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길은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道行之而成)”
1. 걸어갔기에 완성된 길
이제 직접 발제 원문을 읽어보자. 발제 원문의 핵심은 하단부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발제 원문의 하단부는 너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 구조는 마치 새끼를 꼬듯이 도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과 언어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이 교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편의상 이 구조를 풀어헤칠 필요가 있다. 원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도는 작은 것의 이룸으로 가리어지고, 말하기는 화려한 수사들로 가리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유가와 묵가의 시비 판단의 다툼이 있게 된 것이다. (…) 도는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지고, 외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故有儒墨之是非. (…)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는 도의 의미 계열인데, 이것은 ‘도는 작은 이룸으로 가리어져서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원래 도는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로 재구성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언어의 의미 계열인데, 이것은 ‘언어는 화려한 수사들로 가리어져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판단이 생긴다. 원래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이다’로 재구성될 수 있다.
먼저 도의 의미 계열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장자는 ‘길은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진다[道行之而成]’고 말한다. 다시 말해 도는 내가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전에 이러저러하게 규정된 도가 있어 그것을 내가 학습하고 내면화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장자의 도는 공자의 도에 대한 생각과 차이를 보인다. 공자에게 도란 이미 이전의 성인(聖人)들이 걸었던 길이기 때문에 절대로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간들이 이런 절대적으로 완전한 길로 걸어가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 공자가 생각했던 도는 이전의 주나라의 예의제도[周禮]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자신을 이겨서 예를 회복해야 한다[克己復禮]’고 권고했던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장자는 다음과 같이 되물으면서 도를 더 근본적으로 사유한다.
‘그렇다면 성인이라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이 갔다고 하는 길을 걸었던 것일까?’ 자신들 이전에는 전혀 있지도 않았던 길을 성인들은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가? 예를 들어 농사짓는 방법[道]과 약초를 이용하는 방법을 만들었던 신농(神農)이라는 성인은 어떻게 이런 방법들을 만들었는가? 전설에 의하면 신농은 몸소 풀 하나하나를 먹으면서 약초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 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때는 독초를 먹어 몇 날을 쓰러져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성인이 걸어갔던 그 길은, 즉 그 도라는 것은 이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깎아지른 절벽 양쪽을 가로지르고 있는 동아줄로 이루어진 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은 당연히 그 다리가 설치돼 있어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어다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리를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가 반대쪽 절벽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는 것을 잊고 있다. ‘길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道行之而成]’고 말했을 때, 장자는 공자보다 더 철저하게 도를 사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장자는 도(道)를 넘어서 이것을 발생시키는 운동을 사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도보다는 행(行)이라는 글자에 장자 사유의 핵심이 있었던 셈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