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
삼한三韓 1 서른여섯 도회지 2에 노닐다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가없는데 이름난 산과 높다란 봉우리가 그 사이에 솟아 있어 백 리 이어진 들이 드물고 천 호戶 되는 고을이 없으니, 그 땅덩어리가 참으로 좁다 하겠다. 遊乎三韓三十六都之地, 東臨滄海, 與天無極, 而名山巨嶽, 根盤其中, 野鮮百里之闢, 邑無千室之聚, 其爲地也亦已狹矣. |
대단히 거창하게 서두를 열고 있다. 아주 높은 곳에서 한반도의 땅덩어리를 내려다보면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연암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 유언호ㆍ신광온申光蘊 등의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 글은 그 이듬해인 1766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東臨滄海)” 운운한 말에 전년도에 있었던 금강산 유람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이 단락의 요지는 맨 마지막 문장에 있다. 즉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있다. 그런데 연암은 왜 하필 이 사실을 글의 서두에 부각시키고 있는 것일까? 계속 읽어야 이 의문이 풀린다.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이 단락의 문체적 특징은 시시비비를 따지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 있다. 우리는 이 글 이전에 일곱 편의 연암 글을 읽었지만, 그것은 대개 풍경 묘사나 서사敍事에 특장特長이 있었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어떤 주장을 펼친 글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처럼 논리를 바탕으로 시시비비를 따지거나 주의ㆍ주장을 펼치는 글을 ‘의론문議論文’이라고 한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산문은 의론문과 서사문敍事文이 주요한 두 축을 이룬다. 연암은 서사문을 쓰는 데 특히 귀신같은 재주가 있었지만, 의론문도 아주 잘 썼다.
연암은 이 단락에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사색당파로 나뉘어 자기 당파의 사람이 아니면 혼인 관계도 맺지 않고 친구도 하지 않으면서 서로 헐뜯고 공격하는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크게 보아 다시 ‘사士’이건만 지나치게 지체를 따져 무반이나 서얼, 중인을 차별하거나 천시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동네에 살면서도 당색과 지체가 다르면 결코 벗으로 사귀지 않는 데 대해 “그 습속이 어찌 어리 편협할까!(其俗又何其隘也)”라며 탄식하고 있다.
‘편협할까’라는 말은 1단락의 마지막 문장 “그 땅덩어리가 참으로 좁다 하겠다(其爲地也亦已狹矣)”의 ‘좁다’와 그 의미가 통한다. 아마도 연암은 조선이 땅덩어리가 좁다 보니 그 사대부적 기습氣習도 편협해진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 양자楊子ㆍ묵자墨子ㆍ노자老子ㆍ부처와 같은 유도 아니건만 네 가지 의론이 존재하고(非古之所謂楊ㆍ墨ㆍ老ㆍ佛而議論之家四焉): 당시 조선에 노론老論ㆍ소론少論ㆍ남인南人ㆍ소북小北의 네 당파가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자는 양주라고도 하는데, 전국시대 사상가로 극단적인 이기주의利己主義를 표방했으며, 묵자는 양자와는 달리 반대로 이타주의에 해당하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했고,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하였다. 연암은 당시 조선의 사색당파가 이런 사상적 대립도 못 되는 주제에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워 상대방을 헐뜯고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을 비꼬기 위해 이런 말을 햇다. 이 비꼬는 어투에서 서른 살 연암의 패기가 느껴진다. [본문으로]
- 종족이 같으며(族類同也): 곧 민족이 같다는 말이다. ‘종족’이라는 말의 원류는 ‘족류族類’이다. ‘민족’이라는 말은 서양어 ‘nation’의 번역어로 근대 일본이 처음 만들어 쓴 용어인데 이후 동아시아에 두루 통용되었다. 전근대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말보다는 ‘종족’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본문으로]
3. 연암이 홍군이라 호칭하는 이유
홍군洪君 덕보德保 1는 일찍이 한 필 말을 타고 사행使行을 따라 중국에 간 적이 있다. 洪君德保, 嘗一朝踔一騎, 從使者而至中國. |
