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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248. 이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48. 이

건방진방랑자 2020. 4. 30.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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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이각(二覺)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한다. 본각은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바, 여래(如來)와 똑같은 청정한 지혜를 말하고, 시각은 일단 미혹(迷惑)된 중생의 본각이 다시 본성으로 환원된 지혜를 말한다. / 인용: 寂菴記(이색)

 

이개(李鍇)

자는 철군(鐵君)으로 봉천(奉天) 사람이다. 그는 처부(妻父)가 되는 색액도(索額圖)가 태부(太傅)로서 권세가 너무 높으므로 멀리 반산(盤山)으로 피하여 치봉산(豸峯山) 아래 밭을 사서 갈면서 편안히 지냈다. 저서로 함중집(含中集남사고(南史稿)가 있다.

 

이거(離居)

멀리 있는 자. 은둔자.

 

이거(貳車)

뒤따르는 수레로 즉 보좌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기(禮記)』 「소의(少儀)이거를 타면 구부리고 좌거(佐車)를 타면 구부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거와 좌거는 다 부거(副車)이다.”라고 하였다.

 

이격(李格)

무신으로 자는 천로(天老),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748년에 태어났다.

 

이견(利見)

주역(周易)건괘(乾卦)에서 이견(利見)은 임금과 신하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경(離經)

이경반도(離經畔道)의 약칭으로 정도(正道)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경(李景)

916~961, 오대시대(五代時代) 남당(南唐)의 두 번째 군주이다. 남당(南唐)10국 가운데 하나인 오()나라를 이변(李昪)이 찬탈하여 세운 국가로 수도는 금릉(金陵=南京)이었다. 이경(李景)945년 혼란에 빠진 민()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나 오월(吳越)의 충현왕(忠顯王) 인좌(仁佐)에게 패하여 복주(福州)를 내주었다. 복주(福州)는 옛 민월왕국(閩越王國)의 땅에 설치된 주()의 이름으로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복주시(福州市)이다. / 인용: 表忠觀碑(소식)

 

이경(二頃)

이백 묘(二百畝)의 토지로서 옛날 중농(中農)에 해당한다고 한다.

9시에서 11시 사이를 가리킨다.

 

이경양전(二頃良田)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세가(遊說家) 소진(蘇秦)가령 내가 낙양성 교외의 비옥한 토지를 두 이랑 정도만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을 한 몸에 찰 수가 있었겠는가[且使我有洛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라고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

 

이경여(李敬輿)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24세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흥원강 가에서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왕의 미움을 사 삼수에 귀양간 일이 있다.

 

이경전(李慶全)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608년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옹립 하는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 강계(江界)로 유배 갔다. 광해군 즉위 후 충청도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623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했다.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637(인조 15) 삼전도(三田渡)의 비문(碑文)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하고 거절했다. 1640년 형조판서를 지냈다. 시문으로 어려서부터 명성이 높았다. 문집에 석루유고(石樓遺稿)가 있다.

 

이경전(二頃田)

한평생 먹고 살 만한 기름진 토지를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6국의 재상이 되었던 소진(蘇秦)가령 내가 낙양성과 가까운 곳에 좋은 땅 두 마지기만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여섯 나라 정승의 인을 꿰어 찰 수 있었겠는가[且使我有洛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

 

이경함(李景涵)

경함(景涵)은 이발(李潑)의 자()이다.

 

이계(二戒)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말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천하에 큰 계명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명()이고 하나는 의()이다.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이 명()이니, 마음속에서 잠시라도 놓을 수 없는 것이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의()이니, 어디를 간들 임금이 없는 곳은 없다[天下有大戒二 其一命也, 其一義也. 子之愛親, 命也, 不可解於心 ; 臣之事君, 義也, 無適而非君也].”라는 말이 나온다.

 

이계수(李季受)

이계수는 이석인(李錫仁)으로, 계수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경주, 덕형(德馨)5대손이며, 현종 9(1668)에 태어나 영조 5(1729)에 죽었다.

 

이계장(李桂長)

고려(高麗)의 문신(文臣)으로 청주인(淸州人)이다. 희종(熙宗) 7년에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과거(科擧)를 관장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이고개분(狸膏芥粉)

삵괭이 기름과 겨자가루.

 

이곡화양춘(俚曲和陽春)

자신의 변변치 못한 시문으로 상대방의 훌륭한 시문에 화답함을 겸칭하는 말. 이곡은 저속한 이속(俚俗)의 가곡(歌曲)으로 자신의 시문을 비유한 말이며, 양춘은 유명한 곡명으로 상대방의 시문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황경전(黃瓊傳)양춘곡(陽春曲)에는 화답하는 자가 반드시 드물다.”는 말이 있다.

 

이공(貳公)

찬성(贊成)의 별칭이다.

 

이공린(李公麟)

() 나라 때 문인화가(文人畫家). 호는 용면(龍眠)이다.

 

이공봉(李供奉)

당 현종(唐玄宗) 때 한림공봉(翰林供奉)을 지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이곽(李郭)

() 나라의 명장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한 중흥 제일의 공신들로, 천하의 안위(安危)가 한 몸에 달려 있던 위걸(偉傑)들이다.

 

이곽선(李郭仙)

후한 때의 고사인 이응(李膺곽태(郭太)가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함께 경사(京師)로부터 향리로 돌아갈 적에 단 둘이만 배를 타고 떠나자, 배웅나온 선비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고 신선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68 곽태전(郭泰傳)

 

이곽주(李郭舟)

한 나라 때 명사(名士) 이응(李膺)과 곽태(郭泰)가 빈천(貧賤)을 잊고 낙양(洛陽)에서 서로 친하게 지내었는데, 곽태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수(河水)를 건널 적에 전송하러 나온 자가 아주 많았으나 곽태는 오직 이응하고만 한 배를 타고 건넜다. 두 사람이 한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을 보고는 전송나온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면서 두 신선이 한 배를 타고 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68 곽태전(郭泰傳)

 

이관규천(以管窺天)

대롱을 통해 하늘을 봄. 좁은 소견으로 사물을 살펴 보았자 그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우물안 개구리. / 유의어: 용관규천(用管窺天). 좌정관천(坐井觀天).

 

이관조몽시(移官早夢尸)

() 나라 때 이극(李克), 하늘에서 관() 2개가 자기 앞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는 그 사실을 색담(索紞)에게 묻자, 색담이 ()이란 곧 직()이니 틀림없이 누가 그대를 추천해서 벼슬이 승진하게 되겠소.”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한다.

 

이광(李廣)

() 나라 때의 대장군. 이광은 특히 활을 잘 쏘고 용맹이 절륜하여 흉노(匈奴)를 누차 대패시켰으므로, 그가 북평태수(北平太守)로 있을 적에 흉노들이 그를 일러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면서 두려워하였다. 흉노와 대소 70여 차례를 싸워 공을 세웠지만 봉후(封侯)가 되지 못했다. 뒤에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과 흉노를 치다가 길을 잃어 문책당하자 자살하였다. 한서(漢書)卷五十四>

 

이광금비한(李廣今飛漢)

이광(李廣)은 한() 나라 성기(成紀) 사람으로 흉노(匈奴)를 공격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북평 태수(北平太守)가 되니, 흉노들이 두려워하여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전한서(前漢書)卷五十四 이광전(李廣傳)

 

이광미봉(李廣未封)

큰 군공(軍功)을 세웠는데도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의 명장 이광(李廣)이 흉노를 격파한 전공(戰功)이 혁혁하였는데도, 끝내 제후에 봉해지지 못했던 이광미봉(李廣未封)’의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이광사(李匡師)

자는 도보(道甫). 이른바 원교체(圓嶠體)를 남긴 서예가이다.

 

이광지(李光地)

자는 진경(晉卿), 호는 후암(厚菴). () 나라 초기의 유명한 성리학자로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냈으며, 주역통편(周易通編)·홍범설(洪範說)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괘(頤卦)

()는 양()의 뜻이므로 음식을 기대할 수 있는 괘이다. 역경(易經)』 「이괘(頤卦)

 

이교(二喬)

대교(大喬)와 소교(小喬), 대교는 손책(孫策)의 아내이고 소교는 주유(周瑜)의 아내이다.

 

이교서(圯橋書)

() 나라 장량(張良)이 이교(圯橋) 위에서 황석공(黃石公)에게서 받은 책으로, 바로 태공망(太公望)의 병서(兵書)를 가리킨다.

 

이구(驪駒)

이별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 / 유의어: 이가(驪歌).

 

이구(李覯)

() 나라 남성(南城) 사람. 자는 태백(泰伯). 언변과 문장에 능하며 학자들은 우강 선생(盱江先生)이라 칭했다. 저서에는, 평례론(平禮論)·퇴거유고(退居類稿)·황우속고(皇祐續稿)등이 있다.

 

이구(履龜)

서서(徐瑞)가 어렸을 때 수재(水災)를 만나서 어느 각()으로 피해 있었는데, 그 각마저 곧 물에 잠기게 되었다. 순간 공중에서 누가 그는 재상(宰相)감이다. 잘 보호해야 한다.”고 외치자 수백 마리의 거북이가 나타나 그 각을 등으로 받쳐 물에 잠기지 않게 했다는 고사이다. 문원휘전(文苑彙雋)

 

이구곡(驪駒曲)

일시(逸詩)의 하나로, 고별(告別)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구동성(異口同聲)

서로 다른 입들에서 같은 소리를 냄. 여러 사람의 하는 말이 한결같음.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함을 이른다.

 

이구생(履龜生)

남방(南方) 노인(老人)이 거북을 상()발에 괴었는데, 2천여 년을 지낸 뒤에 노인이 죽자 상을 옮겼는데 거북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한다.

 

이구이(履九二)

주역(周易)』 「이괘(履卦)구이효(九二爻)훤히 트인 큰길을 가는, 영육을 초월한 그 사람 앞길에 막힘이 없으리[履道坦坦 幽人貞吉].”라고 하였다.

 

이구일곡(驪駒一曲)

송별(送別)할 적에 부르는 노래이다. 이구(驪駒, 검은 말)는 일시(逸詩)의 편명인데, 한서(漢書)』 「왕식전(王式傳)이구를 노래하다.”의 주에 이구는 일시의 편명인데, 손님이 떠나려 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 그 가사에는 이구가 길에 있으니, 마부가 멍에를 정돈하네[驪駒在路 僕夫整鴐].’라고 했다.”고 하였다.

 

이국(籬菊)

() 나라 도잠(陶潛)음주(飮酒)라는 시에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쪽 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명구(名句)에서 나온 말이다. 도연명집(陶淵明集)3 음주(飮酒)

 

이군삭거(離群索居)

붕우의 곁을 떠나 홀로 외롭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이군중(李君重)

군중(君重)은 이성임(李聖任)의 자()이다. 이성임이 이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 나라에 갔다.

 

이군진자하(離群眞子夏)

친구와 헤어져 있으니 참으로 봉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아들을 잃고 몹시 슬퍼하여 눈이 멀었다. 동문인 증자(曾子)가 찾아가 조문하자, 자하는 울면서 하늘은 무심도하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라고 하였다. 증자는 성을 내면서 그의 잘못을 하나하나 말하자, 자하는 상장(喪杖)을 던지고는 절하면서 내가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이는 내가 오랫동안 친구들과 헤어져 외로이 있었기 때문이오.”라고 사과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이궁(離宮)

이궁은 임금이 출유(出遊)할 때 거하는 별궁(別宮)으로, () 나라 반고(班固)의 서도부(西都賦)離宮別館 三十六所라는 말이 나온다.

정전(正殿) 외에 임금이 거주하는 궁실이다.

