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응
응(應)
지금의 하남성 노산현(魯山縣) 동쪽의 고을로 춘추 때 초, 전국 때 한에 속했다가, 후에 진나라에 할양했다.
응거(應璩)
위 문제(魏文帝) 때의 문장가. 자는 휴련(休璉). 그의 형 응창(應瑒)과 함께 문명이 뛰어났고 특히 풍자에 능했으며,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삼국지(三國志)』 「응창전(應瑒傳)」
응념원유난(應念遠遊難)
어버이 생각을 하리라는 말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부모가 계실 때에는 멀리 나가서 노닐지 말 것이요, 나가서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처소가 있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응대여류(應對如流)
흐르듯 응대한다는 의미로 언변이 능수능란하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남조(南朝) 때 사람 서면(徐勉)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했으나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이미 제문(祭文)을 지었으며, 18세에 국자생(國子生)이 되었다. 제주(祭酒)는 서면을 두고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면서 재상의 기품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과연 양(梁)나라의 무제(武帝)가 즉위한 후 서면은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올랐다. 당시의 양나라는 북위(北魏)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서면이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한두 번 밖에 없었다. 식구들이 서면의 건강을 염려하여 자주 귀가하여 쉴 것을 권하자 서면은 “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잊었으므로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이 일도 전해질 것이다[吾憂國忘家, 乃至於此. 若吾亡後, 亦是傳中一事.]”라고 말하였다. 서면은 관직에 있으면서 한 번도 자기의 직권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늘 부하들의 수고를 위로하고 공로를 모두 부하들에게 돌렸다. 서면은 선관(選官)의 직책을 열심히 수행하고 인륜 관계를 처리하는 데 조리가 있었으며, 틈나는 대로 문서를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사령(응대하는 말)에도 능했다. 집무하는 책상이 공문으로 넘치고 방에 손님이 가득해도 물 흐르듯이 응대했으며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勉居選官, 彜倫有序. 旣閑尺牘, 兼善辭令, 雖文案塡集, 坐客充滿, 應對如流, 手不停筆.] 『남사(南史)』 「서면전(徐勉傳)」
응룡(應龍)
날개가 있으나 뿔이 없다는 용. 응룡이 우임금을 위해 땅에 금을 그으며 바다로 들어가니, 우임금이 수맥을 다스렸다 한다.
응류(應劉)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의 왕찬(王粲)·공융(孔融) 등과 함께 건안 칠자(建安七子)로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던 응탕(應瑒)·유정(劉楨)을 합칭한 말이다.
응묘개진등암낭(應昴豈盡登巖廊)
재상(宰相)이 될 자질을 타고난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승상 소하(蕭何)가 묘성(昴星)의 기운을 받고서 태어났다고 한다. 『초학기(初學記)』 卷1 注
응문(膺門)
용문(龍門)과 같은 말이다. 이응(李膺)은 동한(東漢) 양성(襄城) 사람이요, 자는 원례(元禮)인데, 풍재(風裁)가 준정(峻整)하여 “천하의 모해(模楷) 이원례’라는 말이 있었고, 선비가 용접(容接)을 입은 자를 “용문(龍門)에 올랐다.’고 하였다.
응문(應門)
지금의 산서성 북부지방의 대동 일대를 말한다.
응방(應榜)
과시(科試)에 급제한 자의 명단을 발표한 뒤에 임금이 급제자에게 사개(賜蓋)·사화(賜花)하고 정희(呈戱)하는 등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이른다.
응벽지(凝碧池)
『명황잡록(明皇雜錄)』에 “안녹산이 대궐을 범하자 왕유(王維) 등 몇 사람이 적당에 의해 승사(僧寺)에 구류되었다. 하루는 적당들이 응벽지에서 회음(會飮)하는데 이원제자(梨園弟子) 수백 명을 시켜 풍악을 울리게 했다. 왕유가 듣고 ‘마음 상할사 만호에 야연만 끼었으니, 백관이 언제나 다시 임금을 뵙게 될꼬. 깊은 궁 안에 느티나무 잎 지는데, 응벽지 위에선 풍악 소리 나누나[萬戶傷心生野煙 百官何日再朝天 秋槐落葉深宮裏裡 凝碧池頭奏管絃].’라고 하는 시를 지어 벽(壁)에 써 놓았다. 적당이 평정된 뒤에 왕유는 이 시로 말미암아 견책을 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응빙초화(凝氷焦火)
권세가 있을 때는 아첨하여 붙따르고, 권세가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속의 인정, 즉 염량세태(炎涼世熊)를 의미한다.
