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삿갓은 없다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가탁이 대부분이다. 또 이들 희작시들은 기존 한시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리고 있고, 시의 소재 또한 당시 사설시조가 평시조에 대해 그랬듯이 비시적(非詩的) 대상을 시(詩)의 소재로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그럴듯한 표면 진술의 당의(糖衣)를 입혀, 이면에서 풍자와 해학을 겨냥하는 언문풍월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전통 한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들 희작의 파격시들은 시랄 것도 없는 희학질에 불과하다. 도대체 점잖은 선비가 할 짓은 못 되는 것이다. 시시덕거리고 키득키득대는 정서에 더 가깝다.
희작시는 보통 전승의 과정에서 복수성을 띠면서 부연 확장된다. 예를 들어 김삿갓이 어느 늙은이의 부고장에 ‘류류화화(柳柳花花)’라고 넉 자를 써 주었는데, 그 뜻은 훈으로 새겨 ‘버들버들(柳柳) 떨다가 꼿꼿(花花)이 죽었다’의 의미가 된다. 그러면 이것이 그 다음에 가면 ‘류류정정화화(柳柳井井花花)’로 부연된다. 즉 ‘버들버들 떨다가 우물우물 하더니 꼿꼿이 죽었다’는 것이다. 「흥부전」에서 놀부의 심술 가지 수가 이본에 따라 한없이 늘어나는 양태와 방불하다. 이런 말장난이 좀 더 세련된 시의 모양을 갖추면 새로운 한편의 희작시가 탄생된다.
世事熊熊思 人皆弓弓去 | 세상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들은 모두 다 활활 가는데, |
我心蜂蜂戰 我獨矢矢來 | 내 마음 벌벌 떨기만 하며 나 홀로 살살 오가는구나. |
言雖草草出 世事竹竹爲 | 말들은 비록 풀풀 뱉지만 세상일은 데데하기 그지없도다. |
心則花花守 前路松松開 | 마음을 꼿꼿이 지키면 앞길이 솔솔 열리리라. |
참으로 절묘한 말장난이다. ‘웅웅(熊熊)’이 ‘곰곰’이 되고, ‘궁궁(弓弓)’은 ‘활활’로 읽는다. ‘봉봉(蜂蜂)’이 ‘벌벌’로, ‘시시(矢矢)’가 ‘살살’이 된다. 대개 장난도 이쯤 되려면 이전부터 쌓여진 노하우가 있지 않고서는 안 된다. 김삿갓의 부고장이 극단에까지 이른 양상이다.
김삿갓은 없다. 언필칭(言必稱) 그의 시로 일컬어지는 시들은 김삿갓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시를 지으랴 싶은 것을 모두 주워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면 거의 실상에 가깝다. TV 광고에서 김삿갓이 죽장을 짚고 근엄하게 외치는 “백년도 못 되는 인생을 살면서, 천년의 근심을 지닌 채 살아가는 중생들아[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도 사실은 그의 시가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응수에 의해 김삿갓의 시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그가 세상을 뜬지 근 70년 뒤인 1939년의 일이다. 이응수는 이곳저곳에서 구전되던 김삿갓의 시 183편을 모아 상재하였다. 대부분이 전문(傳聞)에 의한 기록이고 보면, 그 진위(眞僞)를 헤아려 따진다는 것은 애초에 무망한 일이다. ‘최불암 시리즈’가 그렇고 ‘덩달이 시리즈’가 그렇듯이 극단적으로 말하면, 김삿갓의 시 또한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불특정 다수의 희작시들이 모두 그의 이름 아래 모인 것일 뿐이다. 김삿갓의 시로 알려진 다음 시를 보자.
是是非非非是是 |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옳음 아니고 |
是非非是非非是 |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옳지 않음 아닐세. |
是非非是是非非 |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 그름이 아닐진대 |
是是非非是是非 |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로구나. |
김삿갓의 「시시비비시(是是非非詩)」는 이미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것으로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에 소개되고 있다. 한마디로 시비(是非)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한 개판의 세상을 향한 야유다. 뿐만 아니라 김시습은 아예 한수 더 떠서 이런 구절도 남겼다.
同異異同同異異 | 다른 것 같다 하고 같은 것 다르다 하니, 같고 다름이 다르고 |
異同同異異同同 | 같은 것 다르다 하고 다른 것 같다 하니, 다르고 같음이 같구나. |
허후(許厚)도 그의 「시비음(是非吟)」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是非眞是是還非 | 참 옳은 것 시비하면 옳음도 그름 되니 |
不必隨波强是非 | 물결 따라 억지로 시비할 것 아닐세. |
却忘是非高着眼 | 시비를 문득 잊고 눈을 높이 두어야 |
方能是是又非非 |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할 수 있으리. |
다 비슷한 발상에서 나온 말장난들이다. 또 김삿갓이 문전축객 하는 주인을 풍자해서 지었다는 「인도인가(人到人家)」에 다음 구절이 있다.
