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헌사를 담아 기문을 쓰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대목에 이르도록 연암은 대나무(=양호맹)를 계속 관찰하면서 자기대로 느끼고, 판단하고,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연암은 대나무(=양호맹)의 본질, 그 내면적 진정성을 스스로 체득體得(몸으로 깨달음)해 나가고 대나무에 대한 실감을 고조시켜 간바, 그 마지막 국면에서 홀연 최고의 미적 흥취를 느끼면서 흉중에서 대나무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도를 닦는 사람이 오랜 수행의 어느 순간에 갑작스런 깨달음, 즉 돈오를 맛보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연암은 10년 동안 대나무를 관찰했고 그 과정에서 대나무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이른바 ‘흉중일기胸中逸氣(가슴 속의 빼어난 기운)’가 형성되어 한 폭의 그림을 고도의 사의寫意로 그려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하므로 이 대나무 그림은 여느 대나무 그림과는 달리 상투적이거나 진부하지 않고, 참신하고 독창적이며 생기발랄하다. 다시 말해 연암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상투성의 때를 벗고, 언어의 쇄신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 바로 「죽오라는 집의 기문」이다.
“눈썹은 찡그려 ‘个개’자 같고 손가락은 메마른 마디 같아, 굳세고 뾰족한 게 홀연 대나무 모양이 되었다”라는 문장은 더 깊이 음미될 필요가 있다. “个”란 대잎을 말한다. 대나무 잎을 그리는 법에 ‘개자엽个字葉’이라 하여 ‘个’자 모양으로 그리는 법이 있다. “메마른 마디”란 대나무의 마디를 말한다. 대나무 그림에서 마디를 생동감 있게 그리기란 쉽지 않은데, 연암은 양호맹의 늙은 손가락 마디에서 수일秀逸한 대나무 마디를 떠올린 것이다.
네 번째 단락의 이런 고조된 미적 흥취에 이어 “아아, 양직은 정말 대나무에 벽이 있어 그것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로구나!(嗚呼! 養直豈眞癖於竹, 而愛之至哉)”라는 부분이 시작된다. 이 문장은, 고조 상태의 흥취를 “아아”라는 감탄사로 연결시키고 있긴 하지만, 돈오처럼 찾아온 잠시의 물아일체에서 빠져나와 다시 심미적 거리를 두고 대상을 판단하는 자리로 연암이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앞부분이 대상과의 직관적 조우遭遇를 통한 심미적 체험을 보여준다면, 이 부분은 그것을 다시 이성적으로 음미하고 판단하는 자리다. 그리하여 ‘대나무에 대한 글이 수두룩한데 내가 뭣 땜에 그런 글을 또 한 편 보탠단 말인가(以形容竹之聲色, 作爲詩文者多矣, 更何能文爲)’라는 서술을 스스로 뒤집으면서 “이러하니 내가 글을 안 지을 수 있겠는가(余之文至此而惡能已乎)”라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 글은 대나무에 대한 글을 안 쓰겠노라던 연암 자신의 그토록 단호한 생각이 왜, 그리고 어떤 과정으로, 뒤집혀지는지를 유쾌한 필치로 보여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차군”이라는 말이 나온 바 있거니와 이 단락에서는 그 말에 호응하되, ‘차군’의 ‘군君’이 ‘친구’라는 뜻도 가지지만 ‘임금’이라는 뜻 또한 가짐을 이용해 이 말에 전혀 새로운 뉘앙스를 부여하면서 양호맹을 차군의 충성스런 신하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지극한 ‘충’을 정려하는 말을 글의 맨 마지막에 붙이고 있다. 이 부분의 필치에도 유머와 해학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의 여로旅路에서 독자는 이미 눈치 챘을 줄 알지만, 이 해학은 결코 양호맹에 대한 조롱이나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이 부분은, 그리고 이 글 전체는, 연암 특유의 해학적 필치에 의한, 양호맹이라는 일견 단순하지만 순실하고 변함없는 한 인간에 대한 헌사獻辭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 전문
인용
4. 대나무를 닮아 간 사내
6.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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