 

이궁각도(離宮閣道)

진시황(秦始皇)의 전전(前殿)인 아방궁(阿房宮)은 그 규모가 동서로 5백 보()가 되고, 남북은 50()이나 되어 그 위에 사람 1만 명이 앉을 수가 있었고, 두루 복도를 놓아 궁전 아래서 곧바로 남산(南山)에 다다를 수 있게 꾸몄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이궁환우(移宮換羽)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주유(周瑜)는 풍채 좋은 미남자요, 음률을 잘 알아서 길을 가다가도 음률이 그릇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한번 돌아보니, 미인들이 그의 돌아보기를 원하여 일부러 곡조를 그릇 탔다 한다.

 

이궐(伊闕)

이궐새(伊闕塞)를 말한다.지금의 하남성 낙양의 남쪽에 있으며 두 산봉우리가 이수(易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어 마치 궁궐과 같이 보인다고 해서 이궐이라 했다. 기원전 293년 진나라의 백기(白起)가 한위(韓魏) 두 나라의 연합군을 이 곳에서 격파하고 그 군사 24만을 참수했다. 후에 용문(龍門)이라고 했으며 유명한 용문석굴(龍門石窟)이 있는 곳이다.

 

이궤(二簋)

()와 직()을 담는 두 제기(祭器)를 말하는데, 전하여 성경(誠敬)의 마음이 극진하면 이궤의 박한 제수일지라도 신()에게 제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주역(周易)』 「손괘(損卦)이궤로도 신에게 드릴 수 있다[二簋可用享].”라고 하였다.

 

이귀(泥龜)

은자(隱者)를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에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하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사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음.

 

이귀암(李龜巖)

귀암은 이정(李楨)이다. 이정은 성리학에 밝아서 이황(李滉)과 교유하였으며, 사천(泗川)에 정사(精舍)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이규보(李奎報)

고려 숙종 때 사람. 자는 춘경(春卿). 호는 지헌(止軒) 또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본관은 여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다. 기개가 있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중룡(人中龍)의 경가를 들었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으로 당대를 풍미했고 2천 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저서에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順).

 

이극(李克)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문후(文侯)의 신하이다.

 

이금(泥金)

금분(金粉)으로 꾸민 서전(書箋)인데, () 나라 때에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은 가서(家書)에다 이것을 첨부하여 등과(登科)의 희소식을 전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금보(泥金報)

금분(金粉)으로 장식한 서신을 말하는데, () 나라 때 새로 급제한 사람은 가서(家書)에다 이금첩(泥金帖)을 첨부해서 등과(登科)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금오(李金吾)

() 나라 명장 이정(李靖)을 말하는데, 이정은 병법(兵法)에 뛰어나 고조(高祖) 태종(太宗) 2대에 걸쳐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서 누차 출정하여 위대한 공훈을 세웠다. 구당서(舊唐書)卷六十六

 

이기(離奇)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엉킨 모양이다.

 

이기(梨祈)

이기(梨其)’와 같은 말로, 약초를 칭한다.

 

이기(李錡)

() 나라 사람. 관직을 역임하면서 많은 보화를 축적하여 권세가에게 뇌물을 주고 출세하였으며 드디어는 황제의 총애까지 받았으나 뒤에 모반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이기(李寄)

동월(東越) () 지방 산간지대에서 거대한 이무기가 늘 해를 입혔다. 관리는 무당의 말만 믿고 소녀를 강제로 이무기에게 먹이로 바쳤는데, 여러 해 동안 죄 없는 소녀 아홉 명이 벌써 이무기의 먹이가 되었다. 소녀 이기가 예리한 칼과 먹을 것, 사냥개 등을 준비해 용감하게 나아가 이 거대한 이무기를 단번에 죽여 그 지방의 큰 화근을 제거한다.

 

이기(二紀)

한 기()12년이다.

 

이기발형신(利器發硎新)

달인(達人)의 경지에서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했다는 말이다. 옛날 유명한 백정이 오랜 세월 소를 잡았는데도 그 칼을 보면 무디어지지 않고 항상 숫돌에서 금방 꺼낸 것과 같았다(刀刃若新發於硎)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이기오행(二氣五行)

이기(二氣)는 음양(陰陽), 오행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이다.

 

이기체(移氣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수양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진심(盡心)거처가 사람의 기를 옮겨 놓으며 수양이 체질을 옮겨 놓는다[居移氣 養移體].”고 한 말이 있다.

 

이난(二難)

난형난제(難兄難弟), 즉 형제가 모두 훌륭한 것을 가리킨다.

두 가지 갖추기 어려운 것으로, 즉 현주(賢主)와 가빈(嘉賓)을 말한다.

 

이난별학(離鸞別鶴)

난새와 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것인데 그것들이 다 곁을 떠나 신선 생활을 할 수가 없으므로 원망스럽다는 것이다.

 

이남(二南)

시경(詩經)국풍(國風)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키는데, ()문왕(文王)과 소공(召公)의 교화로 백성이 잘 다스려져 읊어진 시들로 왕화(王化)의 기초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풍(詩風)이라 하여 일컫는 말이다. / 인용: 昭代風謠序(오광운)

 

이남관기편(二南冠基篇)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시경(詩經)의 편명(篇名)으로 맨 앞에 있는데, 여기에는 훌륭한 후비(后妃)의 덕을 칭송(稱頌)한 것이 많다. 훌륭한 후비를 얻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주() 나라의 왕업(王業)이 이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이노백고지(狸奴白牯知)

이노(狸奴)는 불가의 육십심(六十心)의 하나인 이심(貍心)으로 이노가 금조(禽鳥)를 잡아먹기 위하여 숨을 죽이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능(李陵)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와 싸우다 선우(單于)에게 항복한 장군 이름이다.

 

이능송백벽연면(二陵松柏碧連綿)

두 능은 봉은사 곁에 있는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병에 의해 파헤쳐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봉분을 쌓은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다. 선조 말기에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윤안성(尹安性)이 풍자하는 시를 짓기를 회답사란 이름 띠고 어디로 향해 가나 오늘날에 화친이라 내 그 뜻 모를레라 한강가에 이르러 저쪽 한번 바라보소 두 능의 송백 아직도 가지 아니 자랐는 걸[使名回答向何之 此日交隣我未知 試到漢江江上望 二陵松柏不生枝].”이라 하였다. 기아(箕雅)卷四

 

이니(旎旎)

왕성한 모양이다.

 

이니(泥泥)

풀잎이 부드럽고 윤기가 있는 모양, 이슬에 흠뻑 젖은 모양이다.

 

이니(伊尼)

불서(佛書)에 나오는 사슴의 이명(異名)이다. 사물이명록(事物異名錄)獸畜 鹿

 

이당(李唐)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수() 나라를 이어받아 천하를 차지하였으므로 이당(李唐)이라 이른다.

() 나라 임금의 성이 이()였기 때문에 당 나라를 이렇게 말한다.

 

이대(鯉對)

이정(鯉庭)과 같은 뜻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교훈을 받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계씨(季氏)공자가 일찍이 혼자 서 있는데 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 공자가 너 시()를 배웠느냐?’ 하니, 이가 대()하여 아뢰기를배우지 못했습니다.’고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이대(移帶)

허리띠를 옮긴다는 것은 병을 앓아 몸이 야위어져서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것이다.

 

이대례(二戴禮)

중국의 예전(禮典)을 뜻하는 말이다. 서한(西漢)의 금문경학가(今文經學家)로서 숙질(叔姪)간인 대덕(戴德)과 대성(戴聖)이 편찬한 대대례(大戴禮)와 소대례(小戴禮)를 이대례 혹은 이대(二戴)라고 하는데, 소대례는 바로 지금 전해지는 예기(禮記)이다.

 

이대문헌(二代文獻)

두 대는 하(()인데, 은 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하우(夏禹)의 홍범(洪範)을 전하였다는 말이다.

 

이대원(李大源)

선조(宣祖) 20(1587)에 녹도 만호(鹿島萬戶)로 왜구(倭寇)를 대파한 뒤에 왜적에게 붙잡혀 끝내 항복하지 않고 순절하였다.

 

이덕보원(以德報怨)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이덕여(李德輿)

덕여(德輿)는 이석기(李碩基)의 자()이다. 어미가 병석(病席)에 있을 때 지혈(指血)을 약에 타서 간호하는 등 효행(孝行)으로 유명하였다.

 

이덕판서(李德判書)

이덕이라는 첩의 말을 들어 정사를 한 병조 판서를 비웃는 말이다.

 

이덕형(李德馨)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재임했다.

 

이도(履道)

낙양(洛陽)에 있는 마을 이름인데, 백거이(白居易)가 만년에 여기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도련갑자(泥塗憐甲子)

숱한 세월을 불우하게 보낸 것을 안쓰럽게 여기는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축성 공사에 동원된 노인이 나이를 알지 못한 채 생일인 정월 갑자날 초하루에서 445번째의 갑자날이 지나갔다[生之歲正月甲子朔 四百有四十五甲子矣].고 하자, 사광(師曠)73세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에 조맹(趙孟)이 그 노인을 불러다 사과하기를 당신을 발탁해서 제대로 쓰지 못하고 오래도록 토목 공사의 인부로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나의 죄이다[不能由吾子 使吾子辱在泥塗久矣 武之罪也]”라고 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襄公 20> 한편 두보(杜甫)의 시에도 有客雖安命 衰容豈壯夫 家人憂几杖 甲子混泥塗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 贈韋左丞濟

 

이도부(二都賦)

서경부(西京賦동경부(東京賦)이다.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복숭아 두 개로 무사 세 명을 죽인다는 뜻으로, 교묘한 책략으로 상대를 자멸하게 하는 것을 비유한 말.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명재상 안영(晏嬰)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도예미(泥塗曳尾)

벼슬에 속박됨이 없이 편안히 살기를 바라는 뜻이다. 거북은 죽어서 점치는 데 씌어 귀하게 되는 것보다는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좋아한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이도욕(泥塗辱)

재능 있는 사람이 낮은 자리에서 고생함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이도위(李都尉)

이 도위(李都尉)는 한 무제(漢武帝) 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된 이릉(李陵)을 말한다. 이릉은 한() 나라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의 손자로서 용감한 군사 5천 인을 거느리고 흉노를 대비하고 있다가, 보병 부대를 이끌고 나가 준계산(浚稽山)에서 선우(單于)의 군대 수천 인을 격살(擊殺)하였는데, 결국은 후속 부대의 지원이 없이 중과부적으로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사기(史記)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한서(漢書)54

 

이도장(李道章)

도장(道章)은 이소한(李昭漢)의 자()이다.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을 없애는데 다른 독을 사용한다.

 

이동동(異同同)

다르고 같은 것이 한가지다라는 뜻이다.

 

이동욱(李東郁)

자는 유문(幼文), 본관은 평창(平昌), 광직(光溭)의 아들이자 승훈(承薰)의 아버지이다. 정조 때 참판·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역임했는데 순조 1(1801)아들이 천주교도로 사형되자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이동제지마(異同齊指馬)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손가락으로써 손가락의 손가락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손가락 아닌 것으로써 손가락의 손가락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고, 말로써 말의 말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말 아닌 것으로써 말이 말 아님을 깨우지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苦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천지 만물의 사이에 시비 진위(是非眞僞)의 차별을 두지 말고, 모두 상대적으로 보아서 하나로 귀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두(螭頭)

궁궐 섬돌에 새긴 용 머리 모양의 장식물로, 한림 학사(翰林學士)를 가리킨다. 진택장어(震澤長語) 관제(官制)아조(我朝)의 한림은 모두 사관(史官)으로, 반열이 이두(螭頭)에 가깝기는 하나 역시 전하(殿下)에 멀리 있다.”고 하였다.

기거주(起居注)를 의미한다. 기거사인(起居舍人)이 섬돌 아래 이수(螭首) 옆에 좌우로 나뉘어 서서 사관(史官)의 직분을 행한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두관(螭頭官). 송사(宋史)職官志 1

 

이두(李杜)

() 나라 시인(詩人) 이백(李白)두보(杜甫)를 가리키며, 대문장가를 말한다.

