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허공 속으로 난 길②
함축함으로 상상의 여지를 만들어낸 백광훈의 ‘홍경사’
다음은 조선 중기의 시인 백광훈(白光勳)의 「홍경사(弘慶寺)」란 작품이다.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 가을 풀, 전조(前朝)의 절 남은 비(碑), 학사의 글 |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 천년을 흐르는 물이 있어서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보네. |
이 작품을 다시 이렇게 배열해 보면 어떨까.
가을 풀
고려(高麗) 때 절.
남은 비(碑)
학사(學士)의 글.
천년(千年)을
흐르는
물이 있어서,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본다.
이미지의 배열이 박목월(朴木月)의 「불국사(佛國寺)」를 연상시킨다.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 안개
물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구름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소리
처음 1ㆍ2구에서 시인은 돌올(突兀)하게 가을 풀과 고려 때의 절, 남은 비석과 학사의 글을 제시한다. 각 단어의 사이에는 일체의 서술어가 생략되어 있어, 1구에서 시인이 가을 풀에 묻혀 버린 퇴락한 고려 때의 절을 말하려 한 것인지, 가을 풀처럼 보잘 것 없이 영락해버린 고려 때의 절을 말하려 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전자라면 ‘추초(秋草)’는 ‘전조사(前朝寺)’의 배경을 이루고, 후자라면 등가적 심상이 된다. 2구의 ‘비(碑)’와 ‘학사문(學士文)’의 관계도 그렇다. ‘잔비(殘碑)’는 동강나 굴러다니는 비석인데, 거기에 예전 이름난 학사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시인의 의도는 퇴락한 절과 굴러다니는 비석처럼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예전 명문의 허망함을 일깨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그 긴 세월 문장만은 아직도 빗돌에 남아 전함을 말하려는 것인가? 이 또한 명확치 않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시시콜콜히 갈라 따지는 것은 오히려 시의 총체적 이해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1ㆍ2구의 조응관계를 본다면 ‘추초(秋草)’와 ‘잔비(殘碑)’, ‘전조사(前朝寺)’와 ‘학사문(學士文)’이 각각 대응을 이룬다.
다시 여기에 3ㆍ4구가 이어진다. 천년을 흘러가는 물이 있고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이 있다. 이번엔 1ㆍ2구와는 달리 천년의 긴 세월과 저물녘의 한 때가 나란히 놓여짐으로써 1ㆍ2구의 대응관계는 3ㆍ4구에서는 대조의 관계로 전이된다. 물은 천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구름은 어떠한가. 그것은 언제나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변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닌가. 즉 3ㆍ4구는 천년과 하루에서 만이 아니라 물과 구름을 통해서도 대립의 관계가 형성된다. 4구의 ‘견(見)’의 주체는 누구인가. 시인 자신으로 볼 수도 있고, 천년을 흘러가는 물일 수도 있다. 주체를 시인으로 이해한다면 3ㆍ4구는 자연을 통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착잡한 심회를 노래한 것이 된다. 또 주체를 물로 이해한다면, 천년을 의연히 변치 않고 흐르는 물이 온갖 덧없이 변화해가는 것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음을 뜻하게 된다.
가을 풀은 여름날의 변화를 뒤로 하고 시어져 간다. 그 풀과 같이 예전의 영화를 뒤로 하고 퇴락한 절. 예전 학사의 명문을 새긴 비석에는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만 남았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이미 가고 없는데 그래도 글만은 아직 남았다. 천년을 쉼 없이 흐르는 물, 물은 흘러갔건만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 위에 해는 지고 구름은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간다. 한 해가 가고, 하루도 가고, 구름도 왔던 자리로 돌아가고, 인간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비석에 새겨진 글씨처럼, 흘러도 흘러도 그 자리에서 넘치는 강물처럼 모든 것은 또 그대로가 아니었던가.
위 시에서 서술관계가 생략됨으로 해서 발생되는 모호성(Ambiguity)은 일상적 언어에서처럼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는 양자택일의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결과적으로 시의 함축과 내포를 더욱 유장한 것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20자에 불과한 짧은 시인데 담긴 함축은 참으로 심장하다. 한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대목이다.
이상 세 편의 감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 시인이 글자로 말하고 있는 지시적 사실은 시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그런 울림이 아예 없거나 그런 떨림을 외면한 시는, 단청(丹靑)의 수식과 대중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에 지나지 않는다. 천진(天眞)에서 우러나오는 흥취(興趣)가 결여된 시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든다.
인용
3. 허공 속으로 난 길①
4. 허공 속으로 난 길②
6. 이명(耳鳴)과 코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