이 단락에서 비로소 본론이 전개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홍대용을 “홍군 덕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아래부터는 덕보라는 말도 빼 버리고 아예 ‘홍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호칭 속에는 부르는 사람고 불리는 사람 양자의 관계와 친밀도 등이 함축되어 있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는 지금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칭이 까다롭고 다양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에 따라 아주 섬세하게 호칭을 골라 쓰는 것이 일반적인 관레였다. 당시는 ‘예禮’를 강조하는 사회였던지라,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예’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홍대용을 처음 언급할 때 “홍군 덕보”라고 하고 그 다음부터는 ‘홍군’이라는 칭호를 쓴 데에는 이 글을 쓸 당시 연암과 홍대용의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고 봐야 옳다. 어떤 관계일까? 당시 친구간이나 친한 사람들끼리는 보통 ‘자字’로 불렀다. 혹은 ‘자’에다가 ‘씨氏’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친밀하다고 해서 어른뻘의 사람을 ‘자’로 부르지는 않았다. 그 경우 호로 부르거나 호에다가 ‘장丈(어른이라는 뜻)’이나 ‘선생’이라는 말을 덧붙여 불렀다. 존장尊丈 뻘의 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도 ‘자’로 불렀다.
이렇게 본다면, 연암이 홍대용을 그 ‘자’로 부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하등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홍군’이라는 칭호다. 연암은 이 글 말고도 홍대용을 ‘홍군’이라고 부른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냥 ‘자’ 아니면 ‘호’로 불렀다. ‘군君’이라는 칭호는 지금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에만 사용되지만, 예전에는 그런 경우만이 아니라 친구 간의 평교平交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연암이 자신의 벗들에 대해 ‘군’이라는 호칭을 쓴 용례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연암은 이 글에서 처음에만 “홍군 덕보”라 하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홍군’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글을 써 줄 당시 연암과 홍대용은 아직 그다지 친분이 없던 사실의 반영이 아닐까? 홍대용은 연암이 글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연암을 찾아와 자기 책의 서문을 부탁했지만 그 당시 둘 사이에는 별로 친교가 없었던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어쩌면 홍대용이 서문을 부탁하기 위해 연암을 찾아온 이때 두 사람은 처음 해후한 것인지도 모른다. 추측컨대 이후 홍대용이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유하게 되는 것도 박지원과의 이 만남이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당시 서른 살의 박지원은 홍대용과의 만남을 계기로 과학과 기술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한편, 당시 조선 사대부 일반이 견지하고 있던 존명배청尊明排淸(명나라를 높이고 청나라를 배격함)의 비현실성을 깨닫고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청나라를 직시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에 대한 타개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해나가는 방향으로 사상을 ‘업그레이드’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북학北學’이다. 연암과 홍대용의 첫 만남을 적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단락은 바로 이 북학의 최초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한다.
- 덕보德保: 홍대용의 자字다. 호는 담헌湛軒이다. [본문으로]
4. 항주라는 곳의 문화적 특성
시가지를 배회하고 여항閭巷의 좁은 골목을 바장이다가 마침내 항주杭州 1에서 온 세 명의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 |
이 단락은 홍대용이 작은 아버지 홍억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갔다가 그곳의 유리창에서 항주의 세 선비를 만나 한 달 가까이 사귀며 학문적 토론과 인간적 친교를 나눈 일을 말하고 있다.
