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일 뿐
몸이 피곤해서 살살 걸었다. 오늘은 걷는 흥이 안 난다. 날씨까지 뜨거우니 더욱 고통스럽다. 5시가 넘어 교회 팻말이 보여서 조금 들어가니 교회가 있다는 표시가 다시 보이더라. 그래서 한참 걸어 들어갔는데도 교회는 보이지도 않았다. 마을이 그렇게 큰 게 아니니 못 찾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지금은 없어진 건가.
잠자리 얻기 실패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마을회관이 보이기에 그곳으로 갔는데 마을회관은 잠겨있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앉아 있었다. 어떤 분이 오시기에 마을회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통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다. 그래서 바로 통장님 댁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그런데 ‘역시나’ 통장님은 안 계시더라. 이거 완전히 ‘공주 경천’ 때와 판박이다. 무작정 기다릴 생각으로 다시 마을 입구 벤치로 와서 앉았다. 그 순간 내 자신이 어찌나 처량하던지. ‘아~ 나도 집에 들어가 편안히 쉬고 싶다.’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꾸 맘은 요동치더라.
‘지금이라도 더 걸어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고 결국 길을 나섰다. ‘교회가 보이면 무작정 부탁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가고 있는데 저 멀리 꽤 큰 교회가 보이더라.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최근에 지어진 것 같은 으리으리한 건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눅들 필욘 없었다. 거절당하면 다시 걸어서 가면 되니 말이다. 근데 이 교회엔 작은 방들이 여러 개 있어서 거절당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은 사택에서도 재워주시는데 좀 더 크고 방도 많은 이 교회에서 쫓아내기야 하겠는가?’라는 확신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사모님께서 나오셨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이런저런 핑계를 한참이나 대신다. 무수한 말들을 핑계라고 판단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시험기간이라 아이들이 공부하러 교회에 오니, 머물 수 있는 방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이 갈 때까지 같이 공부하다가 다 가면 자겠다고 말했다. 다년간 임용공부를 하던 마인드로 책이라도 더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모님은 난색을 표하시더라. 낯선 사람이 있으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된다나 뭐라나.
결국 거부의 요지는 ‘낯선 사람은 안 돼!’였던 것이지, 시험 얘긴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쯤 되니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떠한 말도, 어떠한 진심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낯설다’는 것을 지금 상황에서 익숙함으로 바꾸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쯤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찜질방에 둥지를 틀다
거기서 1시간 정도를 더 걸어가니 청주 외곽 지역이 나오더라. 높이 치솟은 아파트 촌에 들어선 거다. 얼마 더 걸으니 찜질방이 보이더라. 시내 근접 지역에선 잘만한 민가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에 찜질방에서 자기로 맘먹었다.
찜질방에 들어가기 전에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며 주위를 돌아다녔다. 밥을 먹고 싶긴 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냉면집으로 들어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와서인지 냉면이 그렇게 시원하고 달콤할 수가 없었다. 국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더니, 배 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 같더라^^
찜질방으로 들어왔다. 이 아늑함이여~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푹 쉬어야지. 새벽 기도에 대한 부담도 없으니 이것도 나름 괜찮은 걸.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는 용기
연기에서 청주로 향하는 길은 별로였다. 사람이 걷는 갓길이 너무 비좁아 큰 트럭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날렵하게 길옆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연기군의 공사현장을 지나쳤는데도 여전히 트럭들이 많이 다니더라. ‘트럭’이 ‘4차선 국도’ 못지않은 국토종단의 최악의 적으로 대두되는 순간이었다. 걷는 데 집중할 수 없으니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벌써 4월도 마지막이다.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막상 시간을 되돌아보니 여행을 떠나던 4월 19일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하긴 이번 달엔 이사 건, 국토종단 건으로 꽤 바쁜 나날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게 정신이 없어서인지 4월은 그 어느 달과도 비교할 수 없도록 생기 가득한 한 달이기도 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에 화가 나기도 했고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행복하기도 했다. 애증병존의 순간들을 몸소 느끼다 보니, 바로 이게 삶이라고 느껴지더라.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걸 다 감내하며 나의 족적을 남기며 나아가는 행복이란, 해본 사람만이 아는 묘한 쾌감이었다. 행복이 별건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 순간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겠지. 그것에 나를 맡겨 노닐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극락(極樂)’일 것이다. 4월은 그 가능성을 활짝 열었던 한 달이었다.
지출내역
내용 |
금액 |
음료수 |
2.000원 |
냉면 |
5.000원 |
찜질방 |
6.000원 |
총합 |
13.000원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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