人到人家不待人 | 사람이 사람 집에 왔는데 사람 대접 않으니 |
主人人事難爲人 | 주인의 인사가 사람 되기 어렵도다. |
매 구절마다 ‘인(人)’ 자를 세 번씩 썼다. 말장난의 기미가 농후하다. 이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 기준(奇遵, 1492~1521)의 시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人外覓人人豈異 | 사람 밖에서 사람 찾으니 사람이 어찌 다를 것이며 |
世間求世難同世 | 세간에서 세상을 찾으니 세상을 같이하기 어렵겠네. |
여기서는 인(人)과 세(世)를 각각 세 번씩 반복했다. 예전 시조에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하는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하던 말장난과 비슷하다.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이서구(李書九)가 만년에 은퇴하여 향리에 물러나 있을 때 일이다. 그가 허름한 베잠방이 차림으로 냇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경망한 선비 하나가 시내를 건너려다, “여보. 늙은이! 나를 좀 업고 건네게.” 했겠다. “그러시지요.” 하고는 젊은 것을 업고 시내를 건너는데, 이 친구 늙은이 등에 업혀 까닥까닥 냇물을 건너다보니 아뿔싸! 늙은이가 정승이나 할 수 있는 옥관자(玉貫子)가 하고 있지 않은가. 시골 무지랭이 늙은인 줄 알았다가 큰 경을 치르게 생겼다. 어쩔 줄 몰라 부들부들 떨다가 창졸간에 시내를 건넜는데, 경망한 선비는 좀 전의 서슬은 간데없이 난짝 꿇어앉아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죽을 죄를 빌었다. 그러자 이 의뭉스런 늙은이는 시를 한 수 읊어주고는 다시 건너가 모른 척 낚시질이다. 그 시에 이랬다. 외관으로 보아 육담풍월의 일종이다.
吾看世시옷 是非在미음 |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굳이 해석을 해보니 이렇다.
吾看世시옷 是非在미음 | 내가 세상의 ‘시옷’을 보니 시비(是非)가 ‘미음’에 있더라. |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 집에 돌아가 ‘리을’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디귿’에 점찍으리라. |
점점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시옷은 ‘인(人)’이요, 미음은 ‘구(口)’의 모양이다. 리을은 ‘기(己)’요, 디귿에 점을 찍으면 망할 ‘망(亡)’자가 된다. 이렇게 풀고서 다시 시를 읽으니 이렇게 된다.
吾看世人 是非在口 | 내가 세상 ‘사람’을 보니 시비(是非)가 ‘입’에 있더라. |
歸家修己 不然則亡 | 집에 돌아가 ‘몸’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망’하리라. |
경망한 선비에게는 활운(活訓)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김삿갓의 시로 둔갑이 되면서는 처음 1ㆍ2구가 슬쩍 바뀌고, 전후 이야기도 달리 윤색되었다.
腰下佩기역 牛鼻穿이응 | 허리 아래엔 ‘기역’을 차고 소 코에는 ‘이응’을 뚫었네. |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 집에 돌아가 ‘리을’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디귿’에 점찍으리. |
1구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무색하다. 소의 코뚜레를 잡고 허리에 낫을 차고 지나가는 떠꺼머리 총각을 묘사한 것이 1ㆍ2구라면, 3ㆍ4구는 박절하게 나그네를 타박하는 주인에게 쏘아붙인 독설이다. 자! 어느 것이 진짜 김삿갓이 지은 것인가?
현재 김삿갓의 시로 수록된 작품 속에서 역대 야담집이나 시화에 다른 사람의 시로 이미 소개된 것은 위의 예들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도 오늘날 김삿갓의 시로 믿고 있는 것이 어떤 경로로 정착되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영월 소재 김삿갓 묘를 발견하여 보고한 바 있는 박영국(朴泳國) 선생이 1987년 김삿갓의 삼회갑(三回甲)을 기념하여 전국에 김삿갓 유시(遺詩)를 공모했던 바, 무려 690수의 시가 제보되었는데 앞서 본 “세상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는 시도 이때 김삿갓의 시라고 제보된 것 중 하나이다. 이렇듯 김삿갓의 시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고 보면, 종내는 조선조에 노래된 모든 희작시가 김삿갓의 이름 아래 야권통합(?)을 이루고야 말 모양이다.
인용
2. 눈물이 석 줄
3. 김삿갓은 없다
5. 한시 최후의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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