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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죽오’라는 집의 기문 - 5. 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를 담아 기문을 쓰다 본문

책/한문(漢文)

‘죽오’라는 집의 기문 - 5. 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를 담아 기문을 쓰다

건방진방랑자 2020. 4. 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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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를 담아 기문을 쓰다

 

 

아아, 양직은 정말 대나무에 벽[각주:1]이 있어 그것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로구나! 겉으로만 봐도 그는 마음이 우뚝하고 커서 마치 기암괴석 같은데 그 속에는 아마 조릿대 떨기와 그윽한 왕대가 무성하리라. 이러하니 내가 글을 안 지을 수 있겠는가. 옛사람 가운데 대나무를 숭상하여 차군此君이라 부른 이가 있었거니와, 양직과 같은 이는 백세百世의 뒤에 차군의 충신이 되었다 할 만하다. 이에 나는 대서특필하여 정려旌閭[각주:2]하기를, ‘고고하며 곧고 편안할손, 양처사梁處士[각주:3]의 집이라 하였다.

嗚呼! 養直豈眞癖於竹, 而愛之至哉. 觀於外可見其肝腎肺胃, 磐矹犖确, 如奇巖巉石, 而叢篠幽篁, 森鬱其中也. 余之文至此而惡能已乎. 古之人旣有尊竹而之者, 則如養直者, 百世之下, 可爲此君之忠臣矣. 吾乃大書特書而旌之曰: “高孤貞靖, 梁處士之廬.”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대목에 이르도록 연암은 대나무(=양호맹)를 계속 관찰하면서 자기대로 느끼고, 판단하고,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연암은 대나무(=양호맹)의 본질, 그 내면적 진정성을 스스로 체득體得(몸으로 깨달음)해 나가고 대나무에 대한 실감을 고조시켜 간바, 그 마지막 국면에서 홀연 최고의 미적 흥취를 느끼면서 흉중에서 대나무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도를 닦는 사람이 오랜 수행의 어느 순간에 갑작스런 깨달음, 즉 돈오를 맛보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연암은 10년 동안 대나무를 관찰했고 그 과정에서 대나무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이른바 흉중일기胸中逸氣(가슴 속의 빼어난 기운)’가 형성되어 한 폭의 그림을 고도의 사의寫意로 그려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하므로 이 대나무 그림은 여느 대나무 그림과는 달리 상투적이거나 진부하지 않고, 참신하고 독창적이며 생기발랄하다. 다시 말해 연암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상투성의 때를 벗고, 언어의 쇄신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 바로 죽오라는 집의 기문이다.

 

눈썹은 찡그려 자 같고 손가락은 메마른 마디 같아, 굳세고 뾰족한 게 홀연 대나무 모양이 되었다라는 문장은 더 깊이 음미될 필요가 있다. “란 대잎을 말한다. 대나무 잎을 그리는 법에 개자엽个字葉이라 하여 자 모양으로 그리는 법이 있다. “메마른 마디란 대나무의 마디를 말한다. 대나무 그림에서 마디를 생동감 있게 그리기란 쉽지 않은데, 연암은 양호맹의 늙은 손가락 마디에서 수일秀逸한 대나무 마디를 떠올린 것이다.

 

네 번째 단락의 이런 고조된 미적 흥취에 이어 아아, 양직은 정말 대나무에 벽이 있어 그것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로구나!(嗚呼! 養直豈眞癖於竹, 而愛之至哉)”라는 부분이 시작된다. 이 문장은, 고조 상태의 흥취를 아아라는 감탄사로 연결시키고 있긴 하지만, 돈오처럼 찾아온 잠시의 물아일체에서 빠져나와 다시 심미적 거리를 두고 대상을 판단하는 자리로 연암이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앞부분이 대상과의 직관적 조우遭遇를 통한 심미적 체험을 보여준다면, 이 부분은 그것을 다시 이성적으로 음미하고 판단하는 자리다. 그리하여 대나무에 대한 글이 수두룩한데 내가 뭣 땜에 그런 글을 또 한 편 보탠단 말인가(以形容竹之聲色, 作爲詩文者多矣, 更何能文爲)’라는 서술을 스스로 뒤집으면서 이러하니 내가 글을 안 지을 수 있겠는가(余之文至此而惡能已乎)”라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 글은 대나무에 대한 글을 안 쓰겠노라던 연암 자신의 그토록 단호한 생각이 왜, 그리고 어떤 과정으로, 뒤집혀지는지를 유쾌한 필치로 보여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차군이라는 말이 나온 바 있거니와 이 단락에서는 그 말에 호응하되, ‘차군친구라는 뜻도 가지지만 임금이라는 뜻 또한 가짐을 이용해 이 말에 전혀 새로운 뉘앙스를 부여하면서 양호맹을 차군의 충성스런 신하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지극한 을 정려하는 말을 글의 맨 마지막에 붙이고 있다. 이 부분의 필치에도 유머와 해학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의 여로旅路에서 독자는 이미 눈치 챘을 줄 알지만, 이 해학은 결코 양호맹에 대한 조롱이나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이 부분은, 그리고 이 글 전체는, 연암 특유의 해학적 필치에 의한, 양호맹이라는 일견 단순하지만 순실하고 변함없는 한 인간에 대한 헌사獻辭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우리 한시를 읽다를 끝내다

건빵의 죽오기, 건빵재를 열다

1. 대나무에 관한 글을 써주지 않으려는 이유

2. 상투적인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

3. 양호맹의 진실한 대나무 사랑

4. 대나무를 닮아 간 사내

5. 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를 담아 기문을 쓰다

6. 총평

 

  1. 벽癖: ‘방랑벽’이니 ‘등산벽’이니 할 때의 ‘벽’인데, 무엇을 지나치게 즐기는 버릇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정려旌閭: 충신ㆍ효자ㆍ열녀 등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3. 처사處士: 벼슬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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