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Ⅶ. 단독자[獨]의 의미 - 2. 단독자[獨]의 철학적 의미와 함축, 단독자와 단독자의 만남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Ⅶ. 단독자[獨]의 의미 - 2. 단독자[獨]의 철학적 의미와 함축, 단독자와 단독자의 만남

건방진방랑자 2021. 7. 4. 05:44
728x90
반응형

3. 단독자와 단독자의 만남

 

 

무엇보다도 단독자를 의미하는 독()이라는 글자는 글자 그대로 홀로 있음을 의미한다. 홀로 있음은 나 자신이 일반성(generality)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단독적인(singular) 나로 남는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독적인 것(the singular) 또는 단독성(singularity)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독성이라는 개념을 특수성(particularity)이라는 개념으로 혼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이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하자, 아브라함의 고민은 시작된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쳐야 되는 때가 바로 내일로 다가오자, 아브라함의 고민은 극도로 증폭되었다. 밤에 이삭이 곤히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아브라함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삭의 발을 쓰다듬었을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아브라함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뭐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도 젊으니까 다시 아들을 낳으면 되지요.” 그러나 이런 위로가 아브라함의 고뇌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로 그 하나뿐인 이삭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다시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 아들이 바로 지금 제물로 바쳤던 이삭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처럼 동일한 이삭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관계할 수 있다. 하나가 다른 아들로 교환 가능한 특수한 이삭으로 보는 경우라면, 다른 하나는 다른 아들로 교환 불가능한 단독적인 이삭으로 보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 특수성은 기본적으로 일반성의 하나의 사례로 경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삭도 아들이라는 일반성(generality)의 하나의 특수에 불과하다면 다른 아들을 낳아서 이삭의 자리는 충분히 메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라면 사실 아브라함의 슬픔은 이삭의 죽음에 대한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지금 아들이라는 일반성의 한 가지 사례가 소멸하고 있음을 슬퍼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이런 일반성의 층위를 부정했을 때, 다시 말해 일반성의 한 사례로서 어떤 것을 특수성으로 보기를 거부했을 때 드러나는 개별자의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특수성과 단독성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 관건은 바로 일반성의 유무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단독성의 층위에서 개별자와 관계하기 위해서는 일반성/특수성의 도식을 제거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일반성/특수성이란 도식은 어디에서 작동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칭적인 마음에서 작동하면서, 인칭적 마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관건이 된다. 왜냐하면 인칭적인 나는 세계ㆍ대상ㆍ삶이라는 일반성을 통해서 규정되는 나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칭적인 나는 이 세계 속에서 하나의 대상(= 개별자)으로 살고 있는 나로 정의되는 특수한 나라는 것이다.

 

장자에게 세계ㆍ대상ㆍ삶을 지우는 견독의 과정은 바로 이 인칭적 마음으로부터 일반성을 지우는 과정이었다. 왜나하면 대상 형식의 일반성을 제거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주체 형식의 일반성도 제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성을 지우게 되면 하나의 특수성으로서 의 인칭적 마음은 소멸되지만, 비인칭적이고 단독적인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결국 그는 이런 견독의 과정을 통해서 단독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단독자는 거울과 같은 마음, 아이와 같은 마음을 회복한 비인칭적인 삶의 주체 또는 단독적인 삶의 주체를 의미한다. 장자에게 내[, ]라는 의식은, 태어난 구체적 사회에 처하면서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형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와 인식의 불가분적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인식에 의해 정립되는 나는 나라는 개념에 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자신을 나라고 부르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내가 나를 나라고 의식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라는 개념 또는 나라는 유()나 일반성의 특수일 뿐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내가 단독자가 되었을 때, 우리가 조우하는 타자도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비인칭적이고 단독적인 나에게는 이제 일반/특수성의 도식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타자도 단독성을 가지고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용

목차

장자

원문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