“시가지(街市)” 운운했는데, 바로 ‘유리창’을 가리킨다. 지금도 북경에는 유리창이 남아 있어 그곳에 쭉 들어서 있는 점포들이 미술품과 골동품, 서적 등을 판매하고 있지만, 당시의 유리창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유리창은 자금성紫禁城 가까이에 있었고 게다가 그 인근에 조선 사신들이 묵던 조선관朝鮮館이 있었기에 당시 사행使行의 일원으로 북경에 간 문인들은 유리창을 찾아가 견문을 넓히거나 서적과 서화, 문방구 등을 구입해오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북경에 올라온 중국의 지방 유생들이 유리창에 있는 여관에 묵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혹 이들과 접촉해 학문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유리창을 찾는 조선 지식인들도 없지 않았다. 홍대용 역시 그런 기대를 갖고 유리창을 찾았던 것이다.
“시가지를 배회하고 여항의 좁은 골목을 바장이다가 마침내 항주에서 온 세 명의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라는 문장은 그 점을 말하고 있다. “항주에서 온 세 명의 선비”란 엄성ㆍ반정균ㆍ육비를 말한다. 당시 엄성은 35세, 반정균은 25세, 육비는 48세였다. 이 셋은 모두 과거를 보기 위해 항주에서 올라와 유리창 일대의 간정동乾淨衕이라는 곳에 있는 여관에 묵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항주’라는 곳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학술사 내지 예술사에서 항주는 독특한 지위를 점하는 곳이다. 그곳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학문과 예술의 요람이었다. 항주는 그 인근의 소주蘇州와 함께 이른바 ‘강남江南’으로 일컬어지면서 중국 사대부 문화의 기지基地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남송대南宋代 이래 강남은 중국 문화를 견인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문인화文人畵 양식이란 것도 명대明代에 바로 이 강남에서 개화한 것이며, 강남이 그 본거지였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고 업신여겼기 때문에 한족漢族이 이룩한 중화 문명의 거점으로서 강남을 주목하거나 동경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당시 조선 사대부에게 있어 강남은 지리적 공간을 넘어 가치문제가 개입된 하나의 이념적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항주 선비를 만난 홍대용의 설렘과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터이다.
- 항주杭州: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지명으로, 송대宋代 이래 사대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본문으로]
5. 중국 친구와 사귀다 보니 인식이 바뀌네
홍대용은 이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가 학문, 사상, 역사, 문학, 예술 등의 온갖 주제를 대상으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했으며, 찾아가지 아니한 날은 편지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들은 비록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공동 문자라 할 한문에 의한 필담筆談을 통해 깊은 속내까지 서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 당시 홍대용은 필담이 적힌 종이들의 일부를 둘둘 말아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으며, 귀국한 후 이를 바탕으로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원래 제목이 『간정동 회우록』이며, 일명 ‘간정동 필담’이라고도 했다.
담헌 홍대용의 글들은 일제 강점기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에 의해 수습되어 『담헌서湛軒書』라는 제목의 책으로 간행되기에 이른다. 이 『담헌서湛軒書』 속에 『간정동 필담』이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중국의 세 선비는 양명학과 불교를 넘나들면서 비교적 활달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유학을 논하고 있는 데 반해, 홍대용은 엄정한 자세로 양명학을 비판하고 주자학을 옹호하고 있다. 특히 첫날의 만남에서 홍대용과 중국 선비들은 그 사상적 풍모에 있어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조선의 어떤 개인과 중국의 어떤 개인의 차이라기보다 이념적이고 교조적이며 편협한 면모가 강했던 조선 사대부의 성격적 특질과 비교적 유연하고 회통적會通的이며 실제적인 면모가 강했던 중국 사대부의 성격적 특질의 맞부딪침으로 이해되어야 옳다. 항주의 세 선비에게 주자朱子는 일개 사상가에 불과했으며, 조선 사대부들이 우러러 떠받드는 것과 같은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아마 홍대용은 이들의 이런 태도와 말투를 처음 대했을 때 내심 몹시 당혹스러워하며 충격에 휩싸였을 터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홍대용의 태도는 달라져 간다. 만남이 거듭되면서 홍대용은 자신이 견지했던 사상과 이념적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 것 같으며, 항주 선비들의 사상적 활달함에 호감을 갖게 되면서 양명학은 물론이려니와 불교 등 다른 이단 사상에 대하여 이전에 비해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 미묘한 변화가 『간정동 필담』을 읽어보면 감지된다.
