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맹목적인 독서로 헛 똑똑이가 되다
이 편지글은 그 서두가 퍽 도발적이다. 다짜고짜 “정밀하고 부지런히 글을 읽은 이로 포희씨包犧氏만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讀書精勤, 孰與庖犧?)”라고 묻는 말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포희씨만큼 글을 잘 읽은 사람은 없다는 건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연암의 생각을 따라가면 이렇다. 포희씨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세밀히 관찰하여 그 근본 원리를 8괘라는 기호에 집약해냈다. 포희씨가 삼라만상을 관찰한 행위는 바로 글(혹은 책)을 읽은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면 글의 에센스, 즉 글의 정수精髓(이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글의 ‘정신’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는 바로 사물과 세상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을 잘 관찰하여 그 정수를 포착해 8괘를 만들어낸 포희씨는 정말 글을 잘 읽은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사물이라는 글을 잘 읽어 8괘라는 지극히 오묘하고 창조적인 글을 지어낸 셈이다.
그런데 후세의 사람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포희씨와는 달리 남이 써 놓은 글 속에 갇혀 그 글귀나 외고 있을 뿐이다. 남의 글을 열심히 읽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렇기는 하나 글 밖에 있는 진실, 글과 사물, 글과 세상의 연관성을 따져보는 상상력과 감수성이 작동되지 않는 한 그런 글 읽기는 맹목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연암은 바로 이런 글 읽기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런 글 읽기는 피상적인 인간, 뭐든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무식한 인간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연암은 이런 인간을 고작 술지게미를 먹고서 술에 취해 죽겠다고 야단인 그런 인간(哺糟醨而醉欲死)에 비유하고 있다. 술지게미란 막걸리 같은 곡주를 만들 때 술을 짠 뒤에 남은 찌꺼기를 말한다. 약간의 알코올 기운이 들어 있긴 하나 술과는 다르다. 술이 정수精髓라면 지게미는 찌꺼기에 불과하다. 이걸 먹고 술맛을 안다고 한다면, 웃기는 일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책의 정수를 음미하지 못한 채 그 찌꺼기만 맛보고서 그 책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다. 이런 인간은 대개 나부댄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나부대는 인간이 지배한다. 책의 정수, 사물의 정수를 알고 있는 인간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인간은 대개 숨어 있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간혹 눈에 띈다 하더라도 말수가 적거나 아예 말이 없다. 슬픈 일이다.
▲ 전문
인용
3. 새를 글자 속에 가두다
5.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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