() 나라 시인(詩人) 이백(李白)두보(杜甫)를 가리키며, 한 시대에 살며 평소에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던 사실을 통해 절친한 친구를 말한다. / 인용: 哭林德涵(김창협)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이응(李膺)ㆍ두밀(杜密)을 합칭한 말이다. 역시 후한의 고사인 범방(范滂) 또한 환제(桓帝) 때 당고(黨錮)의 화()에 연좌되어 체포령이 내리자, 함께 도망치자는 현령(縣令) 곽읍(郭揖)의 청을 뿌리치고 자진하여 감옥으로 나아갈 적에 그의 모친이 나와서 영결(永訣)을 하므로, 그가 모친에게 사뢰기를 아우 중박이 효성스럽고 공경하여 넉넉히 어머니를 공양할 만합니다. 저는 이제 아버지 용서군을 따라 황천으로 돌아가면 생존한 이와 죽은 이가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직 어머니께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은혜를 잘라 버리시어 너무 슬퍼하지 마소서[仲博孝敬, 足以供養. 滂從龍舒君歸黃泉, 存亡各得其所. 惟大人割不可忍之恩, 勿增感戚.].”라고 하자, 그의 모친이 이르기를 네가 지금 이응ㆍ두밀과 명성을 나란히 하게 되었으니,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이미 훌륭한 명성을 얻고 다시 오래 살기까지 바란다면 다 겸하여 얻을 수 있겠느냐[汝今得與李杜齊名, 死亦何恨? 旣有令名, 復求壽考, 可兼得乎?].”라고 하였는데, 범방은 모친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길로 가서 처형을 당했다. 후한서(後漢書)67 당고열전(黨錮列傳)범방(范滂) / 인용: 自挽(노수신)

 

이두광망(李杜光芒)

한유(韓愈)의 시에 李杜文章在 光焰萬丈長이라 하였다.

 

이두란(李豆蘭)

여진족(女眞族) 무장(武將)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뒤 북청(北靑)에서 거주하였으며, 이성계(李成桂)와 의형제를 맺고 그의 등극(登極)을 도와 개국 일등공신에 오르고 퉁()이라는 원래의 성() 대신 이씨(李氏)를 하사받았다. 이지란(李之蘭)이라고도 한다.

 

이두석두(以杜釋杜)

두보(杜甫)의 시로 두보의 시를 해석해야 한다.

 

이두암(螭頭暗)

대궐 계단의 돌로 새긴 용의 머리(螭頭). 한유(韓愈)의 원일조회(元日朝會)시에 금로의 향이 움직이니 용의 머리가 어두워지네[金爐香動螭頭暗].”라는 구절이 있다.

 

이락(伊洛)

이수와 낙수 근방의 지역으로 낙양(洛陽). 동도(東都)를 말한다. / 인용: 昭代風謠序(오광운)

정주학(程朱學)을 가리킨다. 이수(伊水낙수(洛水) 사이에서 두 정자(二程子), 즉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이 강학(講學)을 하였는데, 뒤에 주자(朱子)가 정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국어(國語)』 「주어 상(周語上), “옛날에 이수와 낙수가 마르자 하()나라가 망하였다[昔伊洛竭而夏亡].”라는 구절이 있다.

 

이모(二毛)

머리카락의 색이 검은 것과 흰 것이 섞인 것으로, 노인을 말한다

 

이문(移文)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있었던 공문서의 한 가지이다. / 인용: 北山移文(공치규)

 

이사(李斯)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 () 나라의 객경(客卿)이 되어 진시황(秦始皇)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창립하였다. 젊어서 순경(荀卿)에게 사사하여 제왕(帝王)의 술()을 배웠고 사부에 능하였다.

 

이시(移時)

한참동안 시간을 보내다. /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이사겸(李士謙)

사겸(士謙)은 이행진(李行進)의 자()이다.

 

이사구(二寺狗)

두 절의 개. 두 절에 속한 개가 양쪽 절을 분주히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쪽 절에서도 밥을 얻지 못한다는 말. 곧 한 사람이 양쪽에 이름을 걸어 놓고 다니면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사도(李司徒)

()의 안녹산(安祿山) 난리에 큰 공을 세웠던 이광필(李光弼)을 이름이다. 당서(唐書)116

 

이사부(異斯夫)

신라(新羅) 때의 장군이다. 그가 일찍이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강릉)의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도(于山島) 즉 지금의 울릉도(鬱陵島)를 공격할 적에 나무로 만든 사자(獅子)로 그들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사상동문(李斯上東門)

이사(李斯)는 초()나라 사람으로 진나라에서 성공하여 승상(承相)으로 부귀를 누리다가 뒤에 조고(趙高)에게 무함을 당하여 부자(父子)가 함양(咸陽) 저자에서 사형을 받으면서 아들을 보고 통곡하기를 너와 내가 고향인 상채(上蔡) 동문(東門)에 누른 개를 이끌고 사냥하던 것을 언제나 다시 하리.”라고 하였다 한다.

 

이사성(貳師城)

대완국(大宛國)에 있었던 성으로 한 무제는 돈황 사람 이광리(李廣利)를 장군으로 삼아 대완국을 공격해서 이사성에 이르러 좋은 말을 취해오도록 하였으므로 이광리를 이사장군(貳師將軍)이라 불렀다. 사기(史記)』 「대원열전(大宛列傳)

 

이사심(李士深)

사심(士深)은 이후원(李厚源)의 자()이다.

 

이사훈(李思訓)

() 나라 때의 종족(宗族)으로 북종화(北宗畵)의 비조.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을 지냈다.

 

이삭(離索)

이군삭거(離群索居)의 준말로, ‘친구들 곁을 떠나 혼자 외로이 지내는 것을 말한다. 자하(子夏)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산 지가 오래이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인용: 答人論文(장유)

 

이산(尼山)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동남쪽에 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어머니 안씨(顔氏)와 함께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으므로 이름을 구()라 하고, 자를 중니(仲尼)라 했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이산(移山)

우공(愚公)이 산을 옮긴 고사를 말한다. 북산(北山)에 사는 우공이 나이가 90에 가까웠는데, 집 앞에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 두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출입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그 산을 없애어 평평하게 할 결심을 하였다. 지수(智叟)가 그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는 우공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러자 우공은 내가 죽으면 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어서 자자손손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산은 더 높아지지 않으니 어찌 이루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면서 날마다 쉬지 않고 산을 파내었다. 그러자 상제(上帝)가 산을 옮겨 주었다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이산(飴山)

청 나라 시인 조집신(趙執信)의 별호이다.

 

이산해(李山海)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상(履霜)

주역(周易)』 「곤괘(坤卦)초육효사(初六爻辭)서리를 밟고 나면 두터운 얼음이 얼게 된다[履霜堅冰至].”라 하였고, 시경(詩經)소아(小雅) 소민(小旻)깊은 못에 임한 듯하고 살얼음을 밟듯이 한다[如臨深淵 如履薄冰].”고 하였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이상(爾相)

신부(新婦)를 말한다. 의례(儀禮) 사혼례(士婚禮), 아비가 친영(親迎)하러 가는 아들에게 술을 따라 주는 초례(醮禮)를 행하면서 어서 가서 너의 짝을 맞이하여, 우리 집안 제사(祭祀)의 일을 이어받도록 하라[往迎爾相 承我宗事].”고 명하는 말이 나온다.

 

이상고(李尙古)

상고(尙古)는 이경직(李景稷)의 자이다.

 

이상동몽(異床同夢)

다른 침상에서 같은 꿈을 꾼다는 말로, ‘다른 처지에서 같은 뜻을 가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상로(圯上老)

황석공(黃石公)이 이교(圯橋)에서 장량(張良)을 만나 소서(素書)를 주어 그로 하여금 한고조(漢高祖)를 도와 큰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상일편(圯上一篇)

황석공(黃石公)이 하비(下邳)의 다리 위(圯上)에서 한() 나라의 개국공신 장량(張良)에게 주었다는 태공병법(太公兵法)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호량의 혜시(惠施)는 부질없이 책만 무려 다섯 수레, 이상의 책 한 권이면 원래 충분한 것을[濠梁空復五車多 圯上從來一編足]”이라는 표현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45 張競辰永康所居萬卷堂 / 한 고조(漢高朝)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장막 속에서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일천 리 밖에서 승부를 벌써 결정지은 것은 자방의 공이다[運籌策帳中 決勝千里外 子房之功也].”라고 칭찬한 고사가 있다. 자방(子房)은 장량의 자()이다. 사기(史記)55 유후세가(留侯世家)

 

이상질(李尙質)

권필(權韠)의 문인으로, 광해군 8(1616)에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의 난정(亂政)에 환멸을 느끼고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비로소 성균관에 입학, 인조(仁祖) 7(1629) 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청직(淸職)을 역임하던 중, 인조 12년에 원종(元宗)을 종묘에 추숭(追崇)하려는 것을 간()하다가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회양(淮陽)에서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서(彝敍)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의 자이다.

 

이서기지심서인(以恕己之心恕人)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

 

이석(李石)

자는 중옥(仲玉)인데, 당 문종(唐文宗) 때 호부 시랑(戶部侍郞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다.

 

이선(珥蟬)

초선관(貂蟬冠)으로 한대(漢代)의 시중(侍中) 상시(常侍)들이 쓰던 관인데 전()하여 높은 벼슬아치들을 가리킨 것이다.

 

이선유감시(履善有感詩)

() 나라 문천상(文天祥)의 자()이다. 문천상이 원병(元兵)에게 패하고 연경(燕京) 토굴 속에 갇혀 있으면서 지은 시 중에 유감(有感)이라는 제목이 있다. 문산집(文山集)20

 

이섭(利涉)

물을 건너는 데 편리하게 해 놓은 것을 말한다.

 

이성(李晟)

() 나라 사람. 자는 양기(良器). 당 덕종(唐德宗) 때 주자국(朱泚國)을 평정하고 경사(京師)를 수복했음. 덕종은 天生李晟 以爲社稷 非爲朕也라고 말했음.

 

이성(犂星)

별자리 이름. 이 별자리가 나타나면 봄갈이를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세민(李世民)

중국 당()나라의 실질적인 창건자이자 제2대 황제. 묘호는 태종(太宗). 아버지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도와 당의 창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반란을 주도했다. 재위기간중 돌궐족을 몰아냈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세적(李世勣)

본 성명은 서세적(徐世勣), 자는 무공(懋功). 처음에는 이밀(李密)을 섬기다가 당 태종에게 귀순하여 큰 공을 세웠으므로 이()로 사성(賜姓)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의 이름이 세민(世民)이기 때문에 세()자를 피하여 한 자 이름으로 적()이라 했다.

 

이소(李愬)

당나라 장수. 회서(淮西)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벌할 때에, 회서 반란군의 근거지인 채주(蔡州)까지 120리를 밤 눈 오는 틈을 타서 급하게 달려가, 닭이 울 때에 성중에 돌입하여 그 대장인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았다.

 

이소(離騷)

() 나라 굴원(屈原)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임금에게 바른 말을 아뢰다가 간신(奸臣)의 참소로 왕에게 신임을 잃고 쫓겨남을 당하여, 상강(湘江) 가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실망(失望)과 충분(忠憤)을 내용으로 이소경(離騷經)라는 애절(哀切)한 글을 짓고는 물에 몸을 던졌다.

초사(楚辭)의 편명(篇名)으로 굴원(屈原)의 저작이다. 굴원이 초 나라에 벼슬하여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겼는데 상관대부(上官大夫)가 그를 참소한 까닭으로 추방을 당하여 우수사려(憂愁思慮)에 잠겨 지은 서정시(敍情詩)로서 사부(詞賦)의 으뜸이 된다.