홍대용은 귀국 후 십 수 년에 걸쳐 이들 중국인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속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인격적 교유를 나눈다. 그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학문과 인격을 닦아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격의 없으면서도 절절한 어조로 서신을 통해 의견을 나누며, 격려와 충고를 했다. 그것은 명예와 이해관계와 국경을 초월한, 그리고 상호이해와 겸손함 위에 펼쳐진,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달리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홍대용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엄성과 특히 가까웠다. 엄성은 훗날 병으로 위독할 때 홍대용이 선물로 보내 준 조선산 먹을 꺼내어 그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 먹을 관에다 넣어주었다고 한다. 이 일은 연암이 쓴 「홍덕보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 육왕학陸王學: 송나라 육구연陸九淵(1139~1192)과 명나라 왕수인王守仁(1472~1528)의 학문을 일컫는 말이다. 홍대용과 항주 선비들이 북경에서 주고받은 필담 및 서신에는 이 두 인물의 사상에 대한 토론이 자주 보인다. 주자와 육구연은 송대 유학의 중요한 두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주자학자들은 육구연이 학문 연구를 경시하고 마음의 수양만 중시한 점을 들어 그를 이단시하면서 공격하였다. 왕양명은 처음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그것이 공소空疏하고 지나치게 번쇄하다는 점을 깨닫고는 마음공부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상 체계를 창시하였다. 이것이 곧 양명학陽明學이다. 주자학에서는 ‘물物’을 객관적 실체로 인정함과 동시에 ‘이理’를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실체로 간주한다. 한편 ‘심心’에는 하늘의 ‘이’가 품부되어 있는바 이것이 곧 ‘성性’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물物’이란 ‘심’의 자기 확대에 불과하며, ‘심’ 자체가 곧 ‘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마음과 사물에서 부단히 ‘이’를 궁구해가는 일이 요구되는 반면, 양명학에서는 간단히 ‘심’만 닦으면 된다. 전자가 객관유심론이라면, 후자는 주관유심론이다. 이 점에서 양명학은 선학禪學과 친연성이 있다. 조선과 달리 명나라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성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청초淸初까지 이어졌다. 더군다나 항주는 왕수인의 고향인 여요餘姚 인근으로 특히나 양명학이 강세를 보이던 곳이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다. 일찍이 퇴계가 양명학을 이단이라 비판한 이래 조선에서 양명학은 늘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는 하나 17세기 이후 소론少論 가문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그 학맥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조선의 학문 풍토에서는 설사 자신이 양명학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대놓고 표방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주자학의 외피外皮로 자신의 사상을 은폐하였다. 그만큼 조선은 주자학의 자장磁場이 강했으며, 주자학 일변도였다.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모두 중국에서 전래한 사상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과는 달리 조선은 사상적 융통성을 갖지 못했으며, 아주 경직되고 편협하며 대단히 배타적인 방향으로 하나의 사상을 절대화해갔다. 이는 조선 사대부의 고루함 내지는 이념적 편협성과 관련된다. [본문으로]
6. 중국인과의 교류로 우리 홍대용이 달라졌어요
홍대용이 체험한 1766년 초봄의 이 만남은 이후 홍대용이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며, 한중 교류사에서도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홍대용은 귀국 후 박지원과 함께 이른바 ‘북학’에 제창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흔히 오해되고 있듯, 홍대용의 사상적 고취가 고작 북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홍대용은 그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즉 그는 오랜 숙고를 거쳐, 진리의 배타적 독점성을 주장하던 당대의 주자학에서 벗어나 양명학, 서학西學, 불교, 노장老莊, 묵가 등 모든 이단 사상도 그것대로의 장점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징심구세澄心求世’, 즉 인간의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바,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그 장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과 다른 존재의 경계, 나와 남의 경계, 이 종족과 저 종족의 경계, 지구와 다른 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공생과 공존, 호혜互惠의 철학을 구축해내기에 이른다.
