식을 이르는 말이다. 어머니를 잃은 자식은 ‘애자哀子’라고 한다. [본문으로]
  11. 원薳: 홍대용의 아들 이름이다. [본문으로]
  12. 오중吳中: 중국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는 연암의 착각이다. 홍대용의 중국인 벗들은 소주가 아니라 항주 사람들이기에 ‘오중吳中’이 아니라 ‘월중越中’이라고 해야 옳다. 예전에 중국 절강성 항주를 ‘월越’이라고 했다. [본문으로]

 

 

2.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학자를 멸시하다

 

 

중국 가는 사람을 보내고 난 뒤 나는 항주杭州 사람들이 덕보에게 보낸 서화書畵며 서로 주고받은 편지와 시문詩文이며 이런 것 열 권을 손수 찾아내어 빈소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다.
旣送客, 手自檢其杭人書畵尺牘諸詩文共十卷. 陳設殯側, 撫柩而慟曰:
 
아아! 덕보는 통달하고 명민하고 겸손하고 고아古雅했으며, 식견이 심원하고 아는 것이 정밀하였다. 특히 율력律曆[각주:1]에 정통하여 그가 만든 혼천의渾天儀[각주:2] 등 여러 기구들은 깊이 생각하고 오래 궁구하여 슬기를 발휘해 제작한 것이었다. 애초 서양인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 말하고 회전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했는데 그 이론이 미묘하고 심오하였다. 그는 미처 이에 관한 책을 쓰지는 못했지만 만 년에 이르러 지구가 회전한다는 사실을 더욱 자신하여 의심치 않았다.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일찍부터 스스로 과거를 단념한 채 명리名利에의 생각을 끊고서 조용히 집에 들어앉아 좋은 향을 피우거나 거문고를 타며 지내는 것을 보고는 그가 담박하게 자중자애하면서 세속을 벗어나 마음을 닦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嗟乎德保, 通敏謙雅, 識遠解精.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德保甞論地一轉爲一日, 其說渺微玄奧, 顧未及著書, 然其晩歲益自信地轉無疑. 世之慕德保者, 見其早自廢擧, 絶意名利, 閒居爇名香皷琴瑟, 謂將泊然自喜, 玩心世外.

이 단락의 첫 문장에 보이는 항주 사람들이란 육비ㆍ엄성ㆍ반정균을 말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자세히 언급된다.

이 단락의 포인트는 덕보는 통달하고 명민하고 겸손하고 고아古雅했으며, 식견이 심원하고 아는 것이 정밀하였다(德保, 通敏謙雅, 識遠解精)”라는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통달하다()’는 것은 이치를 환히 알아 툭 트였다는 말이고, ‘명민하다()’는 것은 머리가 좋다는 말이며, ‘겸손하다()’는 것은 뭘 많이 알고 식견이 높아도 나대지 않고 티를 안 낸다는 말이며, ‘고아하다()’는 것은 사람됨이 속되거나 야비하지 않고 기품이 있다는 말이다. ‘정밀하다()’는 말은 아주 정확하고 세밀하다는 말이다. ‘통달’ ‘명민’ ‘겸손’ ‘고아가 주로 인간적 자질 내지 특성과 관련된 말이라면, ‘심원정밀은 학문의 태도나 학문의 경지와 관련된 말이다.

 

 

通達, 明敏, 謙遜, 古雅 인간적 자질 내지 특성
深遠, 精密 학문의 태노나 학문의 경지

 

 

학문은 박학博學이 능사가 아니다. 박학은 학문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조금 박학한 이들은 그것을 뽐내거나 으스대며 마치 대단한 학문을 이루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실 그것은 잡동사니 지식이든가, 남들의 생각을 이것저것 주워 모아 외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박학자는 대체로 사고의 깊이가 얕거나, 창조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예전의 학자들은 남들이 자신을 박람강기博覽强記(이런저런 책을 많이 보고 기억을 잘하는 것하다고 하는 말을 좋게 생각지 않았다.

연암은 박학의 학문적 한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홍대용이 경학經學에서부터 수학, 천문학, 음악학, 병학兵學, 정치학, 재정학財政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두루 조예와 공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되, 이 점을 들어 말하기보다는 심원정밀이라는 두 단어로써 그 학문이 도달한 경지를 평하고 있다고 보인다. 학문이 심원한 데다 정밀하기까지 하다면 그 학문은 가히 최고의 학문일 것이다. 학문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말한다면 혹 모르겠거니와 만일 학문의 테두리 안에서 논한다고 한다면 이 경지보다 더 높은 경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연암의 이런 기술은 홍대용의 학문에 대한 최대의 헌사獻辭라 이를 만하다.