③ 「이소경(離騷經)는 모두 2490자로 된 굴원의 대표적인 서사이다. ()는 별(), ()는 수() 이별의 슬픔이라는 왕일(王逸) 설과 근심을 만나다라는 반고(班固) 설이 있다. 굴원은 이소의 시에서 그의 충정과 비탄, 애국과 원망, 참회와 절망, 끝으로 절명의 심정을 노래했다.

 

이소(離疎)

애타는 걱정에 걸리다, 근심에 걸리다, 애타는 호소, 또는 불평불만(不平不滿)’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애타는 호소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소(二疏)

한 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신(名臣)인 소광(疏廣)과 조카 소수(疏受)를 가리킨다. 소광은 태부(太傅)가 되고 소수는 소부(少傅)가 되었는데 같은 때에 나이가 들어서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모두 어질게 여겨 그들이 시골로 돌아가는 날 전송하러 온 자들의 수레가 수백 대나 되었다고 한다.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인 소광(疏廣)과 소수(疏受)의 숙질(叔姪)을 가리킨다. 소광은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고 소수는 소부(小傅)가 되었는데, 사람마다 영화스럽게 여겼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갈 때 임금과 태자가 하사한 금으로 전답을 사지 않고 날마다 친척과 친구를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한서(漢書)卷七十一 소광전(疏廣傳)

() 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신(名臣) 소광(疏廣)과 조카 소수(疏受)를 말한다. 광은 태자 태부(太子太傅)였고, 수는 소부(少傅)였는데 그 직에 있은 지 5년 만에 관직이 높아지고 명성이 널리 퍼졌으나, 벼슬과 명예가 너무 높으면 후회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 하고 광이 조카 수와 함께 관작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여유 있는 여생을 즐겼다 한다.

 

이소걸해도(二疏乞骸圖)

한 선제(漢宣帝) 때 소광(疏廣소수(疏受) 두 사람이 함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당시 소광은 태자태부(太子太傅)였고 그의 조카 소수는 태자소부(太子小傅)였는데, 위인이 모두 청렴결백하여 성만(盛滿)을 느끼어 함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수많은 도중(都中)의 인사들이 동문(東門)까지 나와 그들을 송별하였다 한다. 한서(漢書)卷七十一

 

이소경삼(離騷徑三)

굴원(屈原)이소경(離騷經)에 꽃과 풀이 많이 나오지만 매화는 없고, 도연명(陶淵明)의 삼경은 송()ㆍ죽()ㆍ국() 뿐이었다.

 

이소공(二疏公)

() 나라 때 소광(疏廣)과 소수(疏受) 두 사람을 합칭한 말이다. 소수는 곧 소광의 조카로, 같은 때에 소광은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고 소수는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는데, 이 관직에 있은 지 5년만에 성만(盛滿)을 경계하여 함께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한서(漢書)』 「소광전(疏廣傳)

 

이소공기굴평애(離騷空寄屈平哀)

초사(楚辭)의 한 편(), 굴원(屈原)의 작이다. 굴원이 초() 나라의 종실(宗室)과 대부(大夫)의 참소 때문에 쫓겨나 근심하고 시름하여 지은 것이다. ()는 만남()이요, ()는 근심이니, ‘근심을 만나 지은 글이란 뜻이다.

 

이소부(離騷賦)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초() 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부()이소경(離騷經)을 말한다. 굴원이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겼으나 임금이 간사한 자의 참소를 듣고 멀리하므로 이를 지었다고 한다.

 

이소사대(以小事大)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섬기는 것은 낙천(樂天)하는 것이요,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이소원(離騷怨)

임금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원망한다는 말. 이소경(離騷經)는 초사(楚辭)의 편명으로 굴원(屈原)이 지었다. 그 내용은 대략,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받들었으나 간신의 모략에 걸려 쫓겨났음을 하소한 것이다.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이소자수루(離騷玆樹漏)

이소경(離騷經)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대부 굴원(屈原)이 지었는데, 내용 중에 향초(香草)는 충신(忠臣), 악초는 간신에 비유하여 풀이나 나무 이름이 많이 나오나 유독 매화만은 나오지 않는다.

 

이소향초(離騷香草)

이소경(離騷經)은 초사(楚辭)의 편명으로 초 나라 대부 굴원(屈原)이 지었는데, 좋은 새와 향초(香草)는 충정(忠貞)한 사람을, 악조(惡鳥)와 악초는 간신을 비유하였다.

 

이손곡(李蓀谷)

조선 시대 시인(詩人) 이달(李達)을 말한다. 손곡은 그의 호이다.

 

이수(李需)

고려의 문신. 자는 낙운(樂雲).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당시 문장 이규보(李奎報)와 매우 친절했다.

 

이수(貍首)

일시(逸詩)의 편명인데, ()는 오지 않다(不來)의 뜻으로, 천자국에 내조(來朝)하지 않은 제후(諸侯)의 머리를 쏘아 버린다는 내용을 담은 악장인바, 이는 제후들이 활을 쏠 때에 부르던 노래였다고 한다.

 

이수(李叟)

이이(李耳). 노자(老子)를 말한다.

 

이수(二豎)

두 아이로 화신(化身)한 병마(病魔)를 가리킨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10년 조()진후(晉侯)가 병이 나서 진() 나라에서 의원을 구하였는데, 진백(秦伯)이 의원을 보내었다.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진후가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병이 두 어린아이(二豎)로 화해 말하기를, ‘저 어진 의원이 우리를 해칠까 두렵다.’ 하니, 그중 하나가 말하기를, ‘()의 위, ()의 아래에 숨으면 우리를 어쩌겠는가.’ 하였다. 의원이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황의 위, 고의 아래에 숨어 있어서 공격하려 해도 할 수가 없고 도달하려 해도 할 수가 없어서 약이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니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수시(貍首詩)

일시(逸詩)에 빠진 시의 편명인데, 모두 2장이다. 하나는 예기(禮記)에 보이고 하나는 대대예기(大戴禮記)에 보인다. 곤학기문(困學記聞)활쏘기를 명하는 시다.”라고 하였다.

 

이수전(二竪纏)

불치(不治)의 병에 걸렸다는 말이다. 옛날 꿈속에서 더벅머리 사내 둘(二竪)이 황()의 위와 고()의 아래에 숨어 들어가자 양의(良醫)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成公 10

 

이숙황량(已熟黃粱)

황량밥이 익다. 허망한 꿈이 깨듯 부질없는 인간사가 끝났다. () 나라 심기제(沈旣濟)침중기(枕中記)노생(盧生)이 한단(邯鄲) 객사(客舍)에서 도인(道人) 여옹(呂翁)을 만났다. 노생이 자기의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자 여옹은 그에게 목침을 주고 잠을 자게 하였는데, 노생은 꿈속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 꿈을 깨고 나니 집주인이 짓던 누른 기장밥이 채 익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순(耳順)

60. 귀가 순해지다. 귀로 어떤 말을 듣건 그 뜻을 다 아는 것. 공자가 나이 60이 되자, 학문의 완숙 경지에 이르러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곧바로 그 말뜻을 알게 되었다 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60세에 말을 들으면 저절로 그 뜻을 알았다[六十而耳順]”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승지석(李承旨席)

조선 철종(哲宗) 때의 문신(文臣) 이시원(李是遠)이 짜 팔던 돗자리. 이시원은 집이 가난하여 돗자리를 짜 팔아서 부모를 봉양하였는데, 현달한 뒤에도 그렇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이승지석이라 하였다.

 

이시(梨腮)

얼은 배처럼 검버섯이 생긴 노인의 얼굴을 말한다.

 

이시(利市)

팔아서 이득을 얻는다는 뜻인데, 주역(周易)설괘(說卦)시가의 세 배에 가까운 이득이 된다[爲近利市三倍].”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시수(二始守)

시평 태수(始平太守)를 지낸 진() 나라의 완함(阮咸)과 시안 태수(始安太守)를 역임한 남조(南朝) ()의 안연지(顔延之)를 가리킨다. 송서(宋書) 안연지전(顔延之傳)옛날 순욱(荀勗)은 완함을 꺼린 나머지 시평군으로 쫓아냈는데, 지금 그대 역시 시안군으로 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이시(二始)라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시애(李施愛)

판회령부사(判會寧府事) 등을 역임한 뒤, 조정에 불만을 품고 함경도 병마절도사 강효문(康孝文)과 그 휘하 군관을 살해한 다음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정에 대해서는 강효문이 반란을 꾀하므로 처형했다고 보고하고, 북도민의 민심을 얻어 단천(端川북청(北靑홍원(洪原) 등지를 공략 점거했는데, 조정에서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사도병마도통사(四道兵馬都統使)로 삼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서 그를 토벌하게 하여 끝내 그를 잡아 참수하였다.

 

이식(耳食)

전해들은 것만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육국연표서(六國年表序)此與以耳食無異라 하였다.

 

이식한(李識韓)

권세에 아부한다. 이는 이벽(李壁), 한은 한탁주(韓侂冑). 이벽이 소년 시절부터 재주가 영특하고 학문을 목마를 때 물 찾듯이 탐하여, 자기 부자(父子)와 아우 식()과 함께 촉()의 사람들이 삼소(三蘇)에다 비길 정도로 문학으로서 지명도가 대단했었다. 영종(寧宗)때 권신 한탁주에게 붙어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송사(宋史)卷三百九十八

 

이신(李紳)

당 나라 사람. 그는 체구가 아주 작았기 때문에 단리(短李)라고도 한다. 재질이 뛰어나 등용되었고 뒤에 소인들의 모함으로 화란을 당할 뻔했으나 다시 정인(正人)들의 구호로 오랫동안 공명을 누렸다. 당서(唐書)卷一百七十三 이신전(李紳傳)

 

이신위마(以神爲馬)

나를 변화시켜 엉덩이를 수레바퀴로 삼고, ()을 말()로 삼아서 내가 탈 것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이신택(履信宅)

백거이(白居易)가 원진(元稹) 사후에 장안(長安) 이신리(履信里)에 있던 그의 옛집을 방문하여 지은 과원가이신택(過元家履信宅)’이라는 시가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11

 

이실(貳室)

부궁(副宮)을 이르는데, 맹자(孟子)』 「만장(萬章)()이 올라가서 제요(帝堯)를 뵈니, 제요가 순을 이실에 관사를 정해 주어 사위로 삼았다[舜尙見帝, 帝館甥于貳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실직고(以實直告)

사실로써 바르게 고하다. 있는 사실 그대로 바른 대로 고한다는 뜻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 깊고 깊은 이치는 말로는 다 풀 수 없고 마음속으로 깨달아야 한다. 서로의 처지나 생각을 말을 통하지 않고서도 이해한다. / 유의어: 심심상인(心心相印).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염화미소(拈華微笑). 염화시중(拈華示衆).

 

이십년전봉백리(二十年前逢百罹)

시경(詩經)왕풍(王風) 토원(兎爰)에서 온 말로, 시경의 본뜻은 소인들이 득세함으로써 정직한 사람이 화를 입는 것을 노래하였다.

 

이십번풍(二十番風)

꽃소식인 이십사번 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을 말한다. 한 달이면 기()가 둘, ()가 여섯으로 소한(小寒)에서부터 곡우(穀雨)까지 4개월에 걸쳐 모두 24후로서 5일마다 한 후씩 계산하여 꽃 한 가지에 해당시키는 방법이다. 초씨필승(焦氏筆乘)

 

이십사고(二十四考)

() 나라 때의 명장 곽자의(郭子儀)가 중서령(中書令)으로 고시(考試)를 스물 네 번이나 주관했던 것을 말한다.

 

이십사교(二十四橋)

중국의 화려한 양주(楊洲)24(二十四橋)가 있다.

 

이십사교명월(二十四橋明月)

양주(楊州)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이십사교 밝은 달밤(二十四橋明月夜)’이라는 시가 있다.

