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글로 드러나는 情과 境
무엇을 일러 정情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이요 산이 푸르른 것이다. 何如是情? 曰: 鳥啼花開, 水綠山靑. |
또한 글에는 정情이 있다. 글의 정이란 무엇인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빛이요 산은 푸른빛이라고 했다. 나는 외롭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쁘다고 쓰지 않고,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로 들려준다. 나는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 가을하늘을 나는 외기러기의 울음에 얹을 뿐이다. 돌아오지 않는 님이 그리워 가슴이 아플제면 나는 그 님과 헤어지던 그 버드나무 아래서 뭣 모르고 우는 꾀꼬리 소리를 듣고 서 있다.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가 또 저렇게 지는 것이다. 강물은 흘러가고 산은 언제나 푸른 자태로 저렇게 서 있는 것이다. 내 마음도 저 청산과 같이 푸를 수만 있다면, 저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나 정체되지 않기를. 내가 말하고 보여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일 뿐인데, 어째서 그것들 위에는 내 정情의 무늬가 아로새겨지는가? 사물은 깨끗이 닦아논 거울이구나.
무엇을 일러 경境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먼데 있는 물에는 물결이 없고, 먼데 있는 산에는 나무가 없으며, 먼데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 1. 그 말하는 것은 가리키는 데 있고, 듣는 것은 손을 맞잡는데 있다 2. 何如是境? 曰: 遠水不波, 遠山不樹, 遠人不目. 其語在指, 其聽在拱. |
글에는 경境도 있다. 먼 물을 그릴 때는 물결을 그리지 말아라. 파도가 없어서가 아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먼 산을 그릴 때는 나무를 그리면 안 된다. 나무가 없어서가 아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을 그릴 때면 눈을 그리지 말아라. 그가 장님이어서가 아니다. 거리가 멀기에 그의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을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화면 속에 한 사람이 어딘가를 가리킬 때 그는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화면 속에 한 사람이 두 손을 맞잡고 있다면 그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만폭동도萬瀑洞圖」와 「우여춘수도雨餘春水圖」를 보라. 여기에는 눈도 코도 없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손을 맞잡고 그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일일이 시시콜콜히 설명하지 않아도 쓰는 이의 의도는 그 행간에 농축되어 전달된다. 글이나 그림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 렌즈가 담아내는 사진과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그래서 다르다. 영화관의 간판과 극사실의 회화가 구분되는 점도 여기에 있다. 둘 다 똑같이 대상을 재현했는데 하나는 간판이 되고 하나는 예술이 된다. 왜 그런가? 그 차이는 경境의 유무로 결정된다. 경이란 무엇인가? 화가의 주관적 정情이 세계의 객관적 물物과 만나는 접점에서 빚어지는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경계이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그리지 않고 그리기. 이것이 글의 경境이다. 한마디 말로 열 마디 웅변을 대신하게 해주는 힘, 이것이 글의 경境이다.
▲ 전문
인용
3. 글로 드러나는 情과 境
- 당唐 왕유王維의 찬撰으로 전해지는 「산수론山水論」에 보이는 구절이다. “무릇 산수山水를 그리는 것은 뜻이 붓보다 우선해야한다. 산山이 열 자라면 나무는 한 자가 되고, 말이 한 치라면 사람은 한 푼의 크기로 그린다. 먼데 사람은 눈이 없고, 먼데 나무는 가지가 없으며, 먼산은 바위가 없이 은은히 눈썹처럼 그려야 하고, 먼 물은 물결이 없이 구름과 높이가 나란해야 한다. 이것이 산수화를 그리는 비결이다. 凡畵山水, 意在筆先. 丈山尺樹, 寸馬分人. 遠人無目, 遠樹無枝, 遠山無石, 隱隱如眉; 遠水無波, 高與雲齊, 此是訣也.” [본문으로]
- 옛 그림의 풍경 속에는 으레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 사람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고, 한 사람은 그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두 손을 맞잡고 있다. 가리키는 사람이 말을 하는 사람이고, 맞잡은 사람은 듣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책 > 한문(漢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文心과 文情 - 5. 세상을 관찰함으로 읽는 책 (0) | 2020.03.25 |
---|---|
文心과 文情 - 4. 통해야만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한다 (0) | 2020.03.25 |
文心과 文情 - 2. 글로 드러나는 소리와 빛깔 (0) | 2020.03.25 |
文心과 文情 - 1. 세상을 보며 글자를 만들었던 포희씨 (0) | 2020.03.25 |
물을 잊은 물고기 - 6. 가련한 공기족들의 미련한 판단능력 (0) | 202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