이 단락의 이하의 서술은 덕보는 통달하고 명민하고 겸손하고 고아했으며, 식견이 심원하고 아는 것이 정밀하였다(德保, 通敏謙雅, 識遠解精)”라는 문장의 부연 내지 주석에 해당한다. 연암은 우선 홍대용이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지구 자전설을 처음 밝혔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미처 이에 관한 책을 쓰지는 못했지만(顧未及著書)”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연암은 홍대용 만년의 저작인 의산문답을 보지는 못한 듯하다. 이 책에는 지구 자전설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과학 분야에서 창안을 내놓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학자(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학자면 곧 천하의 학자를 뜻한다)를 국내 지식인들은 제대로 알아보고 있었을까?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국내 지식인들은 홍대용을 어떤 인물로 생각했을까? 연암은 당시 홍대용을 존경하는 사람들조차도 기껏해야 그를 일찍부터 스스로 과거를 단념한 채 명예와 이익에 대한 생각을 끊고서 조용히 집에 들어앉아 좋은 향을 피우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담박하게 지내며 세속을 벗어나 마음을 닦는 사람(見其早自廢擧, 絶意名利, 閒居爇名香皷琴瑟, 謂將泊然自喜, 玩心世外)’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은둔하여 자족적으로 지내면서 조촐히 심성이나 닦는 사람으로 알 뿐이었다는 것이다. 홍대용을 흠모한다는 사람들조차 이러했으니 당시 그 누가 홍대용의 진면목, 홍대용의 출중한 식견과 탁월한 경세적 능력을 알았겠느냐는 것이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요컨대 조선에서는 홍대용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이 비통한 사실을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 채 서술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홍대용의 진면목은 어디에 있는가? 연암은 그것이 학문과 식견에 바탕한 빼어난 경세적 능력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았다.

 

 

 

 

  1. 율력律曆: 원래 악률樂律(음률에 관한 이론)과 역법曆法을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요즘의 천문학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담헌은 수학과 천문학에서 당대 제1인자였다. [본문으로]
  2. 혼천의渾天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 시계의 구실을 한 기구인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제작되어 왔다. 홍대용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 지역의 옛 지명)에 살고 있던 선배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의 도움을 받아 두 대의 혼천의를 제작하여 충청도 천원군의 향리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사설 천문대를 짓고 거기에 비치하였다. 조선 초기와 중기에 만들어진 혼천의들이 수력으로 작동된 데 반해,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는 톱니바퀴로 자명종과 연결되어 그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3.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지닌 홍대용

 

 

그래서 덕보가 백사百事를 두루 잘 다스리고, 문란하고 그릇된 일을 척결할 수 있으며, 나라의 재정을 맡기거나 먼 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직하며, 군대를 통솔해 나라를 방어하는 데 뛰어난 책략을 지녔다는 걸 통 알지 못했다.
而殊不識德保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연암은 홍대용의 경세적 능력을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꼽아가며 명시하고 있다.

 

백사百事를 두루 잘 다스리고, 문란하고 그릇된 일을 척결할 수 있으며, 나라의 재정을 맡기거나 먼 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직하며, 군대를 통솔해 나라를 방어하는 데 뛰어난 책략을 지녔다(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여기서 백사를 두루 잘 다스릴 수 있었다(綜理庶物)’는 말은, 그가 영의정과 같은 재상의 자질이 있음을 말한 것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무리 죽은 사람을 미화한다 할지라도 이런 말을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란하고 그릇된 일을 척결할 수 있었다(剸棼劊錯)’는 말은, 대사헌과 같은 벼슬을 맡아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나라의 재정을 맡길 수 있었다(掌邦賦)’는 말은, 나라의 재정을 관장하는 호조戶曹의 책임자 노릇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는 말이다.

사신으로 보냄 직했다(使絶域)’는 말은, 정사正使의 책임을 맡겨 외국과 외교적 교섭을 벌이게 할 만한 경륜을 갖췄다는 말이다. 이 비슷한 표현은 열하일기에 실려 있는 허생전에도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조성기趙聖期 같은 분은 적국敵國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었건만 아무 벼슬도 하지 못한 채 늙어 죽었고, 유형원柳馨遠 같은 분은 군량軍糧을 조달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저 바닷가에서 소요하고 있지 않소? 그러니 지금의 국정을 맡은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 수 있소이다.

趙聖期拙修齋可使敵國, 而老死布褐, 柳馨遠磻溪居士, 足繼軍食, 而逍遙海曲? 今之謀國政者, 可知已.

 

 

조성기나 유형원처럼 식견이 높고 학문이 빼어난 선비들이 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궁벽한 곳에서 하릴없이 처사로 늙어 간 것에 대한 허생의(실은 연암의) 개탄이다. 계속해서 위의 본문을 검토해보자.

군대를 통솔해 나라를 방어하는 데 뛰어난 책략을 지녔다(有統禦奇略)’라는 말은, 병법에 뛰어나고 군사 제도에 밝아 병조판서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 홍대용은 실학을 독실하게 연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에서부터 나라의 재정 문제, 민생 문제, 교육 문제, 군사 문제, 외교 문제 등에 대해 자기대로의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현재 전하는 임하경륜林下經綸이라는 글에 홍대용의 이런 면모가(물론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되지만) 나타나 있어 참조할 만하다.

 

 

 

 

 

4.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꼭꼭 숨겨라

 

 

하지만 덕보는 자신의 재주가 남에게 드러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한두 고을의 수령으로 지낼 때[각주:1]에도 그저 관아의 장부를 잘 정리하고, 일을 미리미리 처리하며,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謹簿書, 先期會, 不過使吏拱民馴而已.