 

이십사번풍(二十四番風)

이십사번 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을 말한 것이다. 바람이 꽃피는 시기에 맞추어 불어오는데, 한 달을 2() 6()로 나누어, 소한(小寒) 때부터 곡우(穀雨)까지 4개월 동안에 824후가 된다.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당 나라 사공도(司空圖)가 지은 글로서 시의 품격을 스물 넷으로 나누어 논한 것이다.

 

이십사절(二十四節)

24절기를 말한다. 즉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등이다.

 

이십팔괘(二十八卦)

주역(周易)64(六十四卦)3분의 128괘의 괘자(卦字)를 구()마다 넣어서 28()의 시를 지었는데, 구마다 괘자를 표시하였다.

 

이십팔수(二十八宿)

옛날 중국에서 해, , 별 등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 황도(黃道)에 따라 천구(天球)를 스물여덟으로 구분한 것으로, 동쪽 분야의 각(((((((), 북쪽 분야의 두(((((((), 서쪽 분야의 규(((((((), 남쪽 분야의 정((((((() 등의 별자리를 가리킨다.

 

이십팔수체(二十八宿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등 이십팔수의 글자를 한 구에 한 자씩 넣어서 짓는 시를 말한다.

 

이씨산방(李氏山房)

() 나라 때 이상(李常)이 여산(廬山)의 백석승사(白石僧舍)에 만 권의 장서를 쌓아 두고는 이씨산방이라 하였다.

 

이아(爾雅)

작자 미상. 주공(周公)이 지었다고도 한다. 내용은 천문(天文지리(地理음악(音樂기재(器材초목(草木조수(鳥獸) 등의 이름 및 고금의 문자(文字) 등이 설명되고, 10권인데, () 나라 곽박(郭璞)이 주를 내고 송() 나라 형병(邢昺)이 소()를 냈음.

중국 고대의 충어초목(蟲魚草木) 등 물명(物名)과 글자를 풀이한 책이름으로, 자질구레한 문자나 파고 세월과 정력을 소모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문장과 언어가 올바르고 우아(優雅)함을 말한다.

 

이아경(爾雅經)

십삼경(十三經)의 하나로 가장 오래 된 자서(字書)이며 모두 19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천문(天文지리(地理음악(音樂기재(器材초목(草木조수(鳥獸충어(虫魚) 등에 관한 고금의 문자(文字)를 설명하였다.

 

이아익(爾雅翼)

송 나라 나원(羅願)의 찬으로, (((((()6()로 나누어 물명(物名)을 해설한 책이다. 32.

 

이안눌(李安訥)

인조(仁祖) 때 사람.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형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文惠). 사부(辭賦)에 능했고,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스승이다.

 

이양빙(李陽氷)

당 나라 서예가. 자는 소온(小溫).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이양역우(以羊易牛)

양을 가지고 소와 바꿈.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에 대용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이양천지석궁음(二陽天地釋窮陰)

섣달의 마지막 극성을 부리는 추위를 말한 것. 주역(周易)의 괘()로 음력 12개월을 따져보면 동짓달에는 지뢰복(地雷復)괘로서 양 한 획이 밑에서 생기고 섣달이 되면 지택임괘(地澤臨卦)로서 양 두 획이 밑에 있다. 양은 불로서 덥고 음을 물로서 추운데, 섣달은 궁극적인 음으로 가장 추운 달이다.

 

이어서신(鯉魚書信)

() 나라 사람들이 편지를 부칠 때 늘 한 자쯤 되는 흰 비단에 싸서 잉어 모양으로 묶어 보냈으므로, ()하여 편지를 말한다.

 

이어쌍(鯉魚雙)

편지를 뜻하는 시어로 쓰인다. 고시(古詩)친구가 나에게 두 잉어를 보내기에, 아이를 불러 잉어를 삶았더니, 그 속에 편지가 들었네.”라고 한 구절이 있다. / 인용: 燕灘上(김구용)

 

이어풍(鯉魚風)

구월 바람을 말한다. 당 나라 이하(李賀)의 시 門前流水江陵道 鯉魚風起芙蓉老에서 나온 것이다.

 

이업후(李鄴侯)

() 나라 시중(侍中) 이필(李泌)이 공으로써 업현후(鄴縣侯)에 봉해졌으므로 세상에서 이업후(李鄴侯)라 이른다.

 

이여(伊呂)

훌륭한 재상을 말한다. 은 나라 () 임금의 신하 이윤(伊尹)과 주() 나라 문왕(文王)의 신하 여상(呂尙)인데, 모두 임금을 도와 큰 공을 이룩하였다. 여상은 주() 나라 명상인 강태공(姜太公)을 가리킨다.

 

이여(爾汝)

너니 나니 하면서 서로 허물없이 트고 지내는 사이란 말로 극히 친밀한 교우(交友)’를 말한다. / 유의어: 너나들이, 이여교(爾汝交) / 인용: 贈季雨序(박지원)

 

이여반장(易如反掌)

쉽기가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음. 어떤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매우 쉬움을 말한다.

 

이여성(李汝省)

여성(汝省)은 이경회(李景會)의 자()이다. 인조 23(1645) 이조 판서로 재직중에, 감역(監役) 조민(趙珉)을 잘못 탁용(擢用)했다는 이유로 왕의 노여움을 산 나머지 해주(海州)에 부처(付處)되었다가, 한 달이 지나서 용서를 받고 풀려났다.

 

이여송(李如松)

() 나라의 장군. 그는 신종 황제의 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조선에 나와 왜란을 평정하였고, 뒤에 자기 아버지 이성량(李成梁)의 봉호인 영원백(寧遠伯)을 승습받았다. 명사(明史)卷二百三十八

 

이연(貽燕)

연익(燕翼)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제비가 알을 품듯 품어 주었다는 말이다.

 

이연평(李延平)

송 나라 검포(劍浦)사람으로, 주희(朱熹)의 스승이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열로써 열을 다스림. , 힘은 힘으로써 물리침.

 

이영(李穎)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문신으로 특히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하였고, 벼슬은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예부 상서(禮部尙書한림 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이영각(邇英閣)

송 영종(宋英宗)이 시신(侍臣)들을 명소하여 경사(經史)를 강독하던 전각 이름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경연(經筵)을 비유한 것이다.

 

이영간(李靈幹)

고려 때의 문신. 그가 행한 많은 기적(奇蹟)이 전한다.

 

이영구(李營邱)

송 나라 때 화가 이성(李成). 영구(營邱) 사람이다.

 

이예(夷羿)

()는 예(羿)의 성, 하 나라 말기 유궁(有窮)의 임금. 하 나라 임금 상()을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었다. 夏后相(太康中康)

 

이오(夷吾)

춘추시대(春秋時代) ()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패업(霸業)을 이룬 명상(名相) 관중(管仲)의 이름이다. 환공(桓公)으로부터 숙부(叔父)의 칭호를 들으며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정치를 이룩하여 제후를 규합하고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시대 오패(五霸)의 으뜸이 되게 만들었다.

 

이오가이리오국(利吾家而利吾國)

맹자(孟子)왕은 가로되, ‘어찌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꼬.’하면, 대부는 가로되, ‘어찌하면 내 집을 이롭게 할꼬,’라 한다[王曰, ‘何以利吾國?’. 大夫曰, ‘何以利吾家?’].”는 말이 있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이오봉(李五峯)

오봉(五峯)은 이호민(李好閔)의 호이다.

 

이옹(伊翁)

() 나라 탕왕(湯王)을 도와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펼친 이윤(伊尹). 당초 탕왕을 만날 길이 없자 탕왕의 처인 유신씨(有莘氏) 집의 요리사(宰臣)가 된 뒤 솥과 도마를 등에 지고 탕왕을 만나 음식으로써 천하의 도리를 비유해 설명했던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이옹(李邕)

678년에 출생하여 747년에 죽었다. 해서(楷書)와 행서(行書)로 비석 글씨를 쓰는 데 뛰어났고,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 부자의 필법을 본받아 개성있는 글씨를 썼다. 천보(天寶) 초에 북해태수(北海太守)를 지내 이북해(李北海)’로 불렸다. 사람됨이 정직해서 재상 이임보(李任甫)가 평소 그를 꺼려해, 모함하여 북해군에서 장살(杖殺) 당했다. 그는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생전에 쓴 비서(碑書)800여이나 되었다고 한다. / 인용: 冷齋夜話

 

이옹입락(李邕入洛)

좌천하여 지방에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서울에 돌아오게 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이옹은 문명(文名)이 천하에 드높았고 성품이 아주 강직하였는데, 일찍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너무 과격한 말로 왕을 간한 것이 화근이 되어 좌천되어 여러 지방관으로 돌아다니다가 뒤에 다시 서울에 돌아와 현달하게 되었다. 구당서(舊唐書)卷一百九十 이옹전(李邕傳)

 

이완평(李完平)

조선 중기의 명상(名相)으로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진 이원익(李元翼)을 가리킨다.

 

이왕(二王)

() 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를 말한다.

 

이왕지사(已往之事)

이미 지나간 일.

 

이요루(二樂樓)

단양(丹陽)에 있는 누각 이름이다.

 

이용(利用)

천리(天理)를 잘 이용해서 처세함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繫辭)순리를 이용해서 몸을 안전하게 함은 덕을 높이는 것이다[利用安身 以崇德也]”라고 하였다.

 

이용재(李容齋)

성종(成宗) 때의 문신(文臣) 이행(李荇)의 호가 용재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함양(咸陽)으로 귀양간 일이 있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용후생(利用厚生)

기물(器物)의 사용(使用)을 편리(便利)하게 하고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을 윤택(潤澤)하게 한다. 모든 물질들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우나포슬(犛牛那捕虱)

큰 재능을 지닌 사람은 잡다한 일을 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이우린(李于麟)

우린(于麟)은 명() 나라 이반룡(李攀龍)의 자. 호는 창명(滄溟), 그는 왕세정(王世貞)과 함께 문단(文壇)의 맹주(盟主)를 이어받았다.

 

이우북당(伊優北堂)

임금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받는 신하들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80권 하() 문원전(文苑傳) 조일(趙壹)아첨꾼은 총애받아 북당으로 올라가고, 곧은 신하는 초라하게 문간에 기대 섰네[伊優北堂上 骯髒倚門邊].”라는 말이 나온다.

 

이우항장(伊優骯髒)

이우(伊優)는 말을 얼버무리며 윗사람에게 영합하는 아첨꾼을 말하고, 항장은 고결한 지조를 지키며 강직하게 맞서는 사람을 말한다. 후한(後漢) 조일(趙壹)의 시 질사(疾邪)’이우는 북당 위에서 뻐기는데, 항장은 문간에서 시름겨워 하누나[伊優北堂上 骯髒倚門邊].”라는 구절이 있다. 후한서(後漢書)80문원열전(文苑列傳)조일(趙壹)

 

이욱(李煜)

남당(南唐) 3대 왕. 문장과 서화(書畵)에 능했다.

 

이운(梨雲)

배꽃같이 새하얀 구름, 또는 많은 배꽃을 백운(白雲)에 비유하는 말이다.

 

이원(梨園)

광대들이 노래와 춤을 익히는 곳. 당 명황(唐明皇)이 좌부기(坐部伎)의 사람들 3백 명을 선발하여 법곡(法曲)을 가르치던 곳이다.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

 

이원(李遠)

() 나라 선종(宣宗) 때의 문사(文士)이다. 일찍이 항주 자사(杭州刺史)로 천거되었을 때, 그의 시에 長日惟消一局棋라는 구절이 있다는 이유로 황제가 난색을 표했는데, 다른 이의 해명을 듣고 그 자리에 임명한 결과 정사를 잘 처리했다는 고사가 있다. 당시기사(唐詩紀事)56

 

이원례(李元禮)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인 이응(李膺)을 말한다. 원례는 그의 자. 이응은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에 걸쳐 진번(陳蕃두무(竇武) 등과 함께 발호하는 환관들을 없애려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당인(黨人)으로 몰려 동지(同志) 백여 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후한서(後漢書)卷六十七

 

이원반곡(李愿盤谷)

이원은 당() 나라 사람인데, 그가 반곡에 은거하려 할 때 한유(韓愈)가 그를 송별하였는바, 자세한 것은 한유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에 나타나 있다.

