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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29. 시화, ‘행복한 시읽기’ - 4. 말이 씨가 되어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9. 시화, ‘행복한 시읽기’ - 4. 말이 씨가 되어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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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말이 씨가 되어

 

 

흔히 글은 바로 그 사람[文如其人].”이라는 말을 한다. 대개 시에는 그 사람의 기상이 절로 스며들게 되니, 그 시의 한 구절로도 그 사람의 궁달을 점칠 수가 있다. 이를 달리 기상론(氣象論)이라고도 한다. 옛 사람들은 언어의 힘을 믿었다. 우리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시화를 읽다 보면 의외로 이런 예화와 자주 접하게 된다. 비유가 조금 유감스럽긴 하지만, 예전 어느 가수가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라는 노래를 부르더니, 실제 그렇게 되고 만 것 같은 예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詩讖)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개 이는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됨을 경계한 것이다. 입에서 나온다고 해서 다 말이 아닌 것처럼, 생각도 없이 되는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내게 돌아오는 법이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우홍적(禹弘績)이란 이가 일곱 살에 어른이 ()’()’자로 연구(聯句)를 짓게 하니, 읊기를 늙은이 머리 위의 눈은, 봄 바람 불어도 녹지를 않네[老人頭上雪, 春風吹不消].”라 하였다.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으나 식자는 이를 보고 그가 요절할 것을 알았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머리 위에 눈이 삶의 근심이 가져다 준 얼룩이라면, 봄바람이 불어와 마땅히 이를 녹여 주어야 옳다. 그런데 그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이미 녹일 수 없는 삶의 근심을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한 것이다.

 

수촌만록(水村漫錄)에 보면 안명세가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진달래를 따서 연적에 끼워 놓고 시를 짓게 하니, 즉석에서 짓기를 진달래 꽃 한 떨기, 푸른 산 중에서 와서, 연적에 생애를 부치었으니, 타향 나그네 신세와 한 가지로다[杜鵑花一萼, 來自碧山中. 硯滴生涯寄, 他鄕旅客同].”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이 시를 보고 울었다. 그 시에 나타난 뜻이 처량하고 괴로워 멀리 현달할 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에 그는 과연 사화에 연루되어 20대의 젊은 나이에 화를 당하고 말았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예전 중국의 유명한 기생 설도(薛濤)가 어렸을 때 우물가 오동을 읊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시에 이르기를, “가지는 온갖 새들을 다 맞이하고, 잎새는 지나는 바람을 전송한다네[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라고 하였다. 또 송나라 때 어떤 소녀가 있었는데 들꽃을 노래하기를, “다정한 목동들이 자주 머리에 꽂고, 주인 없는 벌과 꾀꼬리 멋대로 깃들어 자네[多情草木頻簪髻, 無主蜂鶯任宿房].”라 하였다. 결국 뒤에 모두 기생이 되었는데, 대저 시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 시구가 그의 운명을 이미 예견하였다는 것이다.

 

또 정승 상진(尙震)은 도량이 넓고 커서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판서 오상(吳祥)이 시를 지었는데, “희황 때의 좋은 풍속 땅을 쓴듯 사라지고, 봄바람 술잔 사이에만 남아 있구나[羲皇樂俗今如掃, 只在春風酒杯間].”라고 하였다. 그러자 상진이 어찌 그리 박절하게 말하는가?”하며, “희황 때의 좋은 풍속 지금도 남았으니, 봄바람에 술잔 사이를 살펴보게나[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酒杯間].”라고 고쳤다. 두 글자 씩을 바꾸었을 뿐인데, 시의 의경은 판연히 달라졌다. 두 사람의 사고 방식의 차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역시 기상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의 차이가 삶의 방식의 차이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은 또 자명하다.

 

 

 

 

인용

목차

1. 한시 비평과 시화(詩話)

2. 시마(詩魔)의 죄상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4. 말이 씨가 되어

5. 말하지 않고 말하기

6. 남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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