연암은 홍대용이 일국을 경영할 만한 재상의 자질을 지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실제 홍대용의 삶은 어떠했는가? 이 점은 이 단락의 끝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바, 한두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관아의 장부나 정리하고,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이 있는가. 그런 학문과 재주와 식견으로 고작 작은 고을 수령을 하면서 장부나 정리했다니!

연암은 홍대용이 자신의 재주가 남에게 드러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不喜赫赫耀人)”기에 그랬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홍대용이 지닌 인간적 미덕 중 겸손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기실 연암이 드러내고자 한 바는 당대의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홍대용처럼 걸출한 선비가 맞닥뜨려야 했던 지독한 역설이었을 터이다.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하면 노둔한 말보다도 못한 법이다. 조정에 우뚝 서서 일국을 경영할 책략을 갖춘 제갈량과 같은 선비에게 5천 호나 만 호의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게 한다면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겠는가. 홍대용이 스스로 과거를 단념한 채 명리에의 생각을 끊고서 조용히 집에 들어앉아 좋은 향을 피우거나 거문고를 타며(其早自廢擧, 絶意名利, 閒居爇名香皷琴瑟)” 지낸 것도 그런 생활 자체를 좋아해서라기보다 현실에 분만憤懣을 느낀 나머지 하릴없음에서 그랬던 게 아닐까. 연암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부분을 기술한 게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이 단락은 역설로 가득 차 있고, 비록 숨겨져 있어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그리고 당대의 집권층에 대한 연암의 분노랄까 비분강개랄까 그런 감정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노감은 직접적으로는 홍대용으로부터 촉발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연암 자신의 처지, 연암 자신이 직면해야 했던 역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단락의 구성을 보면 두 부분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부분은 중국인들이 보내온 서화와 편지 등을 빈소에 벌려 놓았다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조금 전에 검토한 내용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 부분이 묘한 대비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홍대용을 몹시도 알아주어 서화를 보내고 편지를 보내고 한 것이라면, 조선의 위정자와 사대부는 홍대용을 통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이러한 대비의 골자다. 이 단락의 취하고 있는 이러한 대비적 구성 때문에 역설은 더욱 커지고 비분은 더욱 깊어진다.

 

 

 

 

 

 

  1. 한두 고을의 수령으로 지낼 때: 태인 현감과 영천 군수를 지낸 것을 말한다. 연암은 이 글의 마지막 단락에서 이 점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5. 중국 친구인 엄성에게 출처관에 대해 얘기한 이유

 

 

덕보는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인 작은아버지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 육비[각주:1], 엄성[각주:2], 반정균[각주:3]을 유리창[각주:4]에서 만났다[각주:5]. 이 세 사람은 모두 집이 전당錢塘[각주:6]인데 다 문장과 예술에 능한 선비였으며, 그 사귀는 이들도 모두 중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덕보를 대유大儒로 떠받들며 심복心腹하였다. 덕보는 그들과 수만 글자의 필담을 나눴는데, 그 내용은 경전의 취지며 하늘의 명이 사람에게 품부稟賦된 이치며 고금古今 출처出處의 도리를 분변한 것으로, 그 견해가 웅대하고 걸출하여 기쁘기 그지없었다. 급기야 그들은 헤어질 때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한번 헤어지면 천고千古에 다시 만나지 못할 테지요. 지하에서 만날 그날까지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합시다.”
甞隨其叔父書狀之行, 遇陸飛嚴誠潘庭筠於琉璃廠. 三人者俱家錢塘, 皆文章藝術之士, 交遊皆海內知名, 然咸推服德保爲大儒. 所與筆談累萬言, 皆辨析經旨天人性命古今出處大義, 宏肆儁傑, 樂不可勝. 及將訣去, 相視泣下曰: ‘一別千古矣, 泉下相逢, 誓無愧色.’
 
덕보는 특히 엄성과 마음이 맞았다. 그래서 군자는 때를 살펴 벼슬을 하기도 하고 벼슬을 않고 처사處士로 살아가기도 하는 법이라고 엄성에게 넌지시 일러줬는데, 엄성은 크게 깨달아 그만 남쪽의 고향으로 돌아기로 뜻을 정하였다.
與誠尤相契可, 則微諷君子顯晦隨時, 誠大悟, 决意南歸.

앞서 이 글의 12, 3, 4이 대비적인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단락은 2의 내용을 잇는 반면, 34과 대립한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홍대용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중국 강남의 선비들은 홍대용에게 심복心服(마음으로 감복함)하여 그를 대유大儒(큰 선비)로 떠받들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군자는 때를 살펴 벼슬을 하기도 하고 벼슬을 않고 처사處士로 살아가기도 하는 법(君子顯晦隨時)”이라는 말은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다. 이후 유자儒者들은, 세상이 어지러워 도를 실현하기 어렵겠다고 판단되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만일 도를 실현할 만하다 싶으면 벼슬길에 나서는 것, 이것이 군자의 도리요 올바른 처세의 태도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왜 홍대용은 엄성에게 이를 환기시킨 걸까? 그리고 엄성이 홍대용의 이 말에서 깨달음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연암은 왜 굳이 이 이야기를 한 걸까?