 

이원법부(梨園法部)

왕궁(王宮)의 교향악단을 말한다.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12

 

이원제자(梨園弟子)

이원은 배우(俳優)들의 기교(技巧)를 닦는 곳이고 제자란 곧 연극(演劇)하는 배우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 현종(唐玄宗) 때 장안(長安)의 금원(禁苑) 안에 있는 이원에서 제자 3백 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가르쳤던 데서 연유된 것이다.

 

이위(伊蔚)

부모가 죽은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소아(小雅) 육아(蓼莪)더부룩한 다북쑥 자라니 다북쑥이 아니고 제비쑥이네 애통할사 부모님이여 날 낳고 고생하셨네[蓼蓼者莪 匪莪伊蔚 哀哀父母 生我勞瘁].”라고 하였다.

 

이위(李魏)

이정(李靖)과 위징(魏徵)을 말한다. 이정은 당대(唐代) 초기의 군사가(軍事家)로 병법에 뛰어나 전공(戰功)을 여러 차례 세웠으며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위징은 당대 초기의 대신으로 태종(太宗) 때에 이백 여 가지의 사안을 간언하였고 태종의 총애가 깊어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이유(李劉)

() 나라 사람으로 자는 공보(公甫), 호는 매정(梅亭). 벼슬은 중서사인(中書舍人)과 보장각 대제(寶藏閣待制)를 지냈고, 저서에는 사륙표준(四六標準)이 있다.

 

이유(夷猶)

망설이는 모양, 주저하는 모양이다.

 

이유(夷維)

지금의 산동성 고밀현(高密縣)이다.

 

이유(二酉)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대유(大酉)와 소유(小酉) 두 산에 동굴이 있어 그 동굴 안에다 고서(古書) 일천 권을 넣어 두었는데, 전하여 장서(藏書)가 많다는 뜻으로 쓰인다. 군국지(郡國志)

 

이유염매(爾惟鹽梅)

서경(書經)』 「열명(說命)내가 술이나 단술을 만들려고 할 때에는 그대가 누룩이 되어 주고, 내가 국을 끓이려고 할 때에는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若作酒醴 爾惟麴蘗 若作和羹 爾惟鹽梅]”라는 말이 있다.

 

이육(二陸)

두 육씨로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를 말한다. 진서(晉書)』 「육기전(陸機傳)육기의 자는 사형(士衡)이요, 오군(吳郡) 사람인데, 오가 멸망하자 아우 운과 함께 낙()에 들어갔다. 장화가 본래 그들의 명성을 존중하여 오를 정벌해서 두 인재를 얻었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이윤(伊尹)

() 나라 () 임금의 현신(賢臣). 그는 탕임금을 도와 왕천하(王天下)하게 하였다. 이름은 지()이다. 탕을 도와 하걸(夏桀)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재상이 되었다. 탕이 죽은 뒤에 그의 손자 태갑(太甲)이 은탕의 제도를 파괴하자 이윤이 동궁(桐宮)으로 축출하였다가 3년이 지나자 맞아들여 복위시키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서경(書經)

 

이윤성지임(伊尹聖之任)

자임(自任)은 천하로써 자기의 책임으로 삼는 것으로, 맹자(孟子)』 「만장(萬章)백이(伯夷)는 성인 가운데 청()한 자이고, 이윤은 성인 가운데 자임한 자이며,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가운데 화()한 자이고, 공자는 성인 가운데 시중(時中)인 자이다.”라 하였다.

 

이윤신경(伊尹莘耕)

() 임금이 이윤을 신야(莘野)에서 발탁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이율(而栗)

김치관(金致寬)의 자()이다.

 

이율배반(二律背反)

두 가지 규율이 서로 반대된다. 서로 모순되는 명제(命題). 즉 정립(定立)과 반립(反立)이 동등의 권리를 가지고 주장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은(吏隱)

옛날에 사대부(士大夫)들은 항상 미관말직(微官末職)을 스스로 이은이라고 일컬었는데, 낮은 지위에 숨어 있다는 뜻이다.

초야에 숨는다는 야은(野隱)의 대칭으로, 관직에 있으면서도 은자(隱者) 같은 생활을 하며 이록(利祿)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은(吏隱)

현인(賢人)이 직무가 번잡하지도 않고, 명예도 없고 책임이 중하지도 않은 낮은 관리의 자리에 숨어산다는 뜻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완화계 속에 꽃이 사뭇 웃으니, 이은 이름 겸한 나를 믿어줄는지[浣花溪裏花饒笑 肯信吾兼吏隱名]”라고 하였다.

 

소은(小隱)

중은(中隱)

대은(大隱)

산수(山水)

리은(吏隱)

성시(盛市)

 

 

이의(二儀)

천지(天地)를 가리키기도 하고, 일월(日月)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의분청탁(二儀分淸濁)

삼국 시대 위() 나라 조식(曹植)의 글에 태극이 이의를 정함에, 청탁이 비로소 드러났네[太極定二儀 淸濁始以形].”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의는 천지(天地)를 가리킨다. 조식집(曹植集)3 유한행(惟漢行)

 

이의인(二儀人)

이의(二儀)는 음양(陰陽)을 이르는 말로, 즉 남성과 여성의 생리를 겸한 중성의 사람을 가리킨 말이다.

 

이이(李珥)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으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이(李耳)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고현(苦縣) 사람으로 도가(道家)의 시조(始祖)가 된 노자(老子)의 이름이다.

 

이이(施施)

기뻐하는 모양

(오가는 것이) 느릿느릿한 모양

즐거워하는 모양

득의양양한 모양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이이(爾爾)

그렇다고 동의하는 말

이와 같음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이이(咿咿)

돼지의 우는 소리, 각적 따위를 부는 소리, 벌레 우는 소리, 닭이 우는 소리.

 

이이(已已)

말하는 모양.

 

이이(伊伊)

벌레 우는 소리.

 

이이(怡怡)

즐거워하는 모양, 기뻐하는 모양.

 

이이(暆暆)

해가 서쪽으로 서서히 기우는 모양.

 

이이(茸茸)

(풀이나 머리털이) 가늘고 부드럽다

여리고 부드럽다. / 인용: 山有花女歌(최성대)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제어(制御)한다. 한 적(상대)을 이용하여 다른 적(상대)을 제어하는 것.

 

이인(里仁)

논어(論語)』 「이인(里仁)마을은 인을 미로 삼나니 가려서 인에 처하지 아니하면 어찌 지혜라 하리오[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智].”라고 하였다.

 

이인동심기리단금(二人同心其利斷金)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으로 쇠도 자를 수 있다. 마음을 합하면 강해진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유의어: 이인동심(二人同心)

 

이인로(李仁老)

고려 명종(明宗) 때의 학자로 해좌칠현(海左七賢)의 한 사람. 미수(眉叟)는 그의 자이다.

 

이임(里任)

조선 시대, 지방의 동리에서 호적에 관한 일과 그 밖의 공공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을 말한다. / 인용: 軍丁歎(정민교)

 

이임보(李林甫)

() 나라 간신(奸臣)으로 현종(玄宗) 때 정승이 되어 19년 동안 정치를 탁란(濁亂)하게 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다.

 

이자(李資)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진 이귀(李貴)의 친형이다.

 

이자(李耔)

중종(中宗) 때 사람으로, 우참찬을 지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걸려서 파직된 뒤에 음성(陰城), 충주(忠州) 등지에 살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자(二子)적송자와 왕자교.

 

이자노노(二子呶呶)

() 나라 완적(阮籍)이 지은 주덕송(酒德頌)술 먹는 사람이 취해서 모든 것을 파탈하고 누워 있으면 벼슬하는 선비(縉紳處士)와 귀골의 집 젊은 사람(貴介公子)들은 그 취한 사람을 시비하고 비방한다.”고 하였으니, 두 사람이란 그 선비와 젊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자릉(李子陵)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의 아들로 연천군(延川君)에 봉해진 이경엄(李景儼)을 가리킨다. 자릉은 그의 자()이다.

 

이자문(李子文)

자문(子文)은 이상질(李尙質)의 자()이다. 인조(仁祖) 10년에, 인조가 사친(私親)을 추숭(追崇)하려 하는 것을 극간(極諫)하다가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이자시(李子時)

자시(子時)는 이민구(李敏求)의 자이며, 호는 동주(東州)이다. 이수광(李晬光)의 아들이다.

 

이자어고죽(二子於孤竹)

주 무왕(周武王)이 상() 나라를 치는 것을 간하다가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굶어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이자현(李資玄)

고려 시대의 문인. 이자연(李子淵)의 손자이다. 문과 급제하여 대악서 승(大樂署丞)을 지내다가 선종(宣宗) 때 벼슬을 버리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주람하던 중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이르러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치고 선학(禪學)에 심취하였다. 고려 예종이 그를 누차 부르자, 그는 나가지 않고 표()를 올려 사양하기를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以鳥養鳥 庶無鐘鼓之憂 觀魚知魚 俾遂江湖之性].”라 하고 끝내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고봉속집(高峯續集)卷二

 

이잠근숙계(珥簪勤夙戒)

이잠은 여자의 귀고리와 머리 장식. () 나라 선왕(宣王)이 후부인(后夫人)과 사랑에 빠져서 날이 늦어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강후(姜后)가 귀고리와 머리 장식을 풀고 죄를 청하면서 간했다고 한다.

 

이장(弛張)

활을 늦추고 당김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이 문무겸전(文武兼全)하고 융통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예기(禮記)잡기(雜記)한번 당기고 한번 늦춤은 문무의 도이다[一張一弛 文武之道也]”라고 하였다.

 

이장경(李長庚)

당대 시인 이백(李白)이다. 이양빙(李陽冰)의 초당집·(草堂集序)의 이백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된 것에 의하면, 이백의 어머니가 이백을 낳으려 할 때 장경(금성)이 꿈에 들어와서 낳았으니 이름을 이라 하고 태백을 그의 자로 하였다[長庚(金星)入夢, 故生而名白, 以太白字之].”라고 하였다.

 

이장곤(李長坤)

우찬성으로 있던 중에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에게 속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으나, 그들의 목적이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을 없애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였다가, 심정 등의 미움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이장군(李將軍)

() 나라의 이광(李廣)을 가리킨다. 무제(武帝) 때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부임하자 흉노가 두려워하여 비장군(飛將軍)이라고 일컬으면서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기(史記)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이장길(李長吉)

()의 종실(宗室)로서 이름은 하(), 장길(長吉)은 그의 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다. 저서에는 창곡집(昌谷集)이 있다.

 

이재(彝齋)

송 나라 말기의 은사(隱士) 조맹견(趙孟堅)의 호이다.

 

이정(里正)

이임(里任)이란 말로 유의어로, 지방 마을의 공공사무 및 연락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5()를 통()으로 하여 5통에 이정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인용: 哀絶陽(정약용)

 

이정기(李正己, 732781)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의 유민으로 본명은 회옥(懷玉)이며, 당나라 평로(平盧)에서 출생하였다. 778(대력 13) 중국의 속적으로 바꿨다. 당나라의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로서 안사(安史)의 이후 산동지역 일대를 장악하여 중앙권력의 통제권에서 이탈했으며 국왕처럼 행세하였다.