그것은 중국 측의 ‘중화주의=중국 중심주의’와 조선 측의 ‘조선 중화주의=조선 중심주의’, 이 양자를 근사하게 깨뜨려 버리고 전혀 새로운 이론적 대안을 모색한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또한 자기 존재에 대한 정당한 긍정과 발견이면서 동시에 자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른 존재, 즉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고 손을 내미는 그런 성격의 철학이라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철학은 인간과 자연, 한 인간과 다른 인간, 하나의 종족과 다른 종족이 서로 이해하고 자신을 낮추며 서로 평등한 눈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홍대용이 제기한 이 평화의 메시지는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당대 동아시아의 어떤 사상가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고, 21세기인 지금 보더라도 여전히 진취적이고 매력적이다. 홍대용의 이런 철학은 『의산문답』이라는 책을 통해 완성되었다.
한편 한중 교류사에서도 홍대용은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홍대용의 이 만남이 선례가 되어 이후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파의 여러 인물들이 중국에 가 중국인들과 교유하게 되며, 이런 현상은 19세기로 이어진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라든가 추사의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그 좋은 예다. 이 두 사람은 당대 중국의 저명한 문인ㆍ학자들과 폭넓은 친교를 맺었으며, 이는 홍대용이나 박지원이 교유했던 중국인들이 별로 명망 있는 사람이 못 되었던 점과 큰 대조가 된다. 중국의 명망가들과 접촉하면서 그들과 시를 수창酬唱하거나 그들의 글씨나 그림을 얻어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경향은 박지원의 문생인 박제가(1778년 이래 네 차례 중국에 갔다) 등에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열두 번이나 중국을 드나든 역관 출신 이상적과 같은 문인에 이르러 가히 그 절정에 이른다고 할 만하다.
이상적은 국내의 중인 출신 문인들과는 거의 친교를 맺지 않은 반면 중국의 문인 및 석학들과 광범한 교유를 맺어 그들에게서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저명한 문인ㆍ학자들과 시를 수창하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이상적은 급기야 자신의 문집을 북경에서 간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은 요새 말로 하면 한국 문학의 세계화라 할 만한 일이니, 긍정적으로 봐야 할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중심’이었으니, 중국에서 인정받고 통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 홍대용의 경우 중국인들과의 교유는 명예나 이익 따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었고, 그 점에서 그것은 인격을 담보한 퍽 순수한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박제가 등에 이르면 사정이 좀 달라지는 듯하다. 즉 박제가의 경우 중국인과의 교유는 단지 순수한 동기에서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중국인과의 교유를 통해서 얻게 되는 명예나 이익에 대한 고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없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박제가는 이른바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아주 강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중국 문인이나 지식인과의 친교는 그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었으리라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의 친교는 박제가의 국내에서의 문화적 위상을 높여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가령 그가 양주 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으로서 당대 중국의 저명한 화가였던 나빙羅聘과 접촉한 사실이나 그의 그림을 소장한 사실은 국내 문사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족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박제가로 하여금 묘한 자의식을 갖게 만들고, 우월감이랄까 으스대는 마음이랄까 이런 기분을 다소간 갖게 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처럼 박제가에게서 중국인과의 교류(편지를 주고받는 일까지 포함해)는 그 자체가 바로 명예였으며, 현실에 작동하는 하나의 문화적 힘이 되고 있었다. 요컨대 저명한 중국인을 안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크든 작든 하나의 ‘문화 권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도 당시와 뭐 그리 크게 사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을까? 가령 내가 미국이나 유럽의 저명한 인물 누구와 안다거나 누구와 개인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다시 보지 않을까?