홍대용은 비록 청나라와 중화 문명, 청나라와 한족의 인민, 청나라와 한족의 선비를 구분해 파악하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북학이라는 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반감이 없지 않았다. 청나라는 한때 조선을 침략하여 큰 수모를 안겨 준 나라이고, 부녀를 비롯한 많은 조선 인민들을 강제로 붙잡아갔을 뿐더러 왕족과 사대부들을 인질로 끌고 가 억류하거나 처형한 바 있다. 비록 그 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대부의 일원인 홍대용에게 있어, 그리고 연암에게 있어, 아직 망각되지 않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두 사람은 노론의 자제子弟였다. 물론 홍대용과 연암은 청나라에 대한 반감 때문에 무조건 중국과의 교류를 배격하거나 중국의 존재를 무시하는 보수 일변도의 경직된 입장에는 분명히 반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두 사람의 현실주의적 관점이 잘 확인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홍대용과 연암이 청나라에 대해 반감이 없었던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이 미묘한 지점을 우리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암이 열하일기허생전이나 호질 후기심세편審勢篇같은 글에서 표명해놓고 있는 청나라에 대한 반감과 당대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연암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녕 연암 심중의 말을 토로한 것이라 봐야 옳다. 그러므로 홍대용이 고금 인물들의 출처관出處觀을 환기시키며 엄성에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도록 권한 것, 그리고 스스로도 과거를 포기한 것 등은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당대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연유하는 행위들이라고 할 만하다. 홍대용이 엄성과 특히 가까웠던 것은 나이가 비슷해서 만이 아니라 이런 깊은 속내에서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1. 육비: 자가 기잠起潛이고 호는 소음篠飮이며 1719년생이다. [본문으로]
  2. 엄성: 자가 역암力闇이고 호는 철교鐵橋임 1732년생이다. [본문으로]
  3. 반정균: 자가 난공蘭公이고 호는 추루秋𢈢이며 1742년생이다. [본문으로]
  4. 유리창: 현재 중국 북경시北京市에 있는 문화의 거리다. 화평문 남쪽과 호방교虎坊橋 북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 선무구宣武區에 속한다. 원元ㆍ명明 때 이곳에 유리가마 공장이 있었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북경 외성外城의 상업이 날로 번창하여 한족 관리들이 선무문宣武門 밖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로써 외지고 쓸쓸했던 유리 공장 일대가 점차 번성하여 고서적ㆍ골동품ㆍ그림ㆍ탁본ㆍ문방사구 등을 판매하는 상점 거리가 형성되었으며, 상인ㆍ관리ㆍ학자ㆍ서생 등이 끊이지 않는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 [본문으로]
  5. 만났다: 홍대용은 첫날은 엄성과 반정균을 만났으며, 나중에 엄성과 반정균의 소개로 육비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북경에서 6천 리 떨어진 항주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왔던 한족漢族 선비들인데, 홍대용은 이들과 약 한 달에 걸쳐 일곱 번을 만났다. [본문으로]
  6. 전당錢塘: 지금의 절강성 항주시杭州市의 옛 이름이다. ‘민閩’은 지금의 복건성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문으로]

 

 

6. 홍대용과 엄성의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

 

 

그로부터 두어 해 뒤 엄성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였다. 반정균이 글을 써서 덕보에게 부음을 전하자 덕보는 애사[각주:1]를 짓고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쳤는데 그것이 전당에 전해진 그날 저녁이 마침 엄성의 대상大祥 [각주:2]이었다. 서호西湖[각주:3] 주변의 두어 고을에서 대상에 참예하러 왔던 사람들은 모두 경탄해 마지않으며 혼령이 감응한 결과라고들 하였다. 엄성의 형인 과, 덕보가 보내온 향을 피운 뒤 그 애사를 읽고 초헌初獻[각주:4]을 하였다.
後數歲, 客死閩中, 潘庭筠爲書赴德保. 德保作哀辭具香幣, 寄蓉洲, 轉入錢塘, 乃其夕將大祥也. 會祭者環西湖數郡, 莫不驚歎, 謂冥感所致 誠兄果, 焚香幣, 讀其辭, 爲初獻.
 
엄성의 아들 앙이 덕보를 백부伯父라 일컫는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글을 모은 철교유집鐵橋遺集[각주:5]을 덕보에게 부쳤는데, 이리저리 떠돈 지 9년 만에야 도착하였다. 그 책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초상이 있었다. 엄성은 민에서 병이 위독한 중에도 덕보가 선물한 우리나라 먹을 꺼내어 그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 먹을 관에 넣어주었다. 오중에서는 이 일이 기이한 일로 널리 전파되었으며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시문을 지어 이 일을 기렸다. 주문조朱文藻[각주:6]라는 사람이 편지로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子昂, 書稱伯父, 寄其父鐵橋遺集, 轉傳九年始至. 集中有誠手畵德保小影. 誠之在閩, 病篤, 猶出德保所贈鄕墨嗅香, 置胷間而逝, 遂以墨殉于柩中. 吳下盛傳爲異事, 爭撰述詩文. 有朱文藻者, 寄書言狀.