 

이정암(李廷馣)

자가 중훈(仲薰)이고 정형(廷馨)의 형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아우 정형과 함께 선조(宣祖)를 호종하였다. 개성(開城)에 이르러 수비에 임했다가 뒤에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로 가 의병을 모집하고 초토사(招討使)에 임명되어 연안(延安)에서 왜군 3천여 명을 포위, 대첩을 거두었다. 뒤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모셔졌다. 지상집략(誌狀輯略)

 

이정암(以酊菴)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는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일본측 승려가 거주하는 사찰. 또는 그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이정적막(鯉庭寂寞)

아버지가 돌아간 뒤라서 아버지의 교훈을 들을 길이 없음을 탄식한 말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홀로 서 있을 때 아들 이()가 뜰을 지나자(過庭), 공자가 묻기를 너는 시()를 배웠느냐?”고 하니, 이가 못 배웠습니다.”고 대답하자, 공자가 ()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므로, 이가 물러 나와 시()를 배웠다는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

 

이정전(李程甎)

() 나라 때 한림청사(翰林廳舍) 앞 계단에 벽돌길이 있었는데, 겨울철이면 해그림자가 그 다섯 번째의 벽돌에 이르는 때가 학사(學士)들의 입직 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림 학사 이정(李程)은 성품이 게을러서 항상 해그림자가 여덟 번째의 벽돌에 이르렀을 때야 입직을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당시 이정을 팔전학사(八甎學士)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서(唐書)卷一百三十一

 

이정치국기용병(以正治國奇用兵)

정도(正道)로 치국하고 기변(奇變)으로 용병한다. 도덕경(道德經)57에 나오는 말이다.

 

이제(夷齊)

백이(伯夷숙제(叔齊).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백이·숙제는 무왕(武王)에게 천자인 주()를 치는 것은 불의(不義)라고 간하였고 뒤에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자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굶어 죽었다.”고 하였다.

 

이제묘(夷齊廟)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사당. 백이숙제는 은() 나라 말기의 의사(義士)로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은 현재의 하북성(河北省)과 열하성(熱河省) 부근에 있었다.

 

이제영(李濟永, 1799~1871)

자는 내홍(內洪), 호는 동아(東阿). 영조 때 활동한 시인으로,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조(梨棗)

신선이 먹는 과일 즉 선약(仙藥)인 교리(交梨)와 화조(火棗)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신선이 도를 얻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조(吏曹)

조선 시대 이조에서는 문관(文官)의 전형(銓衡)을 맡았다.

 

이조양조(以鳥養鳥)

바닷새(海鳥)의 앞에서 종과 북으로 음악을 아뢰니 새가 걱정하였다.”는 말이 장자(莊子)』 「지락(至樂)에 나온다. 그것은 새를 새로 대접해야지,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은 새에게는 합당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조지광영(二鳥之光榮)

한유(韓愈)의 글에 탄이조부(嘆二鳥賦)가 있는데, 길을 가다가 임금에게 바치려고 가져가는 새 두 마리를 보고서 저것은 새로되 임금의 앞에 가는 광영을 누리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조홍문록(吏曹弘文錄)

이조 낭관(吏曹郎官)이 옥당(玉堂)을 선임(選任)할 때, 추천된 사람 가운데 제일 훌륭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후임자로 자천하는 것이다.

 

이존욱(李存勗, 885~926)

오대(五代) ()을 세운 임금으로서 처음에는 효용(驍勇)이 무쌍하여 당적할 자가 없었으나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 정치를 형편없이 하였는데, 반란을 진압하러 직접 나갔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오대사(五代史)卷四

 

이종청회성이위(移種淸淮性已違)

청회(淸淮)는 청수(淸水)와 회수(淮水), 귤나무를 청수와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한다.

 

이주(耳周)

노자(老子)장자(莊子)를 가리킨다. 노자는 이름이 이이(李耳)이고, 장자는 이름이 장주(莊周)이다.

 

이주가(伊州歌)

() 악부(樂府)로서 이천(伊川)의 수령 범중윤(范仲胤)의 처가 지었다는 노래인데 객지로 떠난 남편이 오래 돌아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 것이다.

 

이주곡(伊州曲)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서량 절도사(西涼節度使) 개가운(蓋嘉運)이 바쳤다는 상조 대곡(商調大曲)인데,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늙어 가는 시름을 어떻게 풀까 생각하다, 소옥에게 이주곡을 새로 부르게 하였다네[老去將何散老愁 新敎小玉唱伊州].”라는 구절이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8 伊州

 

이주곡(伊州曲)

의주곡과 양주곡(涼州曲)은 당() 나라 때에 주로 기생들이 부르던 풍류 곡조이고, 소소곡(簫韶曲)은 정중한 순 임금의 음악이다.

 

이주곡(伊州曲)

일명 이주령(伊州令). 노래 이름. 범중윤(范仲胤)이 상주(相州) 녹사(錄事)로 있으면서 오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지어서 붙인 가사라고 한다. 고금사어(古今詞語)

 

이주행객(伊州行客)

부부(夫婦) 사이의 그리움을 나타낸 뜻이다. 범중윤(范仲胤)이 이천(伊川)의 영()으로 있으면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가사를 지어서 보냈는데 그를 일러 이주령(伊州令)이라 명명했다. 고금사화(古今詞話)

 

이준(彝尊)

종묘의 제향에 쓰는 주기(酒器),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룡화충(山龍華蟲)이 새겨져 있었다.

 

이중(二仲)

세상의 명리(名利)를 피해 숨어살았다는 양중(羊仲)과 구중(求仲)을 가리킨다. () 나라 장후(蔣詡)가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정원에다 세 개의 오솔길을 만들어 놓고는 오직 양중과 구중 두 사람과 함께 왕래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삼보결록(三輔決錄)

 

이지(李志)

옛날 글씨를 잘 썼던 사람이나 인품이 워낙 모자라서 글씨가 후세에 전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후위(後魏) 사람으로 박학다재(博學多才)하였는데,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다가 건의(建義) 초에 반기(叛旗)를 들고는 양() 나라로 도망쳐 들어갔다. 위서(魏書)49>

 

이지(李禔, 1394~1462)

조선 태종(太宗)의 세자 지(). 양녕대군(讓寧大君)이다.

 

이지(梨旨)

하양(河陽)의 고호이다. 이지는 본시 영주(永州)의 이지은소(梨旨銀所)인데 고려 말에 승격하여 현을 만들어 영주에 소속시켰다가 이 태조(李太祖) 때에 폐현이 되고 화양으로 소속되었다.

 

이지측해(以指測海)

손가락을 가지고 바다의 깊이를 잰다. ()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진서(李珍書)

이진(李珍)본초강목(本草綱目)을 찬한 명() 나라 이시진(李時珍)을 이른다. 본초강목에서 농어를 아주 훌륭한 고기로 소개해 놓았기 때문에, 이전에 하찮게 여겼던 농어를 새삼 귀중히 여기게 되었다.

 

이징(李澄)

화가로, 안견(安堅)풍의 착색화(着色畫)를 많이 그렸다.

 

이책인지심책기(以責人之心責己)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어라.

 

이척(伊陟)

() 나라 이윤(伊尹)의 아들로서 태무 때의 현상(賢相)이다.

 

이천(伊川)

() 나라의 대유(大儒)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이천은 진강(進講)할 때마다 엄숙한 자세로 풍간(諷諫)을 하면서 국자감(國子監)에서 벼슬을 마쳤다.

 

이천(二天)

은인(恩人)을 말한다. 사람은 항상 천은(天恩)을 입고 사는데, 하늘 이외에 다시 인간의 은혜가 있음을 의미한다.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에 소장(蘇章)이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었는데, 그 친구 청하 태수(淸河太守)가 탐장(貪藏)한 사실을 조사할 때 태수에게 술을 청해 마시며 매우 좋은 기색으로 했다. 태수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남들은 한 하늘이 있는데 나는 두 하늘이 있다.”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이천견피발(伊川見被髮)

() 나라 대부인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을 지날 적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들판에서 제사 지내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백 년이 채 못 가서 오랑캐의 땅이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진() 나라와 진() 나라가 육혼(陸渾)의 오랑캐 부족을 이천으로 옮겨 살게 했던 고사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僖公 22

 

이천석(二千石)

태수(太守)의 이칭(異稱). () 나라 때 태수의 녹(祿)이 이천석이었으므로 이르는 말인데, 전하여 지방장관(地方長官)의 뜻으로 쓰인다.

 

이천장(李天章)

천장은 이명한(李明漢)의 자()이다.

 

이천피발(伊川披髮)

장차 오랑캐 나라가 될 징조. () 나라 대부(大夫)인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을 지나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들에서 제사 지내는 자를 보고서는 말하기를 앞으로 1백 년이 못 가서 이 땅이 오랑캐의 점령지가 될 것이다. ()가 먼저 없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좌씨전(左氏傳)僖公 二十二年

 

이청련(李靑蓮)

청련(靑蓮)이백(李白)이 출생한 고향 이름으로 그 후 이백의 별호로 불렸다.

 

이초(麗譙)

성곽 위의 높은 파수대이다.

 

이초(珥貂)

옛날 시중(侍中상시(常侍) 등의 관에 장식으로 꽂았던 담비 꼬리(貂尾) 장식이다.

 

이총환(耳聰患)

() 나라 때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 사()가 늘그막에 귀가 너무 잘 들리는 병이 있어, 와상 밑에 개미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는 이를 소가 싸운다고 말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晋書)卷八十四

 

이춘경(李春卿)

춘경은 이규보(李奎報)의 자()이다.

 

이충(移忠)

이효위충(移孝爲忠)’의 준말이다. 부모를 떠나 벼슬하는 사람은 효()를 옮겨서 충()을 하여야 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충(泥蟲)

남해(南海)에서 생산되는데, 뼈가 없으며, 물이 있으면 활동을 하지만, 물이 없으면 취하여 진흙처럼 가만히 있다 한다. 그러므로 술에 취하여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한다. 이물지(異物志)

 

이충설(二蟲說)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조그만 매미와 비둘기가 어찌 큰 붕새의 뜻을 알겠느냐.”라고 한 논설을 말한다.

 

이충잡채(李冲雜菜)

광해조에 이충이란 자는 잡채로써, 최관이란 자는 국수로써 광해군에게 때마다 진상하여 아부함으로써 높은 벼슬을 얻게되자 당시 사람들이 기롱하여 부른 말이다.

 

이충정(李忠定)

충정(忠定)은 송() 나라 이강(李綱)의 시호이다. 그는 금()과의 관계에서 강경론자로 항전(抗戰)을 주장하고 천도(遷都)를 반대하였으며, 남송(南宋)의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겸 중서시랑(中書侍郞)이 되어 반대파를 논죄하고 가까운 자를 등용하여 항전 태세를 갖추었으나, 75일 만에 해임되어 자리를 떠났다.

 

이측아차대질신(離昃俄嗟大耋身)

원로의 죽음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이괘(離卦)구삼효(九三爻)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상이니, 질장구를 치며 노래하지 않으면 대질의 탄식이 있게 된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라 하였다.

 

이측하상(離昃何傷)

생사(生死)의 도리를 알아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이괘(離卦)구삼효(九三爻)서산에 해가 기우는 형상이니, 질장구 치고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이는 노년을 한탄함이니, 흉하도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라고 하였다.

 

이칙(夷則)

본디 악기의 고저청탁을 분별하는 12율 가운데 하나인데, 12율을 12개월에 붙였을 때 이칙이 7월에 해당한다 하여 7월을 말한다.

임종(林鐘)과 함께 각각 십이율(十二律)중의 한 가지 명칭이다.

