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말하지 않고 말하기
종래 시화에 보이는 한시 감상 태도는 세밀한 분석보다 총체적인 감상을 중시하여, 두 세 마디로 자신의 직관적인 느낌을 말하고 있을 뿐 논리적 분석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오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느낌을 갖게 되지만, 이는 그들의 문학 인식이 낮거나 구체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1920년대 이미지즘 시인 아치볼트 매클리쉬(Archibald MacLeish, 1892~1982)는 「시의 작법(Ars Poetica)」이란 시에서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고 하고, 또 “시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 A Poem shuold be equal to: Not true”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시의 언어는 직접 의미를 지시하는 대신 이미지를 통해 간접화된 방식으로 의경을 전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흔히 현대시에서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iative)의 이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서구시에서 이러한 시 언어에 대한 인식이 도입되는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이다.
그러나 한시에서 이러한 원칙은 이미 천 년이 넘는 문학적 전통 속에서 불변의 준칙으로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 이는 다시 말해 시인은 할 말이 있어도 직접 말하지 말고 사물을 통해 말하라는 것이다. 아니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것이다. 시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도 독자를 외롭게 만들어야 한다.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만약 시인이 나서서 직접 시시콜콜한 자기감정을 주욱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넋두리나 푸념일 뿐 시일 수는 없다.
返蟻難尋穴 歸禽易見巢 | 돌아가던 개미가 구멍 찾기 어렵겠고 돌아오던 새는 둥지 찾기 쉽겠구나. |
滿廊僧不厭 一個俗嫌多 |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네 싫어 않고 한 사람 속객만이 많음을 싫다 하네. |
「낙엽(落葉)」이라는 이 시는 무엇을 노래한 것인가. 개미는 왜 구멍을 찾지 못하며, 새는 둥지를 왜 쉽게 찾는가. 복도에 가득한데도 스님네가 싫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속객은 왜 이것이 많음을 싫어할까. 위 시는 정곡)鄭谷_이란 이가 낙엽을 노래한 것이다. 낙엽이 쌓이는 형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시의 모든 상황은 석연해 진다. 그러나 스물 여덟 자 어디에도 낙엽과 관계되는 말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落葉歸根] 이라 했다. 한 인연이 끝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낙엽만이 아니다. 우리네 인생도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스님네가 이를 싫어하지 않는다 함은 담긴 뜻이 유장하다. 그러나 길이 낯선 나그네는 온통 뒤덮인 낙엽 때문에 길을 잃을까 근심스럽다. 이러한 정황 속에 소조(蕭條)한 가을날의 풍경이 어느덧 가슴을 가득 메운다.
예전 송 휘종황제는 그림을 몹씨 좋아하여 시(詩)의 한 구절을 화제(畵題)로 주어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한 번은 “어지러이 솟은 산, 옛 절을 감추었네[亂山藏古寺].”란 구절이 화제로 제출되었다. 화가들은 어지러이 솟은 봉우리의 한 구석에 고색창연한 절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떤 사람은 절 지붕이 숲 사이로 얼핏 보이는 광경을, 어떤 사람은 숲 위로 솟아 오른 절의 탑을 그렸다. 그런데 정작 일등으로 뽑힌 작품에는 화면 어디에도 절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숲 아래 조그만 소로길이 나 있고, 그 길로 중 하나가 물을 길어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중이 물을 길어 올라가니 그 위 어디께엔가 분명 절이 있을 것이나, 산이 너무 깊어 보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절을 그리라 했는데, 절 대신 물 길러 나온 중을 그리는 것, 이것이 바로 말하지 않고 말하기이다.
銀燭秋光冷畵屛 | 은촉불 가을 빛은 병풍에 찬데 |
輕羅小扇搏流螢 |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디불을 치누나. |
天際夜色凉如水 | 하늘 가 밤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
坐看牽牛織女星 | 견우와 직녀성을 오두마니 바라보네. |
두목(杜牧)의 「추석(秋夕)」이란 시이다. 깊어 가는 가을 밤, 창을 열고 방 안으로 날아드는 반딧불을 부채로 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인이 있다. 가을밤의 애상적 분위기가 물씬한 작품이다. 그러나 시어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심층적 의미를 캐낼 수 있다. 우선 은촉불, 그림 병풍, 비단 부채 등은 넉넉한 경제적 형편을 말하여 그녀가 귀한 신분의 여인임을 보였다.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 부채는 여름날엔 없지 못할 소중한 물건이지만, 가을이 되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이 ‘가을 부채’는 그녀가 버림 받은 신세임을 말해준다. 한 때 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이제는 쓸모없이 잊혀진 그녀, 그녀의 창엔 반딧불이 날아들고 있다. 반딧불은 풀 더미 같은 황량한 곳에서 날아다닌다. 그 반딧불이 그녀의 방안까지 날아들고 있으니, 그녀의 거처가 매우 황량하고 생활이 처량함을 알 수 있겠다. 님이 찾지 않으니 그 꽃밭엔 잡초만이 우거져 있을 것이다. 또 그녀는 반딧불을 부채로 후려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물처럼 싸늘한 하늘은 밤이 어느 덧 깊었음을 말하며, 앉아서 별을 바라본다 함은 아예 그녀가 잠 잘 생각을 버리고 근심에 겨워 긴긴 가을밤을 새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보는 별은 무엇인가. 견우와 직녀성이다. 그들은 그래도 일년에 칠월 칠석 하루는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세는 어떠한가. 님은 한 번 떠나신 뒤로 돌아올 줄 모르고, 이 기나긴 기다림이 끝없이 이어져도 다시 님을 만날 날은 영영 올 것 같지가 않다. 이러한 초조감과 절망감이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위에 서리어 있다. 대개 시인은 이같이 진진한 사연을 단지 28자 안에 농축시켜 놓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내용을 시시콜콜히 다 이야기해 버린다면 여기에 무슨 여운과 함축의 울림이 남겠는가.
▲ 당인(唐寅), 「반희단선(班姬團扇)」, 16세기, 150.4X63.3cm,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둥근 부채를 손에 든 반첩여의 모습을 그렸다. 봉황 장식의 머리핀을 꼽고 먼 곳을 응시한다.
인용
2. 시마(詩魔)의 죄상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4. 말이 씨가 되어
5. 말하지 않고 말하기
6. 남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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