엄성이 죽을 때 조선산 먹을 가슴에 얹고 죽었으며 그래서 그 먹을 관 속에 넣어주었다는 이야기, 홍대용이 엄성의 부고를 받고 써 보낸 애사가 2년 뒤 엄성의 대상 날에 도착했다는 이야기, 엄성의 아들이 엮어 보낸 아버지의 유집이 돌고 돌아 9년 만에 홍대용에게 도착했으며 그 유집 속에 홍대용의 작은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이야기 등은 그 자체로도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국경과 생사를 넘은 우정에 감동되어서다.

현재 서울대 도서관에 철교전집鐵橋全集이 소장되어 있는데 제5책에 홍대용의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다. 엄성은 이 책에서 홍대용을 고사高士라 칭하고 있으며, ‘호걸지사豪傑之士로 소개하고 있다. ‘호걸지사란 재능과 식견이 빼어나고 기개가 있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이 책의 한두 대목을 인용해 본다.

 

 

2월 초팔일 내가 묵는 여관으로 그(홍대용)가 찾아와 심성心性의 학문에 대해 토론했는데, 대략 수만 언이나 되었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선비였다. 재주란 정말 그가 어디에 사는가 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것 같다. 우리들의 구두선口頭禪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게 많았다.

 

12, 다시 내가 묵는 여관으로 그가 찾아왔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수만 언의 필담을 나눴는데,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테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는 작은 일이니, 바라건대 각자 노력하여 피차 서로 벗으로 삼은 안목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이것이야말로 대사大事이니, 빈둥빈둥 지내면서 이 생을 잘못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훗날 각자 성취가 있다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어도 매일 조석朝夕으로 만나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신이 매년 중국에 들어가니 1년에 한 번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겠지요. 만약 내 편지가 오지 않는다면 이는 내가 두 형을 잊어버렸거나 내가 죽은 때문일 겁니다.”

 

 

연암은 이 단락의 끝에 홍대용과 엄성의 생사를 뛰어넘은 아름다운 우정이 중국 강남에 회자되었으며 사람들이 시문으로 이 일을 기렸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홍대용과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을 기리는 데 이 단락의 목적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홍대용과 강남 선비들 간의 이 감동적인 우정을 통해 연암이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은, 홍대용이 국내에서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대유大儒로 인정받았다는 점,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홍대용에 대한 경모敬慕의 염을 놓지 않은 중국인이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즉 중국인들과의 이 우정을 통해 연암은 홍대용의 어떤 면모에 대해, 다시 말해 홍대용의 출중한 학문과 그 빼어난 인품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2의 내용을 잇는 반면, 34과 대립하는 구성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할 터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단락에서 항주의 세 선비가 다 문장과 예술에 능한 선비였으며, 그 사귀는 이들도 모두 중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皆文章藝術之士, 交遊皆海內知名)”라고 한 말이 잘 이해된다.

 

 

 

 

 

 

  1. 애사哀辭: 일찍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는 글이다. 엄성은 홍대용이 귀국한 2년 뒤인 1768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당시 홍대용은 부친상 중이었지만 엄성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몹시 애통해하였다. [본문으로]
  2. 대상 날: 죽은 지 2년 만에 지내는 제삿날로, 이날 삼년상이 끝난다. [본문으로]
  3. 서호西湖: 항주에 있는 유명한 호수 이름이다. [본문으로]
  4. 초헌初獻: 제사에서 첫 번째 술을 올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5. 『철교유집鐵橋遺集』: 엄성의 유고집으로, 그 아들인 엄앙이 편집했다. [본문으로]
  6. 주문조朱文藻: 항주의 선비다. [본문으로]

 

 

7. 홍대용이 청의 위대한 학자인 대진을 만났다면

 

 

사실 항주의 세 선비는 문장과 예술에서 그리 빼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1879~1948)는 당시 홍대용이 대진戴震(1724~1777)과 같은 청나라의 석학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한 바 있다.

대진은 고증학자로서 기철학氣哲學을 토대로 다양한 학문 세계를 펼쳐 나갔다. 20세기 전반기 중국의 걸출한 교육가인 채원배蔡元培는 청대淸代의 가장 위대한 세 사상가로 황종희黃宗羲(1610~1695), 대진, 유정섭兪正燮(1775~1840)을 꼽은 바 있다. 홍대용 역시 기철학 위에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갔던 만큼 만일 두 사람이 만났더라면 서로 도움이 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대진의 사상은 크게 보아 구래舊來의 중국 철학의 틀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에게는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은 기존의 틀을 허무는, 인간학적이자 정치학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 발견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대진의 상상력은 홍대용의 그것보다 훨씬 작으며, 그 문제의식은 홍대용의 그것과 달리 퍽 진부하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대진의 대표 저작인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과 홍대용의 대표 저작인 의산문답을 읽고 직접 한번 비교해 보라. 그러므로 홍대용이 대진을 만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후지츠카처럼 홍대용이 이 때문에 구투를 벗지 못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후지츠카가 보여주는 사고방식은 조선은 늘 중국의 아류이고 그 영향 아래 있었다는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본제本題로 돌아가자. 항주의 세 선비의 실상이 이러했으므로, “그 사귀는 이들도 모두 중국의 저명한 인사들(交遊皆海內知名)”이라는 연암의 말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연암 스스로도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연암은 왜 굳이 이렇게 말했을까? 아마도 홍대용이 조선에서와 달리 중국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이런 과장이 나타나게 된 것이리라.