 

이태(李兌)

전국 때 조나라의 대신이다. 무령왕이 작은아들 공자하(公子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태를 태부에 임명했다. 공자하가 조효성왕이다. 무령왕이 조나라를 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낸 안양군(安陽君) ()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태의 반격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무령왕이 묵고 있던 사구궁(沙邱宮)으로 도망쳤다. 그의 뒤를 추격하여 사구궁으로 진입한 이태는 공자장을 잡아서 죽였으나 그 후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구궁을 포위하여 무령왕마저 굶겨 죽였다. 효성왕은 이태를 사구(司寇)에 임명하여 조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이태금동잠(異苔今同岑)

곽박(郭璞)의 증온교시(贈溫喬詩)人亦有言 松竹有林 及爾臭味異苔同岑이라 하였는데, 지금 동지(同志)의 벗을 태잠이라 하는 것은 그에 근본한 것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

마지막 궁지에 몰린 상황을 말하는 이판사판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합성어이다. 이판은 참선, 경전 공부, 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은 절의 산림(山林)을 맡아 하는 스님이다. 산림이란 절의 재산 관리를 뜻하는 말인데 산림(産林)이라 쓰기도 한다. ‘살림을 잘한다에 쓰이는 살림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조선조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계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조선 시대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국교로 세우면서 스님은 성안에 드나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조에서 스님이 된 것은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그것은 마지막이 된 것이었고, 끝장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막다른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팔(二八)

2 X 8=16.

 

이편개전(以偏槪全)

이는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개괄해 버리는 오류이다.

 

이포새(伊蒲塞)

불교(佛敎) 용어, 오계(五戒)를 받은 남자 중을 이른다.

 

이포역포(以暴易暴)

폭력으로 폭력을 다스린다는 말로, 정치를 함에 있어 덕()으로 하지 않고 힘()으로 다스린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이포찬(伊蒲饌)

중이 먹는 음식을 말하는데, 서언고사(書言故事)』 「석교류(釋敎類)() 올리는 음식을 이포찬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피(離披)

흩어지고 떨어짐을 말한다.

 

이필(李泌)

당 나라 경조(京兆) 사람으로, 자는 장원(長源)이다. 현종(玄宗숙종(肅宗대종(代宗덕종(德宗) 때 조정에 계속 벼슬살이하여 재상까지 지내는 동안 여러 번 권신(權臣)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슬기로써 화를 면하였다.

 

이필귀산(李泌歸山)

()의 이필(李泌)이 재주가 대단하고 박식하였는데, 평소에 신선(神仙) 방술을 사모해오다가 현종(玄宗)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동궁(東宮)을 보좌하여 동궁으로부터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나 양국충(楊國忠)의 미움을 사 영양(穎陽)에 가 숨어살았다. 그 후 숙종(肅宗대종(代宗덕종(德宗) 대에 걸쳐서도 부름을 받고 나왔다가 곧 은거(隱居)하였다. 당서(唐書)卷一百三十九

 

이필영표(珥筆英標)

사관(史官)의 직책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말이다.

 

이하(李賀, 791~817)

() 나라 문장가로 자()는 장길(長吉)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다.

 

이하(夷夏)

중국 이외의 지역을 말하며, 하는 중국을 가리킨다. 곧 문명(文明)과 비문명(非文明).

 

이하경(李下徑)

() 나라 때 이애(李乂)가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어 인재 전형의 일을 맡았을 적에 청알(請謁)이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도리는 말이 없으나 그 밑에 절로 길이 난다[桃李不言 下自成蹊]’는 고사에 견주어 말하기를 오얏 아래에 좁은 길이 없다.(李下無蹊徑)”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오얏()은 곧 이애(李乂)의 이씨를 비유한 것이다.

 

이하방(圯下方)

() 나라의 개국공신 장자방(張子房)이 한 노인의 신발을 다리 밑(圯下)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은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55 유후세가(留侯世家)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로 쓰인다. / 유의어: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이합시(離合詩)

한자(漢字)의 자획을 서로 떼어 맞추어서 새로운 글자로 조합해 짓는 시를 말한다. 예를 들어 본문 첫 구에 나오는 에서 을 취하고 에서 을 취하여 이라는 글자를 조합해 내는 것을 말한다.

 

이합집산(離合集散)

이합(離合: 헤어짐과 모임)과 집산(集散: 모임과 흩어짐). 헤어졌다가 모였다가 하는 일.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63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허(李詡)

명 나라 학자. 자는 후덕(厚德), 호는 계암산인(戒庵山人). 저서에는 조야의 전고(典故)와 시문 등을 기록한 계암만필(戒庵漫筆)8권이 있다.

 

이험(夷險)

평탄함과 험난함으로 세상사의 우여곡절을 말한다.

 

이현령 비현령(耳懸令 鼻懸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음을 이른다.

 

이현보(理縣譜)

남제(南齊) 때 부염(傅琰)이 산음령(山陰令)으로 있으면서 매우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에서 신명(神明)으로 일컬어졌는데, 그의 부자(父子)가 똑같이 산음현을 잘 다스렸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부씨(傅氏) 집안에는 고을 다스리는 문서(理縣譜)가 있어 자손이 대대로 전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남제서(南齊書)·卷五十三

 

이협(梨頰)

미인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호전(胡銓)이 해외(海外)로 폄척되었다가 북으로 돌아가던 날에 상담(湘潭)의 호씨원(胡氏園)에서 술을 마시면서 지은 시에 임금 은혜로 이렇게 돌아와 한번 취하노니 곁에 있는 이천은 보조개가 예쁘기도 하여라[君恩許歸此一醉 傍有梨頰生微渦]”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협(梨頰)의 이()는 곧 시기(侍妓) 이천을 말한 것이다

 

이형(李衡)

() 나라 양양(襄陽) 사람인데, 그가 단양 태수(丹陽太守)로 있을 적에 감귤(柑橘) 1천 그루를 심었다.

 

이형거인천류창(羸形去認泉流漲)

두목(杜牧)이 국기(國棋)인 왕봉(王逢)을 전별한 시에 엉성한 형체는 남몰래 봄 샘이 흐르듯 한다.”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는 곧 바둑을 처음 놓을 때의 형체를 묘사한 것이다.

 

이혜(夷惠)

백이(伯夷)유하혜(柳下惠)의 병칭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백이는 성()의 청()한 자이고, 유하혜는 성()의 화()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이혜간(夷惠間)

이혜는 백이(伯夷)유하혜(柳下惠)의 병칭(倂稱)인데,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백이는 청()하기로 성인(聖人)이고, 유하혜는 화()하기로 성인이었다.”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이호(二豪)

두 호걸. 귀개공자(貴介公子)와 진신처사(縉紳處士)를 말한다. 유백륜(劉伯倫)주덕송(酒德頌)옆에 있는 두 호걸을 마치 작은 벌레같이 본다.”고 하였다.

 

이호미(履虎尾)

주역(周易)』 「이괘(履卦)육삼효(六三爻)호랑이 꼬리를 밟아 호랑이에게 물리니 흉하다[履虎尾 咥人 凶].”는 말이 나온다.

 

이호민(李好閔, 1553~1634)

자는 효언(孝彦)이고 호는 오봉(五峯)이다.

 

이호시측유명령(二豪侍側猶螟蛉)

() 나라 유령(劉伶)주덕송(酒德頌)술 취한 대인 선생(大人先生) 옆에 두 호걸이 모시고 섰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나니벌[蜾蠃]과 배추벌레[螟蛉] 같았다.”는 말이 있다.

 

이홍(泥鴻)

본디 돌아가는 기러기가 다시 올 때의 목표로 눈 녹은 진흙 위에 남겨둔 발자국이, 다시 돌아올 때에는 형적이 없어 찾을 길이 없게 된다는 설니홍조(雪泥鴻瓜)에서 온 말로, ‘과거의 사적이 흔적도 남지 않고 없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분류동파시(分類東坡詩) 16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인생살이 가는 곳은 알괘라 어떠한고, 눈녹은 물을 밟은 기러기와 흡사하리. 눈 위에 우연하게 발자국을 남긴 뒤에, 기러기 날아가면 동서쪽을 어찌 알리[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홍반(二紅飯)

원래 대맥(大麥)과 소홍두(小紅豆)를 섞어서 지은 밥을 말한다.

 

이홍유적(泥鴻遺跡)

분류동파시(分類東坡詩) 16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인생살이 이르는 곳 무엇과 비슷한고 나는 기럭 눈 진펄 밟는 것과 같으리니 진펄 위에 우연히 발톱자국 남긴 뒤에 기럭 날아가버리면 동서를 어찌 분간하리[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瓜 鴻飛那復計東西]”에서 나온 것으로, 현재 함께 어울려 즐기는 일이 나중에 허무하게 흔적만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화(籬花)

국화꽃을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음주(飮酒)동쪽 울 아래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도연명집(陶淵明集)3

 

이화감(離和坎)

불과 물. 양생(養生)의 요체(要諦)는 수화(水火), 음양(陰陽)의 배합에 있다.

 

이화노제(里化魯齊)

고을이 학덕에 감화되어 강태공(姜太公)의 제() 나라와 주공(周公)의 노() 나라처럼 풍속이 아름답게 되었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제 나라가 한번 변하면 노 나라 경지에 이르고 노 나라가 한번 변하면 도()에 이를 것이다[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라고 하였다.

 

이화무(梨花舞)

이화(梨花)는 옛날 창법(槍法)의 한 가지이다. 삼재도회(三才圖會) 기용(器用) 이화창식(梨花槍式)() 나라 이전(李全)이 이 법을 활용하여 산동에서 영웅노릇을 했다.”는 말이 있다.

 

이화정(李和鼎)

화정(和鼎)은 당()의 시어사(侍御史)였던 이감(李甘)의 자()이다. 그는 무척 정직하였는데, 교활한 정주(鄭注)가 재상되기를 구하자 이감은 재상은 첫째 덕망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문예가 있어야 하는데, 정주가 어떤 사람인데 재상을 구한단 말인가. 만일 그에게 임명장이 내리면 찢어버리겠다.”고 하였다. 그 후 과연 정주에게 임명되므로 이것을 찢었다가 죄를 얻어 좌천되었다. 신당서(新唐書)』 「이감전(李甘傳)

 

이화창(梨花槍)

() 나라 양업(楊業)이 창시한 창법(槍法)의 이름인데, 그가 거란(契丹)의 대군에게 포로로 잡힐 적에 “20년 동안 이화창으로 천하무적이었으나 지금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 버렸으니 어떻게 버텨 볼 길이 없다[二十年梨花槍 天下無敵手 今事勢已去 撑拄不行]”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송사(宋史)叛臣傳 下, 李全 下

 

이환(泥丸)

지세(地勢)가 험준하여 강토를 지킬 만한 요새를 말한다. 후한(後漢) 왕망(王莽) 말기에 외효(隗囂)의 장수 왕원(王元)하나의 흙덩어리를 가지고 가서 대왕을 위해 함곡관을 봉해 버리겠다.(元請以一丸泥 爲大王 東封函谷關)”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13

 

이환도내동(夷歡道乃東)

기자는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그가 우리나라에 오자 성인의 도가 퍼졌음을 말한 것이다.

 

이황(蜊蝗)

석화(石花)를 가리키는 말. 곧 굴조개를 말한다.

 

이황(李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효위충(移孝爲忠)

효경(孝經)14군자는 어버이에 대해 효성을 다 바치기 때문에, 나라에 대해서도 그처럼 충성을 다 바칠 수 있는 것이다[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李侯)

()는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서남의 고을이다.

 

이후주(李後主)

오대(五代) 때 남당(南唐)의 임금. 이름은 욱(), 자는 중광(重光).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다.

 

이흘(李忔)

인조 7(1629)에 진하사(進賀使)의 사명을 받고서 동지사(冬至使) 윤안국(尹安國)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 윤안국은 익사하고 그만 홀로 상륙하여 사신의 임무를 수행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 옥하관(玉河館)에서 죽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행장(行狀)

 

이희열(李希烈)

당 덕종 때 반란을 일으킨 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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