그런데 홍대용이나 연암은 그렇지 않았는데 왜 박제가에게서 이런 미묘한 변화가 야기되었을까? 이는 신분 문제와 상당히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조선은 서얼을 반쪽 양반으로 취급하면서 사회적ㆍ정치적 자기실현의 길을 막아놓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적 모순 때문에 조선 사회 내에서 서얼들은 자기 비하와 콤플렉스와 불만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이라는 공간에선 서얼이나 중인에 대한 차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인과의 교유(그리고 중국인들로부터의 높은 평가)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콤플렉스를 보상하는 하나의 장치가 될 수 있었다.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이상적의 경우도 역관이라는 그 신분과 관련해 중국에의 경도傾倒가 설명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추사의 경우는 이렇게 설명될 수 없다. 추사는 명문가 출신이니 신분적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추사의 경우, 조선의 지적ㆍ사상적 현실의 변화와 관련해 설명되어야 할 터이다. 즉 추사의 시대에 오면 이제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전의 선배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나로 치부하는 관념은 아주 희박해졌거나 소거消去되어 있었다.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시비 거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청나라는 금석학과 고증학과 문학과 예술의 선진국으로서 조선 사대부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전범典範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존명배청尊明排淸이라는 헛된 명분론으로부터는 벗어났다고 할지 모르나, 조선적 주체성은 그만큼 휘발되거나 약화되어 버렸다는 점, 그리고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긴장된 인식이 소거되어 버렸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8. 외줄타기의 긴장감을 지닌 북학정신
홍대용과 연암이 북학(=중국 배우기)을 제창했다고는 하나 이런 현상(慕華思想)을 희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경계심은 경계심대로 지닌 채, 헛된 명분론을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움으로써 조선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조선의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들의 청나라에 대한 태도는 ‘양가적兩價的’이다.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를 학습하자는 것, 이것이 그들의 기본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어찌 보면 모순 같기도 하나, 바로 이 모순에서 조선적 주체성이 발아發芽할 ‘틈’이 생겨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본다면 홍대용과 연암의 입점立點은 아주 묘하고 아슬아슬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전의(그리고 동시대의) 경직된 의리론과 대립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곧 도래할 청 추수주의追隨主義와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홍대용과 연암의 사유에서는 팽팽한 지적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 지적 긴장감은 조선적 주체성에 대한 암중모색과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홍대용과 연암의 경우 북학의 제창이 곧 청에의 귀복歸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학파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북학파 내부에도 차이가 있다. 가령 박제가의 경우 청에 대한 학습만 있지 청에 대한 경계감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그의 『북학의』는, 비록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는 높이 살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북학론’을 단순화한 혐의가 없지 않다. 이처럼 박제가-추사-이상적으로 넘어가면서 학청學淸만 남고, 청에 대한 대타의식對他意識은 슬그머니 소멸되어 버린다.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다. 하지만, 홍대용이 열어 놓은 중국인과의 교유가 갖는 의미를 논하면서 그 후대적 변전變轉 양상에 대하여도 조금 언급해두는 것이 독자들이 이 시기의 상황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연암의 글을 읽자는 것이 연암의 글만 읽자는 것이 아니요, 연암 당대의 이런저런 문제,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까지도 더러 읽으면서, 곁들여 드문드문 나의 소회所懷까지 말하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 나의 글쓰기 책략이요 목적이니, 어쩌겠는가.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이 단락의 두 번째 문장은 저 앞의 5편의 글과 호응한다. 즉 이 문장은 앞에 기술된 2단락의 논의와 홍대용이 중국에 가서 친구를 사귄 일을 서로 연결 짓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바로 뒤에 길게 이어지는 홍대용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방법적 질문’에 해당한다. 비록 이 문장은 연암이 직접 홍대용에게 묻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질문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 단락은 하나의 물음과 하나의 대답이라는 문답체 구성을 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홍대용이 대답한 말 중 “나는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어 벗을 사귈 수 없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실로 지경地境에 국한되고 습속에 구애되어 답답한 마음이 없지 않았사외다(吾非敢謂域中之無其人而不可與相友也, 誠局於地而拘於俗, 不能無鬱然於心矣)”에서 “지경에 국한되고”는 1편과 호응하는 말이고, “습속에 구애되어”는 2편과 호응하는 말이다. 홍대용은, 지금의 중국이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이고, 그래서 그 인민들이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하고 있는 변발이 원래 한족漢族의 고유한 것이 아니긴 하나, 그럼에도 그 인민들이 밟고 있는 땅은 옛날의 그 중국이고 선비는 옛날의 그 선비이며 학술과 문화 역시 옛날의 중국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비록 어쩔 수 없이 청나라의 백성으로서 살고 있기는 해도 청나라에 신복臣服(=신하가 되어 복종함)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만주족이 중국을 점거했다고는 하나 그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의연히 옛 중국의 그것이라는 논리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바로 북학의 기저논리基底論理라는 점이다.