 

 

 

 

 

8. 중국의 벗들이여 천하지사인 홍대용을 알려라

 

 

아아! 덕보는 생전에 이미 우뚝하여 옛사람의 기이한 자취와 같았으니, 훌륭한 덕성을 지닌 벗이 이 일을 널리 전해 그 이름이 한갓 강남에만 유포되는 데 그치지 않게 한다면 굳이 묘지명을 쓰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은 불후不朽가 되리라.
!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其墓, 以不朽德保也.”

이 단락은 2부터 6까지의 서술을 총괄하면서 홍대용이 생전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었나 하는 점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런 다음, 홍대용의 중국인 벗들은 이처럼 위대한 인간이 단지 중국의 강남에만 알려지게 하지 말고 천하에 알려지게 해 홍대용이 불후不朽하도록 해주기 바란다는 완곡한 말을 붙이고 있다.

여기서 불후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실 연암의 이 묘지명 역시 불후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단락의 평설 중 독자들에게 천하의 지기라는 말을 잘 기억해두기 바란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것은 이 대목을 염두에 두어서다. ‘천하의 지기란 홍대용의 중국인 벗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연암이 이 말로써 홍대용이 천하지사天下之士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비에는 일향지사一鄕之士가 있고, ‘일국지사一國之士가 있으며, ‘천하지사가 있다. ‘일향지사란 한 고을에서난 통하는 선비를 말하고, ‘일국지사란 한 나라에서 통하는 선비를 말하며, ‘천하지사란 천하, 즉 세계에 통하는 선비를 말한다. 홍대용은 천하의 지기로부터 심복心服과 존경을 받았으니, ‘천하지사라 이를 만하다.

연암은 바로 이 대목에서, “중국인 벗들이여! 천하지사인 홍대용을 중국 전역에 알려 불우했던 그로 하여금 불후를 누리도록 하라!”는 말을 완곡한 어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9. 홍대용의 신원(身元)

 

 

그 부친은 이름이 역인데 목사牧使를 지내셨고, 조부는 이름이 용조龍祚인데 대사간大司諫을 지내셨으며, 증조부는 이름이 숙인데 참판參判을 지내셨다. 모친은 청풍淸風 김씨金氏이니, 군수 방의 따님이시다. 덕보는 영조 신해년(1731)에 태어났으며, 음보蔭補[각주:1]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고, 곧 돈녕부敦寧府 참봉參奉으로 옮겼으며, 다시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시직侍直[각주:2]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승진되고, 종친부宗親府 전부典簿로 전임되었다가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나갔으며, 영천 군수로 승진하여 두어 해 재임하다[각주:3]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처는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따님인데, 13녀를 낳았다. 사위는 조우철趙宇喆ㆍ민치겸閔致謙ㆍ유춘주兪春柱이다. 돌아가신 그해 128일에 청주淸州 모좌某坐[각주:4]의 땅에 장사지냈다.
考諱櫟牧使, 祖諱龍祚大司諫, 曾祖諱潚參判, 母淸風金氏, 郡守枋之女. 德保以英宗辛亥生, 得蔭除繕工監監役, 尋移敦寧府參奉, 改授世孫翊衛司侍直, 叙陞司憲府監察 轉宗親府典簿. 出爲泰仁縣監, 陞榮川郡守, 數年以母老辭歸. 配韓山李弘重女, 生一男三女, 婿曰趙宇喆閔致謙兪春柱. 以其年十二月八日, 葬于淸州某坐之原.

이 단락은 홍대용의 가계와 벼슬, 그 자녀들, 그리고 장례일과 산소의 소재지가 서술된다.

보통의 묘지명에서는 이런 사항은 대체로 묘지명의 앞부분에 서술되며, 묘지명의 핵심적 내용을 이룬다. 하지만 연암의 묘지명에서는 끝 부분에서 이런 사실이 서술되고 있다. 이 점, 파격적 구성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연암은, 1에 제시된 부고 중에서 언급한 사항은 되도록 이 대목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중복을 피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가령 홍대용의 본관이 남양이라는 점, 그 자호字號, 운명한 일시, 향년, 아들 이름 등은 여기서는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런 데서 연암 글쓰기의 용의주도함이 확인된다. 그리하여 부고 내용과 대목에서의 서술을 합쳐 놓아야 비로소 망자亡者에 대한 신원이 온전하게 파악된다.

 

 

 

 

  1. 음보蔭補: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함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2.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시직侍直: 벼슬은 세손世孫을 시위侍衛하는 직책이다. 당시 세손은 훗날의 정조正祖다. 홍대용은 이 벼슬에 있으면서 학문적으로 정조를 가르치며 정조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홍대용은 당시 정조와 주고받았던 말을 일기로 자세히 기록해두었는데, 그것이 지금 전하는 『계방일기桂坊日記(계방은 세손익위사의 별칭)』이다. [본문으로]
  3. 영천 군수로 승진하여 두어 해 재임하다: 홍대용은 1780년 영천 군수가 되었다가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내관內官 3년, 고을 원으로 6년, 도합 9년의 벼슬살이를 했다. 김태준 교수가 작성한 홍대용 연보에 의하면 홍대용은 이해 10월 22일 중풍으로 상반신에 마비가 왔고 이튿날 별세하였다. [본문으로]
  4. 모좌某坐: 무슨 방향이라는 뜻인데, 무덤이 향하는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홍대용은 향리인 충남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촉칭 구미들 기슭에 묻혔다. [본문으로]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각주:1]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각주:2]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각주:3]를 미워해서지.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이 명은 짧지만 대단히 문제적이다. 연암의 문집 전체가 간행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와서 였다. 당시 박영철이라는 사람이 돈을 대고 출판을 주관하였다. 이 본을 보통 박영철본 연암집이라 부른다. 그런데 박영철본 연암집에는 이 명이 빠져 있다. 하지만 과정록에는 다음과 같이 이 명을 특별히 소개해 놓고 있다.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서호에서 이제 상봉하면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입에 반함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를 미워해서지.

