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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29. 시화, ‘행복한 시읽기’ -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9. 시화, ‘행복한 시읽기’ -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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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허구헌 날 이렇듯 시만 생각하다 보니, 그 생활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시화를 빈번하게 장식하는 화제 가운데 시가 사람을 능히 궁하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이 있다. 시가 무슨 조화가 있어 사람을 궁하게 할까마는, 폐백사하고 시만 생각하고 앉았으니, 궁함이 뒤따라오는 것은 또 당연할 법하다.

 

어느 여류 시인이 자신은 시를 쓸 때 먼저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고 실연의 기억과 같은 슬픈 일을 생각하노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니와, 대체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무참하게 버려진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중국의 사명시화(四溟詩話)에는, “요즘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는 자를 보면 부유하게 살면서도 궁상스런 근심을 말하고, 태평한 시절을 만나서도 전쟁의 고초를 말하며, 늙지도 않았으면서 늙은이 흉내를 내고, 병도 없으면서도 끙끙댄다.”고 하여, 시인들의 유난스런 무드 잡기를 꼬집은 바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두보(杜甫)를 배우면 가난해진다고 해서 아예 두시를 배우지 못하게 한 경우까지 있었다. 커튼 치고 촛불을 켠다고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진실이 없이 자기 최면의 위장된 수식으로 이루어진 시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에 그친다면 시인은 기능적인 언어조립공에 불과할 것이다.

 

트릴링(Lionel Trilling, 1905~1975)은 현대의 문화인들이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도,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인 심리상태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고통 속에서 오히려 만족을 찾는 이러한 또 하나의 본능적 충동이 결과로 시인에게 궁곤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바로 시능궁인(詩能窮人)’의 생각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보면 시장에서 떡을 팔며 노래를 잘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자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 시조에도,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일러 못다 일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고 한 것이 있다.

 

또 시화에는 이 시능궁인(詩能窮人)과 함께 시는 궁해진 뒤에 좋아진다[詩窮而後工].”이란 말도 자주 보인다. 이 말은 구양수(歐陽修)가 매성유의 시를 평하면서 그 서문에서 말한 이래로 널리 퍼졌는데, 부유하고 넉넉할 때 지은 시보다 궁곤 속에서 지어진 시가 훨씬 더 좋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여도 수긍이 간다. 시인의 생활이 궁할수록 묘사하는 바가 더욱 더 예리하고 섬세하게 되는 것은 심리적 보상작용의 결과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도 주리고 추운 속에서 도심(道心)이 생겨난다[飢寒發道心].”는 말을 하거니와, 대체 궁()의 상황은 시인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니 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 고조될 것이고, 이에 따라 예전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 채 낯설게 다가올 것은 당연하다. 그의 감정은 극히 예민한 촉수가 되어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르나아르(J. Renard)사람은 권태 속에서 가장 열심히 산다. 마치 귀를 쫑긋 기울인 토끼처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권태 속에서 가장 열심히 산다는 이 역설적인 말은, 궁곤 속에서 시인의 정신이 오히려 맑고 투명하게 타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시능궁인(詩能窮人)은 시를 쓰는 행위의 결과로 궁하게 된다는 말이고,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은 궁해진 뒤에 시가 좋게 된다는 말이다. 이로 보면 이 두 말은 서로 선후가 반대가 되어 의미가 다른데도, 실제 시화에서는 혼동해서 쓰고 있어 흥미롭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이 먼저인가, 아니면 시()가 먼저인가. 물론 정해진 결론은 없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이 먼저든 시가 먼저든 시인은 늘 궁상(窮狀)을 달고 다니는 직업이라는 사실만은 꼭같다. 실제로도 시마(詩魔)나 시벽(詩癖)이 시인을 궁하게 만든 것인지, 궁한 속에서도 시만 짓다 보니 시마(詩魔)가 찾아 들어 시에 고질이 들린 것인지는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예전 굴원은 참소(讒訴)와 아첨(阿諂)이 임금의 밝음을 가려 바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의로움이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며 초사를 지어 그 심회를 펼쳐 보이고, 마침내 상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서 그 분노와 수치를 창조적 에너지로 삼아 불후의 걸작 사기(史記)를 완성시켰다. 이를 발분서정(發憤抒情)’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대개 마음속에 쌓인 분()을 발하여 응어리 진 정()을 펼친 것이어서, 그 말이 인정의 말하기 어려운 것을 살펴 얻었던 것이다. 시인이 궁곤(窮困)을 달고 다닌다는 말은 가난해야 시인의 자격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결핍의 불우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저물러 앉지 않는 불굴의 정신, 남들이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주변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 속에서만이 시인의 정신은 밝게 빛난다는 말일 뿐이다. 궁곤이나 결핍은 시인의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충분조건일 뿐, 능시(能詩)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인용

목차

1. 한시 비평과 시화(詩話)

2. 시마(詩魔)의 죄상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4. 말이 씨가 되어

5. 말하지 않고 말하기

6. 남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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