응상(凝霜)
얼어붙은 서리. 서리덩이.
응서(應徐)
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구성원들인 응양(應瑒)과 서간(徐幹)을 가리키는데, 뛰어난 문장으로 조조(曹操) 부자(父子)의 예우를 받았다. 곧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학사를 말한다.
응숙(應宿)
낭관(郞官)의 별칭이다.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중앙 조정의 관원을 가리킨다.
응양(鷹揚)
강태공(姜太公)이 주 무왕(周武王)을 도와서 은(殷) 나라의 목야(牧野)를 칠 때 80 노인으로서 매처럼 기운차게 날뛰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주 무왕(周武王)을 도와 은(殷) 나라를 멸망시킨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공을 찬미하면서 “태사인 태공망이 마치 매가 날 듯, 무왕을 도우시어 은 나라를 정벌하니, 회전(會戰)하는 그 아침은 맑고 밝았네.[維師尙父 時維鷹揚 涼彼武王 肆伐大商 會朝淸明]”라는 말이 나온다.
응양위상옹(鷹揚渭上翁)
위수(渭水)에 낚시를 드리우고 문왕(文王)을 기다렸다가 뒤에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을 정복하고 주(周)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강태공(姜太公)을 이른다.
응유(應劉)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왕찬(王粲)·공융(孔融)·진림(陳琳)·완우(阮瑀)·서간(徐幹)과 함께 건안칠자(建安七子)였던 응창(應瑒)과 유정(劉楨)을 말하는데, 위 문제(魏文帝)가 태자(太子)로 있을 적에 이들을 총애하여 항상 동궁에 불러 놓고 주연(酒宴)을 베풀고 즐겼다 한다.
응전(鷹鸇)
응(鷹)과 전鸇)은 모두 매의 종류로 군주에게 무례하거나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를 보면 매가 새들을 쫓듯이 몰아냄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에 구람(仇覽)은 자를 계지(季智), 일명 향(香)이라고 하였는데, 포정(蒲亭)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홀어머니에게 불효하는 진원(陳元)이라는 자를 형벌로 다스리지 않고 말로 타일러 교화시켰다. 이에 사람들이 “응전의 뜻이 적은 것이 아니냐?”고 묻자 “나는 매가 봉황만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후한서(後漢書)』 卷七十六 循吏 仇覽傳
응점덕성취(應占德星聚)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어진 덕을 지닌 현인(賢人)이라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명사(名士) 진식(陳寔)이 자제들을 이끌고 순숙(荀淑) 부자(父子)를 찾아갔을 때 하늘에 덕성이 모이는 천문 현상이 일어났다는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
응접불가(應接不暇)
여유가 없을 만큼 매우 바쁜 상황이라는 뜻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편(言語篇)」에 “왕자경이 ‘산음의 길을 좇아 오르다 보면, 산천은 서로 비추어 반짝이는 것이 갈수록 아름다워 사람에게는 응대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만약 가을이나 겨울이면 더욱 마음에 품기가 어렵다’고 하였다[王子敬云 山川自相映發 使人應接不暇 若秋冬之際 尤難爲懷].”라고 하였다. 진(晉)나라 때 왕희지(王羲之)와 함께 이왕(二王) 가운데 한사람인 왕헌지(王獻之)는 자가 자경이다. 그는 서예가이자 문필가로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올랐다. 어느 날 그가 회계산(會稽山) 북쪽의 산음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 위의 글이다.
응진(應眞)
범어(梵語)인 나한(羅漢)을 의역(意譯)한 말로, 진도(眞道)를 터득한 사람을 뜻하는데,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응진이 석장(錫杖)을 날려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는 표현이 있다.
응창(應瑒)
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로 뛰어난 문장으로 조조(曹操) 부자(父子)의 예우를 받았다.
응천(凝川)
밀양(密陽)의 고호이다.
응체어물(凝滯於物)
속세의 일에 얽매어 막히다.
응풍(鷹風)
입추(立秋)가 되면 응준(鷹隼)이 맹위를 떨친다는 말에서 비롯하여 가을바람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한서(漢書)』 「오행지(五行志)」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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