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Eschatology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 고대 문명을 일구었던 마야인들의 달력에 따르면 우리는 곧 이 세상의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 종말의 날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달력으로 2012년 6월 5일에 해당한다. 그것은 마야인들의 독특한 날짜 계산법에 따른 결론이지 종교적 의미는 없다. 그런데 종교의 종말론에서 말하는 세상의 종말은 사뭇 비감하다.
종말론이라는 개념은 ‘최후’를 뜻하는 ‘에스카토스(eschatos)’라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유래는 멀리 유대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 의하면 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의 율법에 따르지 않을 때 그들을 파멸하리라는 위협을 가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이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도구이므로 신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구원을 약속받는다.
이처럼 유대교에서는 신의 태도에 따라 세상의 종말이 언제든 닥칠 수 있는가 하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유대교는 대체로 사후의 내세보다는 지금의 현세를 더 중시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발전해 나온 그리스도교에서는 현세보다 내세를 더 강조하는 입장으로 바뀌었고, 신약성서의 시대,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뒤부터 종말의 과정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바빌론에 잡혀간 유대인들(→ 디아스포라)은 장차 메시아가 강림하리라는 믿음을 가졌으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보지 않은 반면에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심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본 것이다.
신약성서의 맨 마지막에 수록된 요한계시록은 장차 그리스도가 재림해 1천 년 동안 축복 속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 뒤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가 성립한다고 말한다. 종말을 맞은 세상의 참상은 무시무시하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요한계시록」”
이러한 종말론으로 신도들에게 잔뜩 겁을 주는 의도는 명백하다.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이 지은 죄를 대속하고 죽었으므로 교리상으로 인간은 그때부터 무죄가 된다. 죄가 없으면 두려움을 모르고 두려움을 모르면 신을 섬기지 않는다. 교세가 아직 미약했던 그리스도교의 초기에 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신흥 종교의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는 신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교리에 포함시켜야 했고, 공포스러운 세상의 종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종말론은 그런 유용성을 가졌으므로 다른 종교에서도 당연히 인기 메뉴였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정의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악신 아리만(Ālǐmàn)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것을 심판의 과정으로 간주했으며, 결국 아후라 마즈다가 이겨 행복과 평화의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 이슬람교에도 죽은 자가 내세에서 신 앞에 불려가 선악의 행위를 심판받는다는 교리가 있다. 또 불교와 힌두교는 윤회(輪廻)를 통한 해탈로써 열반에 도달하는 개인적 종말론을 가르쳤다. 이렇듯 대부분의 종교에는 종말론이 있으나 그리스도교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종말론은 보기 드물다. 그리스도교에서 종종 황당한 휴거를 주장하거나 광신적 집단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신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데는 종말론이 최고다.
종교적 의미를 제외한다면, 실제로 이 세상이 종말을 맞게 되는 경로는 두 가지다. 하나는 6500만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혜성이나 소행성의 충돌로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의 생명이 대부분 멸종하는 경우다. 하지만 설사 인류는 멸종하더라도 지구는 계속 존재할 테고 새로운 생명체가 번성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의 종말일 뿐이다. 또 다른 경로는 약 50억 년 뒤 태양이 수명을 다해 태양계 자체가 붕괴하거나, 다시 수십억 년 뒤 우주가 최종적으로 소멸하게 되는 경우다. 그런데 이것은 생명만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까지 포함한 모든 것의 종말이므로 예상 자체가 무의미하다.
종교적 종말론은 불순한 의도가 있고 우주적 종말론은 무의미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 종말을 운운하는 것부터가 범주 착각인지도 모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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