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란 타자와의 소통 흔적이다
행(行)이라는 글자를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 글자는 인격적으로는 ‘걸어간다’, ‘다닌다’, ‘움직인다’의 의미로 쓰이고, 비인격적으로는 ‘작용된다’, ‘운행된다’, ‘흐른다’의 의미로 쓰인다. 우선 비인격적인 예를 먼저 들어보자. ‘물이 흘러간다’고 해보자.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 물은 기본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물이 흘러간다는 것은 차이(difference)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사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아니 정확하게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곳과 차이나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예를 들어 보부상이 사과를 메고 장사를 하러 갈 때 그는 어느 곳으로 가겠는가? 사과가 많이 나는 곳으로 그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다. 가급적 사과가 희귀한 곳으로 갈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흔히 산출되는 상품을 들고 마찬가지의 상품이 많은 곳으로 장사가는 보부상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행(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차이가 전제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행(行)은 동일성이 있는 곳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방금 만나서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서로에게서 가장 큰 차이를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차이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연인이 결혼을 해서 오랜 시간 함께 살다보면 이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극도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이가 극도로 좁혀지면서, 이 두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생성된다는 점이다. 결국 소통은 차이로부터 동일성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나는 두 연인이 사랑이라는 소통의 운동을 통해서 각각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사람들로 만들어진다. ‘나는 이러저러하다’는 자기 동일성은 차이를 통해서, 그리고 차이를 가로지르는 소통의 운동에 의해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행이라는 말은 차이를 가로지르는 비약의 운동, 즉 소통을 상징하는 말이다.
신이 아닌 이상 우리 인간은 타자와 관계를 맺어야 살 수 있는 유한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한, 또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으려면 타자와의 소통은 불가피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소통의 흔적으로서의 도도 불가피하게 생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도라는 것은 어디에 간들 없을 수 있겠는가(道惡住而不存)?’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에게도, 소를 잡는 사람에게도, 낚시를 하는 사람에게도, 매미를 잡는 사람에게도,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소도 잘 잡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도는 세계를 포괄하는 동일한 원리일 수는 없다. 장자에게 도는 정확히 도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수영하는 사람의 도, 원숭이를 잘 키우는 사람의 도, 정치를 잘하는 도 등 기본적으로 장자의 도는 복수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모든 도들이 철저하게 상호 무관하다는 말이 아니다. 도들은 동일하지 않지만 유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도들은 타자와의 소통의 흔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들은,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나의 조건과 타자의 조건에 의해 제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전혀 다른 존재였던 창대와 정약전은 소통함으로 서로 변해갔다.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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