10.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으로 비난받다
17세기 후반 이래 조선 사대부들은 중국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비린내 나는 땅으로 변했으며 따라서 야만국인 중국에서 배울 점은 없으며 이제 조선이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조선 사대부들은 특히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복식과 두발의 모양이 만주족의 방식으로 바뀐 것을 개탄해 마지않았다. 중화 문명의 빛나는 전통이 그로써 사라졌다고 본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인 조선이 청나라를 쳐서 다시 한족의 나라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자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북벌론北伐論이 그것이다. 하지만 북벌론은 허구였으며, 기실은 효종과 노론 세력, 이 둘은 공통된 이해관계에서 나온 통치용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것은 가증스런 자기기만이었다. 연암이 이 글을 쓴 시기가 되면 북벌론이든 존명배청론이든 예전보다는 약화되고 있었다고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현실에서 의연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홍대용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북학의 논리를 제기한 것이다. 홍대용이 제기한 이 논리는 이후 박지원에게서도 똑같이 되풀이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락을 통해 북학이 조선에서 최초로 그 자태를 드러내는 순간, 혹은 북학이 처음 선언되는 역사적 현장을 목도하게 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북학의 최초의 자태가 우정론의 외피外皮 속에서 개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우정론’은 10대 후반 이래 연암의 지적 전매특허 같은 것이었다.
홍대용의 마지막 말은 예例의 그 우정론이다. 이 말은 다시 2편과 호응관계를 이룬다. 명예나 권세나 이익을 떠나 순수한 동기에 따라 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우정, 구차한 예절이나 법도에도 구속되지 않고 오직 진정眞情에 바탕한 우정, 이것은 10대 이래 연암이 늘 꿈꾸고 실천해왔으며 죽을 때까지 단 한시도 놓은 적이 없던 화두였다. 우도友道에 관한 한 홍대용 역시 연암에 못지않은 일가견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 두 사람은 사별할 때까지 평생 명리名利를 초월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홍대용은 귀국한 후 명분론을 견지하던 국내의 보수적 선비들로부터 적지 않은 비방을 받았던 듯하다. 김종후金鍾厚와 주고받은 논쟁적 편지에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김종후는 정조 때 영의정의 벼슬을 지낸 김종수金鍾秀의 친형인데, 당시 재야의 선비로 명망이 있었다. 김종후는 홍대용에게 몇 차례 편지를 보내, 더러운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 변별한 거자擧子(과거 응시생)들과 형제처럼 사귀며 온갖 말을 다했다고 신랄히 비난하였다. 의리로 볼 때 조선의 선비가 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홍대용은 김종후의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자신은 어떤 부끄러운 일도 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홍대용이 자신이 편찬한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이라는 책 때문에 받은 비난은, 15년 후 연암이 중국을 다녀와 쓴 『열하일기』가 ‘노호지고虜號之藁(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라고 비난받았던 일을 상기시킨다.
