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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29. 시화, ‘행복한 시읽기’ - 2. 시마의 죄상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9. 시화, ‘행복한 시읽기’ - 2. 시마의 죄상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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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시마(詩魔)의 죄상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초목이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自汝之來, 萬狀崎嶇, 悗然如忘, 戇然如愚, 如瘖如聵, 形熱跡拘. 不知飽渴之逼體, 不覺寒暑之侵膚, 婢怠莫詰, 奴頑罔圖, 園翳不薙, 屋痡不扶. 窮鬼之來, 亦汝之呼. 傲貴凌富, 放與慢俱, 言高不遜, 面強不婾, 着色易惑, 當酒益麤, 是實汝使.

 

 

이규보(李奎報)구시마문(驅詩魔文)에서 시마(詩魔) 즉 시 귀신을 힐난하는 대목의 일부이다. 시마가 내게 들어오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마가 내게 온 뒤로부터 나타난 이상한 증상들이다.

 

이규보는 다시 시 귀신의 구체적인 죄악상을 이렇게 나열한다.

 

첫째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

둘째 오묘하고 신비한 이치를 파헤쳐 기밀을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

셋째 삼라만상의 천만 가지 형상을 닥치는 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붓 끝으로 옮겨 내어 겸손할 줄 모르게 하는 죄,

넷째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기만 하면 즉시 공격하여 상주고 벌주기를 제멋대로 하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며 뽐내고 거만하게 만드는 죄,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게 하고 머리 빗기를 게으르게 하며, 괜스레 신음 소리를 내고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어 온갖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가 그것이다.

멀쩡하던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시 귀신이 있으니 이를 아니 쫓고 어찌할 것이랴.

 

예전 시화를 보면 이러한 시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이현욱이란 사람에게 붙었던 시마이다. 그는 시마에 둘러 씌인 뒤 짓는 시마다 기막힌 가구(佳句)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시마가 떠나고 나자 단 한 글자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균(許筠)학산초담(鶴山樵談)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산조의 최연이란 이도 축시마(逐詩魔)란 글을 통해 시마의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이로 보면 강신무가 접신하듯, 시마가 사람에게 들면 그는 신들린 듯이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며 시만 생각하고, 시만 쓰게 되며, 그 결과 쓰는 시마다 뛰어난 작품 아닌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마란 놈은 무슨 이마에 뿔이 달린 귀신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규보(李奎報)가 적시하고 있는 시마의 죄상이란 것도 되읽어 보면, 나는 이렇듯 오로지 시만 생각하며 산다는 그야말로 전업 시인으로서 누리는 특권에 대한 즐거운 비명일 뿐이다. 평소 얼마나 시에 골몰하며 생활의 매 순간 순간을 시와 관련지었으면, 스스로 시 귀신에 씌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을까.

 

종남총지(終南叢志)에 나오는 얘기다. 옛 사람의 시구 중에는 다섯 글자의 시구를 읊조리기 위해, 일생의 심력을 다바치었네[吟成五字句, 用破一生心].”, “()이란 한 글자를 읊기 위하여, 여러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네[吟安一箇字, 撚斷幾莖髭].”라 한 것이 있다. 두 구절을 삼년 만에 얻고서, 한 번 읊조리매 눈물이 주루룩 흐르네[兩句三年得, 一吟雙淚流].”, “시 읊조리는 괴로움 알고 싶은가. 가슴 속에 가을 서리가 있는 듯하네[欲識吟詩苦, 秋霜若在心].”과 같은 구절을 보면, 옛 사람이 한 구절의 시를 얻기 위해 고심참담하던 광경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두보(杜甫) 같은 이는 아예 말이 사람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으리[語不驚人死不休].”라고까지 만장의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으니, 이래저래 일상사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시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옛 사람들의 시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마를 다소 점잖게 표현하여 시벽(詩癖)이라고도 한다. 글자 그대로 시에 고질(痼疾)이 든 것이다. 송나라 때 매요신 같은 시인은 아예 시벽시(詩癖詩)를 지었는데, “인간의 시벽이 돈에 대한 욕심보다 더하니, 애간장 졸이며 시구 찾느라 몇 해 봄을 보냈던고. 호주머니 비어 가난해도 개의하지 않았고, 읊은 것에 새로운 시구 많은 것만 기뻐했었다[人間詩癖勝錢癖, 搜索肝脾過幾春. 囊橐無嫌貧似舊, 風騷有喜句多新].”고 하여, 시에 고질이 든 자신의 삶을 술회하기도 하였다.

 

 

 

 

인용

목차

1. 한시 비평과 시화(詩話)

2. 시마(詩魔)의 죄상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4. 말이 씨가 되어

5. 말하지 않고 말하기

6. 남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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