 

 

한편,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열하일기에도 이 명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魂去不冥招 相逢西子湖 넋이 떠난다고 초혼할 것 없네 서호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口裏不含珠 怊悵詠麥儒 입에 반함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에 분개해서지

 

 

본서에서 제시한 명은 원래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연암산고燕巖散稿라는 책에 실려 있는 명이다. 이처럼 이 명은 현재 세 가지 이본異本이 존재하는데, 조금씩 그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연암산고과정록의 경우, 연암산고쪽이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宜笑舞歌呼)”이라는 구절이 하나 더 있을 뿐 나머지는 완전히 같다는 사실이다. 추측컨대 원래는 명 속에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었는데, 후에 연암 스스로 이 부분이 너무 과격하다고 판단해 빼버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 덧붙여 추측컨대, 지금의 박영철본 연암집에 이 명이 빠진 것도 연암 자손 중의 누군가가 가장본家藏本 연암집(박종채가 편차編次한 것으로 추정된다)에서 고의로 이 명을 없애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 박종채일까? 아니면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박종채가 그랬다면 그는 이 명이 뭔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해 문집에서는 일단 빼 버리고, 멸실을 막기 위해 과정록에다 살짝 언급해놓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추론일 뿐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1. 서호西湖: 항주에 있는 서호를 말하는바, 여기서는 곧 항주를 뜻한다. [본문으로]
  2. 반함飯含: 옛날에 염습殮襲(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리는 일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 이런 말이 보인다. “담헌공(홍대용)은 평소 주장하기를, 장례 때 반함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으며, 또한 아버지(연암)에게 자신의 장례를 돌봐 달라고 당부하셨다. 급기야 공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이 사실을 그 아들 원薳에게 일러 주었다. 원 또한 부친의 유지遺旨를 들은 터라, 부친이 쓰시던 물건들을 무덤에 묻었을 뿐 반함하지는 않았으니 그 뜻에 따른 것이다.” 연암 역시 담헌이 한 것처럼 자신의 장례 때 반함을 하지 말라는 말을 죽기 전에 자식에게 남겼다. [본문으로]
  3. 보리 읊조린 유자: 『장자』 「외물外物」편에 보면, 유자儒者란 입만 열면 시詩와 예禮를 거론하지만 실제로는 남의 무덤을 몰래 파헤쳐 시체의 입안에 있는 구슬을 빼내는 도둑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유자는 가증스럽게도 이런 시를 읊고 있다. “푸릇푸릇한 보리 / 무덤가 언덕에 무성하네. / 생전에 남에게 보시한 적 없으면서 / 죽어서 어찌 구슬을 머금고 있나?”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점잖은 체하면서 실제로는 더없이 위선적인 유자를 야유하고 있다. 연암은 『장자』의 이 고사를 끌어들여 양심적인 실학자 홍대용을 당시 조선의 위선적인 유자들과 대비하고 있다. [본문으로]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

 

 

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를 미워해서지.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이런 일에 대해 추론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기는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왜 이 명이 이처럼 삭제되거나 변개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을까하는 물음에 답하는 일이다. 정말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답한다면, 이 명에 내포된 불온함과 과격함 때문이다.

우선 이 명의 제1구인 宜笑舞歌呼를 보자. 이 구절은 웃다()’ ‘춤추다()’ ‘노래하다()’ ‘환호하다()’라는 네 개의 동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 네 개의 동사는 참을 수 없는 지극한 기쁨을 몸과 관련된 동작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네 개의 동사가 결합해 만들어 내는 이미지는 대단히 격정적이고 직절적直截的인 것이다. 그것은 점잖음, 절제, 온유돈후溫柔敦厚 등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처럼 표현 방식에 있어 이 명의 제1구는 감정을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그대로 쏟아 내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감정의 꾸밈없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경망스럽거나 천박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제1구는 이처럼 그 자체의 표현도 문제거니와 제2구의 의미론적으로 연결될 때 더욱 그 문제성이 증폭된다. 2구는 이 글의 5에서 서술된 다음의 말, 이제 한번 헤어지면 천고千古에 다시 만나지 못할 테지요. 지하에서 만날 그날까지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합시다(一別千古矣, 泉下相逢, 誓無愧色)”와 호응한다. 요컨대 이 명의 제12구는, 이제 홍대용이 죽었으니 그 넋이 중국의 강남땅으로 가 그리도 그리워하던 중국인 벗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기쁜 일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토록 높은 식견과 탁월한 학문을 지녔건만 본국에서는 알아주지 않았는데 중국의 선비들은 홍대용이 대유大儒임을 알아보고 벗으로 사귀며 심복心服했으니 차라리 죽어서 그 혼령이 중국의 벗들과 상봉할 수 있게 된 것이 더 잘된 일이며 축하할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조선 사회, 당대의 위정자들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풍자에 다름 아니다. 이런 풍자성 때문에 이 명의 제1구는 그 불온성이 증폭된다.

