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울을 닦듯이
우리는 장자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논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거울은 나무 앞에 있으면 나무를 비춘다. 이 거울이 사람 앞에 있으면 사람을 비춘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거울은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이 거울이 사람을 비출 때, 이 전에 비추던 나무의 상을 지니고 있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혹은 이 거울이 항상 사람만을 비추려는 거울이면 어떻게 될까? 장자가 거울의 비유로 마음을 설명하려는 논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장자에게 거울은 때가 끼었든 맑든 항상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의 거울은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내적임 또는 타자와 소통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비유다. 그러므로 거울의 비유는 태양과 같은 초월적 비춤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울은 타자를 항상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ㆍ내적이며 동시에 타자ㆍ관계적임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울의 상은 거울 자체의 소통 역량과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도 마음 자체의 소통 역량과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거울의 상이 유한하고 특정한 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거울이 비추고 있는 타자의 단독성(singularity)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울 앞에 사과가 아니라 꽃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특정한 거울의 상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의 맑은 소통 역량 자체는 무한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가 허심(虛心)을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본래적 마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소통 역량을 회복해야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비추고 있는 우리의 마음, 즉 타자와 소통하는 우리의 구체적 마음은 분명 유한하고 특정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유한성과 제약성이 우리 마음이 지닌 무한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 타자의 단독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은 거울일 수 없듯이, 어떤 구체적 삶의 문맥도 반영하지 않는 마음은 마음일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도 어떤 것도 비출 수 없는 거울과 마찬가지로 거울일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절대적인 있음은 절대적인 없음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거울을 닦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장자가 허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와 잘 소통해서 새로운 삶의 문맥을 잘 비추어내려는 데 있다. 빈 마음[虛心]은 결코 앞으로 어떤 것도 비추지 않으려는 허무주의적인 마음이나, 아니면 모든 것을 비추겠다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마음을 의미할 수는 없다. 아무 것도 비추지 않겠다는 허무주의적인 거울, 모든 것을 비추겠다는 초월적인 거울, 그리고 어떤 것만을 비추겠다는 성심의 거울 등, 이 모든 거울은 비본래적인 거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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