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착된 자의식이란 양파를 벗겨가다
고착된 자의식은 ‘나는 이제 자신을 비웠어’라는 의식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의식에도 이미 나라는 인칭적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의식의 동일성을 해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삶에 대한 애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우리는 생사 관념도 대대 관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처럼 언어적 논리에 대한 직시로만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관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사는 형식적으로는 저것과 이것[彼ㆍ是]으로 대표되는 대대 관계 일반의 한 사례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 인간의 고착된 자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대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생사라는 대대 관념을, 직접 저것과 이것[彼ㆍ是]의 논리로 밝힘으로써 해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생사라는 관념은, 단순히 언어적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완전히 해체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장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장자는 생사라는 관념에 대해서만은 삶을 기뻐함과 죽음을 싫어함이라는 우리의 전형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로 다시 문제삼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죽음의 문제 같은 경우는, 미래에 대한 태도(=예기와 기대)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의식의 동일성을 규정하는 내용 중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판단은 ‘나는 살아 있다’라는 것이다. 여타의 자기 동일성의 내용과는 전적으로 다른 확고부동한 규정성이 바로 ‘살아 있는 나’라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은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군주니 신하니 하는 규정성은 단지 사회적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도 있지만, 끝내 뿌리치기 힘든 규정성은 바로 ‘내가 살아 있다’는 규정이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의 대대적 의미와 그것에 근거한 인식의 규정은 모두 살아있는 나라는 확고부동하고 자명한 규정 위에서만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지금 삶과 죽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는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을 꿈이라고, 그리고 존재와 타자 중심적인 진리관을 깨어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꿈의 지평에서 사유된 생사(生死)이지, 깨어남의 지평에서 경험하게 되는 생사는 아니다.
생사 관념의 중요성은 「내편」 일곱 편들 중 「대종사(大宗師)」 편이 바로 이 고질적인 생사 관념의 해체를 위해서 편집된 편이라는 데서도 확인될 수 있다. 「대종사(大宗師)」 편에 나오는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가 발제 원문으로 선택한 ‘견독(見獨) 이야기’ 혹은 ‘여우(女偊) 이야기’라고 불리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양파의 껍질을 벗겨가는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 껍질은 전체를 상징하는 천하(天下)다. 두 번째 껍질은 내가 사유하고 인식하는 개별자를 상징하는 대상[物]이다. 세 번째 껍질이 바로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의 최종 껍질인 살아있는 나를 상징하는 삶[生]이다. 최종 껍질을 벗긴 상태를 장자는 조철(朝徹)이라고 부른다. 조철이라는 장자의 신조어는 아침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조(朝)라는 글자와 밝다, 환하다를 의미하는 철(徹)이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조철이라는 개념은 밤새 빗소리에 뒤척이면서 꾸었던 악몽으로부터 밝게 갠 아침을 맞아서 깨어났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 혹은 고착된 인칭적 자의식으로부터 깨어나서 우리가 존재와 타자 중심적인 진리 혹은 유동적이고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장자는 바로 이런 꿈으로부터 깨어난 사람을 삶과 소통의 주체를 상징하는 단독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장자가 이상적인 인격으로 보는 단독자란 어떤 철학적 함축들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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