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②: 자벌레와 개구리에게서 배운 끈기로
다 씻고 나니 8시 50분이다. 아직도 이마트가 열 때까지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는 셈이다. 그래서 짐을 다 챙기고 평상에 앉아 TV를 보았다.
찜질방의 옷장열쇠를 잃어버리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다. 이 찜질방은 다른 찜질방과는 달리 신발장 열쇠와 옷장 열쇠가 나누어져 있다. 그래서 두 열쇠를 다 신경 써야 한다. 그걸 잃어버리면 만원을 내야 한다고 안내데스크에 써 있다. 신발장 열쇠야 배낭에다 넣어두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문제는 옷장 열쇠였다. 배낭 안의 짐들에 신경 쓰고 시간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일까 옷장 열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주위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기에 옷장에 가봤다. 나보다 앞서 카운터를 보시던 분이 그곳을 지나가며 열쇠를 챙기는 장면을 보긴 했지만 그게 내 열쇠란 확신은 없었다.
그때부터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에게 224번 열쇠가 있느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아저씨가 안 계신 틈을 타서 그냥 나갈까?’하는 생각 말이다. 괜히 물어봤다가 없다고 하면 내뺄 수도 없게 된다. 그러면 만원이라는 생돈이 나가는 것이니, 그냥 몰래 나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TV를 보는 척 아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로 보고 있다. 근처만을 왔다 갔다 하신다. 이거 완전 낭패다. 그 순간부터 침은 바짝바짝 말라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늘은 쉬기로 한 날이니 자벌레와 같은 끈기로 맞서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기회는 꼭 오고 말테다.
자벌레의 끈기로 만원을 벌다
옷장열쇠를 얘기하다가 갑자기 ‘자벌레의 끈기’ 얘기가 나와서 어리둥절 할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렇다. 양평에서 포천으로 가던 길에 용담대교를 건너고 나니 버스정류장이 보여서 거기서 쉬었다. 그때 신발을 벗고 깔창을 빼서 의자기둥에 기대놓으려 하니 꾸물거리다가 멈추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닌가. 그게 바로 자벌레였던 거다. 철제 기둥에 ‘d’ 이런 모양으로 붙어서 옴짝달싹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후로 신경 쓰지 않고 20분가량 쉬었다가 출발하기 위해 깔창을 넣으려 그 철제 기둥을 다시 보니 아직까지도 자벌레는 그 모습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 ‘힘든 자세’로 화석마냥 있는 것이었다. 지금 자벌레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다. ‘작은 벌레도 살기 위해서 순간의 힘듦도 마다하지 않는데 난 작은 고통에도 엄살 부리고 사네 죽네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라. 고작 만원을 물지 않기 위해 버티는 내 모습을 자벌레의 끈기에 비교하는 게 살짝 어이없지만 말이다.
학교에서 수업할 때 흥미를 유발하려고 화투에 나오는 ‘비광’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비광의 주인공은 ‘오노도후(小野道風, おのどうふう)’지만, 그가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서예가가 될 수 있었던 데엔 ‘개구리’의 도움이 컸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개울에 빠져 휩쓸러가던 개구리는 그나마 물이 얕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 바로 그곳에 나무가 있었기에 개구리는 쉴 새 없이 나무에 올라갈 때까지 뛰기를 반복했다. 계속 실패했지만 지금은 실패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완전히 실패하는 순간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뛰기를 거듭하던 개구리는 마침내 나무에 올라가 익사를 피할 수 있었다. 그 개구리와 자벌레가 겹쳐 보이는 건 그래서 당연했고, 거기에 나까지 덤으로 껴놓고 있는 것은 의식의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런 인내심과 끈기로 임용 준비를 했다면 난 벌써 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기다리다 보니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목욕탕에서 누군가 아저씨를 불렀고 아저씨는 욕탕으로 들어가셨으니 말이다. 이런 호재를 놓칠 순 없다.
무작정 배낭을 짊어지고 후다닥 ‘걸음아 나 살려라’하는 심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우~휴! 뒤에서 누가 부르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는데 아무 제지 없이 나올 수 있었다. 단 돈 만원에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3주간의 여행을 정리하며 나에게 준 선물
나오긴 했는데 겨우 9시 20분밖에 되지 않았다. 비옷을 입고 근처에 있는 이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개장도 하기 전인데 사람들은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더라. 새 화폐가 발행될 때 텐트까지 쳐가며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는 이야긴 들어봤어도 마트가 열리길 기다린다는 이야긴 처음 들어봤고 그런 광경은 처음 봤다. 하긴 나도 기다리는 인파 중 하나니까^^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서 들어가더라. 그 장관이란~ 난 장바구니를 들고 이것저것 골랐다. 오늘은 ‘나를 위한 파티’를 하는 날이기에 초밥도 사고 과자도 사고 통닭도 사고 맥주도 샀다. 먹지도 않았는데 보는 것만으로 왜 그리 뿌듯해지는지. 그걸 배낭 안에 차곡차곡 넣으니 배낭이 아주 빵빵해졌다. 분명 무거웠지만, 곧 만찬을 즐긴다는 생각에 그 무게감조차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더라.
이젠 여관을 찾아야 한다. 최대한 허름해 보이는 여관을 찾기 위해 한참을 걸었다. 허름해 보이는 여관에 들어가 가격을 물어보니 삼 만원을 부른다. 오천 원을 깎아달라고 했더니, 그럴 수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른 여관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나 혼자 묵는다며 좀 깎아줄 것 같은 인상을 취하시더니 삼 만원을 부르신다. 역시 영락없는 ‘장사하는 분’들의 제스처다. 처음 여관에 온 사람은 아주머니의 말투와 행동만 보고 엄청 인심 쓴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거니 말거니 난 깎아달라고 했다. 주말이라 방이 모자란다느니 어쩐다느니 한참을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이만 오천 원에 계산할 수 있었다. 아~ 난 왜 이렇게 여관에서 돈 쓰는 게 아까울까~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빨래도 하고 푹 쉴 생각에 들어온 것이지만 다신 여관에 올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들어와선 나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맛있는 음식과 맥주가 가득한 식사 시간이라니. 혼자 즐기는 시간이기에 남들은 궁상맞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그 어떤 시간보다 달콤했다. 앞으로도 살면서 이런 파티는 간간이 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그때 처음으로 무한도전을 봤는데, ‘박명수의 기습공격’이라고 사람들과 내기를 하여 얼마 이상을 먹지 않으면 박명수가 식대를 계산해야 하는 미션이었다. 자영업자에게 힘을 보태자는 취지가 충분히 공감되었고, 나름 재밌게 봤다. 먹고 마시고 무언가를 보며 맘 편히 쉬고 있으니 천상의 행복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지출내역
내용 |
금액 |
여관비 |
25.000원 |
먹거리 |
24.000원 |
총합 |
49.000원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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