이 명의 제3구 역시 방금 전에 인용한 5에의 지하에서 만날 그날까지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합시다(泉下相逢, 誓無愧色)”라는 말과 호응한다.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라는 말은, 선비로서 떳떳하게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 명은 제3구를 매개로 하여 제4구와 제5구로 옮겨간다.

 

 

 

 

 

12. 반함하지 않은 홍대용의 일화를 끄집어내다

 

 

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를 미워해서지.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이 마지막 두 구에서 이 명의 풍자는 절정에 달한다. 평생 양심적 실학자로 살았던 홍대용이야 스스로에게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지만, 선비들이라고 다 그런가? 주변을 돌아보면 위학과 허학虛學으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선비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자들이 학자로 행세하고, 명성을 누리고, 권력에 빌붙어 출세하고, 부귀를 누리지 않던가? 이처럼 이 두 구는 홍대용의 삶과 극명히 대비되는 당대 사대부들의 위선적 삶에 대한 야유와 조소다.

과정록에 나오는 말이지만, 연암의 장인 이보천李輔天은 연암이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함을 늘 걱정했다고 한다. 이 두 구에서도 그런 연암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연암이 세상 물정을 알게 된 10대 후반 이래 전생全生에 걸쳐 가장 못 견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입으로는 온갖 그럴 듯한 말, 고상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뒤로는 추악하고 야비하며 위선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사대부들의 자기기만이 아니었던가 한다. 문제는 이런 자들이 학문으로 행세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도덕과 예의 수호자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일 터이다. 이에 대한 분노감을 담고 있는 연암의 작품은 아주 많지만 대표적인 것을 몇 개만 들어본다면 젊은 시절에 쓴 마장전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중년기에 쓴 호질같은 작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은 지금 비록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학문을 팔아 행세하는 위선적 선비의 행태를 대도大盜’, 큰 도둑놈이라고 풍자한 작품이다. 대학자로 명성이 높지만 뒤로는 과부와의 사통을 일삼는, 호질에 등장하는 썩은 선비 북곽선생 역시 역학대도’, 즉 학문을 파는 큰 도둑놈이다. 이 명의 제5구에 보이는 보리 읊조린 유자란 바로 이런 위선적인 선비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다.

연암은 혹시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닐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 점과 관련해, 홍대용이 중국에서 돌아온 직후 예학자禮學者 김종후金鍾厚와 격렬한 논쟁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논쟁 중에 김종후가 예학을 강조한 반면 홍대용은 예학이란 아무 쓸모가 없으며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실학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는 사실, 그리고 김종후가 훗날 김귀주金龜柱에게 붙었다가 다시 홍국영에게 붙는 등 권력에 이리저리 빌붙는 행태를 보였다는 점 등은 일고一考할 만하다.

 

홍대용은 자신이 죽은 후에 반함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하는데 이는 위선적인 유자들을 미워해서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연암은 왜 이 명에서 그렇게 말했을까? 이는 하나의 문학적 책략으로 봐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연암은 홍대용이 반함하지 않은 사실에 착안하여 장자의 유명한 고사를 끌어와 현실의 어떤 문제를 풍자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제5, 6구는 구체적 맥락을 떠나서 읽는다면 유자儒者 일반에 대한 폄하와 조롱으로 읽힐 수 있다. 그 경우 그것은 곧 조선의 지배계급과 지배 이념과 사대부 문화의 정체성을 그 근간에서 부정하거나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의 이 고사는 이른바 이단異端의 입장에서 유학을 공격하고 유학의 정당성을 전복하는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몹시 불온하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수 있다. 아마 이 때문에 이 명은 제거되는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13. 총평

 

 

1

연암은 이 글에서 홍대용과 자신의 우정, 홍대용과 국내 지인들과의 우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하고 있지 않다. 이는 글의 초점을 중국인들고의 우정 쪽에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2

이 글의 주제가 홍대용과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 글을 제대로 읽은 게 못 된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은 비록 몹시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암은 이 방편을 통해 홍대용에 대해, 그리고 당대의 조선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미 많은 말을 했으니 독자들께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3

이 글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감정은 비분悲憤이다.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마음이 없거나, 마음이 아니라 눈으로만 글을 읽는 사람일 터이다.

 

 

4

창강 김택영은 이 글에 이런 평을 붙인 바 있다.

앞부분과 뒷부분에 중국과 관련된 일을 말하고, 그 속에다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담은 구절을 삽입하여 몰래 자기와 덕보가 모두 본국本國에서 뜻을 펴지 못한 것을 말했거늘, 필세筆勢가 풍격風格이 있고, 변화가 지극하다.”

 

 

 

 

인용

지도 / 목차 / 작가 / 비슷한 것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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