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남는 이야기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은 문장으로 한때에 명성이 나란하였다. 한 번은 정지상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지었다.
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 | 절에서 독경소리 끝나자마자 하늘 빛 유리처럼 깨끗해지네. |
독경소리가 맑게 하늘로 울려 퍼지니, 그 소리에 씻긴 듯 하늘빛이 유리와 같이 맑아졌다고 했다. 청각을 시각으로 옮긴 절묘한 포착이 아닐 수 없다. 본시 독경소리와 맑아진 하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시인은 독경소리에 쇄락해진 마음을 맑아진 하늘에서 새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적 심상의 교묘한 결합과 행간에 의미를 감추는 심층화의 수법은 한시가 아니고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심오처이다. 이를 본 김부식(金富軾)이 이 구절을 좋아 해서 정지상에게 그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으나 정지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김부식은 정지상에게 원한을 품어 결국 그를 죽이게 되었다고 한다. 『백운소설(白雲小說)』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시 한 구절 때문에 김부식이 정지상(鄭知常)을 죽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설화적 발상이지만, 또 한편으로 시에 대한 고인의 유별난 집착과 애호를 읽게 하는 측면도 있다.
유희이(劉希夷)가 저 유명한 “해마다 해마다 꽃은 그 모습이건만, 한해 한해 갈수록 사람은 늙어 가네[歲歲年年花相似, 年年歲歲人不同].”란 시구를 지었는데, 그 장인 송지문(宋之問)이 이 글귀를 사랑하여 자기에게 주기를 간절히 빌었으나 주지 않으므로 성내어 흙주머니로 눌러 죽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또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이래저래 시에 대한 고인들의 집착은 유난스럽기까지 하다.
역대의 시화는 이러한 유난스러운 집착이 빚어낸 정채로운 보석이다. 한시는 언어 표현의 함축미나 정서 표출의 세련미에서 다른 어떤 시가 양식보다 우수하다. 한시의 풍부한 표현미와 그 안에 담긴 선인들의 숨결은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소중한 문학 유산이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그대로 방치하여 두기보다,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 넣고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과 인식이 안타까운 오늘이다. 한시가 지닌 높고 깊은 미학은 기교주의 형식주의에 찌든 오늘의 시단에도 새롭고 건강한 지평을 열 수 있으리라 본다.
이글에서 추려본 몇 개의 삽화들은 전체 시화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내용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다. 지면의 제약으로 다루지 못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좀더 깊이 있는 접근을 해 보면 한시의 미학에 대한 이해가 더 용이할 듯도 싶다.
인용
2. 시마(詩魔)의 죄상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4. 말이 씨가 되어
5. 말하지 않고 말하기
6. 남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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