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거울[鏡]’ 은유의 중요성과 한계
1. 단독성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기
장자에게 단독자는 미리 설정된 매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단독자는 일반성/특수성이라는 매개 또는 교환의 논리를 제거하면서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체도 타자도 모두 단독성을 통해서 조우하고 소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버지라는 일반성에 포섭된 특수한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은 아들이라는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아들로서의 이삭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일반성이 함축하는 행동 양식에 의해 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해 인자하고 자애롭게 처신하고, 이삭은 아브라함에 대해 공경하고 순종적인 태도로 처신할 수 있다. 반면 아버지라는 일반성이 제거된 단독적인 아브라함과, 아들이라는 일반성이 제거된 단독적인 이삭의 만남도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단독자들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하고 고유한 단독적인 관계가 맺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독자로서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만남이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는지 기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만이 기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견독(見獨)의 과정을 통해서 장자가 모든 것을 부정해서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인데, 장자는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돌아와서 구체적인 소통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견독의 다음 과정에서 바로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응제왕(應帝王)」 편의 거울 비유에서도 장자는 비인칭적인 마음을 설명하면서, 이 소통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자신이 조우한 것만 비추는 거울처럼 새롭게 도래하는 것과 소통하고, 이전에 소통한 흔적을 성심의 형태로 담아 두지는 않는다. 이처럼 단독자는 구체적인 주체와 타자에 앞서 미리 이 주체와 타자를 매개하는 본질로서의 제3자(= 일반성)가 없음을 말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주체[自]의 소멸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단독자는 타자와 매개 없이 직면해서 소통할 수 있는 주체, 유동적인 삶의 주체에 대한 긍정으로 독해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나는 나를 잃었다[吾喪我]’라는 구절에서 이것을 확인한 바가 있다. 단독자는 바로 고착된 자의식을 버린[喪我] 나[吾]다. 이 내[吾=獨]는 결국 타자와 직면한다는 점에서 나 일반에 포섭되는 내가 아니라 단독적인 내다. 여기서 단독성(singularity)은 타자의 나로의 환원불가능성과 아울러 나의 타자로의 환원불가능성으로 경험되고 정의될 수 있는 범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단독성의 회복은 꿈과 같은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이런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나와 타자가 동등하게 단독성을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거울 비유가 가지는 중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거울은 사유 현재가 아니라 존재 현재를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유의 현재성은 ‘어 그 사람이네!’라는 식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 만났던 어떤 것을 기억함으로써 그 기억을 현재에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반면 거울의 현재성은 그렇지 않다. 그저 도래하는 타자를 그 단독성에서 비출 뿐이다. 이처럼 장자가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존재 현재, 나아가 존재와 타자 중심적인 진리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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