11. 홍대용의 필담으로 벗 사귀는 도를 깨닫다
마침내 홍군은 항주의 세 선비와 이야기 나눈 것을 적은 세 권의 초고를 꺼내서 내게 보여주며, “서문을 부탁하외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탄복하여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홍군은 벗 사귀는 법에 통달했구나! 나는 이제야 벗 사귀는 법을 알았다.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고, 누가 그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며, 또한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지 않는지를 보는 것, 이것이 나의 벗 사귀는 방법이다.” 迺出其所與三士譚者, 彙爲三卷以示余曰: “子其序之.” 余旣讀畢, 而歎曰: “達矣哉, 洪君之爲友也! 吾乃今得友之道矣. 觀其所友, 觀其所爲友, 亦觀其所不友, 吾之所以友也.” |
어째서 이 서문을 쓰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홍대용이 보여주는 우도友道에 대해 탄복하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이 새로 깨달은 바를 적어 놓고 있는 마지막 대목이 퍽 인상적이다.
12. 총평
1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학자漢學者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솜씨가 걸출하며” “호방하며 깨끗함이 마치 태사공(사마천)의 글 같다”고 평한바 있다.
2.
이 글은 문예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상사적 견지에서도 중요한 글이다. 북학이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지르며 탄생하는 역사적 현장을 보여주고 있음으로써다.
3
17세기 이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른바 ‘단안單眼’으로 청나라를 봤다면, 이 글에서 확인되는 홍대용의(그리고 박지원의) 청을 보는 눈은 이른바 ‘복안複眼’이라 할 만하다. 놀랍게도 만주족 지배층과 한족 인민, 외관상의 변화와 본질적 연속성, 명분과 현실 등을 구분해 파악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
중국인 벗들과의 친분을 무조건 동아시아적(혹은 국제적) 연대라고만 말할 것은 아니다. 공허한 수사修辭에 앞서 그러한 친분의 내적 구조와 현실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특히 조선적 주체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5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 사대부들이 당파와 신분에 구애되어 진정한 우도友道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암 자신은 어땠는가? 연암의 절친한 벗 가운데에는 노론이 아닌 사람이 꽤 있다. 정철조는 소북小北이었으며, 서얼인 박제가ㆍ유금ㆍ유득공도 소북이었다. 또 소론인 서유린ㆍ서유방 형제와도 가깝게 지냈다. 이 집안의 서유구는 어린 시절 연암의 지도를 받았다. 한편, 연암은 서얼들과 폭넓은 교유를 맺었고 이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연암은 비교적 지체와 당색을 가리지 않고 취향과 뜻이 맞으면 벗으로 사귄 듯하다.
그렇기는 하나 연암이 당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남인과의 교류는 보이지 않는다. 연암은 이익李瀷, 이용휴李用休, 이가환李家煥(1742~1801), 정약용과 같은 빼어난 남인 계열 문인ㆍ학자들의 소식을 당연히 듣고 있었을 터이다. 이들은 모두 연암과 동시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암의 글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 시대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일이니만큼 연암이 보여주는 이런 한계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연암은 자기 시대 사대부 사회의 문제점을 냉철히 지적하면서 스스로 그러한 문제점을 넘어서려고 노력했긴 하나, 시대의 제약 때문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인용
지도 / 목차 / 작가 / 비슷한 것은 가짜다
'책 > 한문(漢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암을 읽는다 - 10. 발승암 기문 (0) | 2020.03.25 |
---|---|
연암을 읽는다 - 9. 홍덕보 묘지명 (0) | 2020.03.25 |
연암을 읽는다 - 7. 한여름 밤에 모여 노닌 일을 적은 글 (0) | 2020.03.25 |
연암을 읽는다 - 6. 소완정이 쓴 「여름밤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 (0) | 2020.03.25 |
연암을 읽는다 - 5.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 (0) | 202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