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차이의 인정과 타자에 대한 배려’가 지닌 문제점
차이와 타자에 대한 존중은 아마도 현대 윤리학의 금언에 해당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를 긍정하고 배려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사이엔가 우리나라도 차이와 타자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는 담론이 주도적인 지적 흐름으로 번성해 가고 있다. 지금 그 어느 누가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자’는 주장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언론과 출판 도처에서 우리 지식인들도 앞다투어 차이와 타자를 진지하게 설교하는 대변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차이와 타자의 인정은 표면적으로 분명 훌륭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지식인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다음과 같은 질문과 반성을 빼먹고 있다. 왜 차이와 타자의 담론, 즉 차이와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는 윤리학적 담론이 서양에서 발생할 수 있었는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차이와 타자의 담론도, 해방 이후 서양에서 유행처럼 유입되어 들어온 모든 담론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에서 탄생해서 유입된 것임을 잊지 않을 수 있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차이의 인정과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입장이, 지구적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서양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것처럼, 강자의 입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지배층이 피지배층에 대해서, 또는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또는 서양이 제3세계에 대해서, 또는 기독교가 이슬람에 대해서 차이의 인정과 타자의 배려라는 담론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 그 역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약자는, 즉 여성은, 이슬람은, 제3세계는, 피지배층은 어쩔 수 없이 차이를 인정하고 타자를 배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미국이라는 타자를 배려하고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가? 북한과의 대치 상황이라는 위기상황과 미국과의 긴밀한 경제교류가 불가피하다는 경제상황 속에서 우리는 분명 미국과의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다. 그래서 강자로서의 미국을 배려하고 있지 않는가? 불공정한 무역보복도 감수하고, 불평등한 SOFA 협정도 잘 감수해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다른 약소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미국이라는 타자를 배려하지 못하고는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강자에 의해 내세워진 차이의 인정과 타자의 배려라는 명분은 항상 그 동일한 강자에 의해 철회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이루어진 이라크에 대한 무차별적인 미국의 공격이 이것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런 무차별적 공격과 동시에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공존을 긍정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과감히 철회했었다. 미국 내에 불었던 중동과 아시아 계열의 학생들에 대한 수많은 인권 침해는 이 점을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차이의 인정과 타자의 배려라는 담론에 유행처럼 편승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유행처럼 번지는 담론은 단지 우리나라보다 약한 국가와 국민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일자리를 찾아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동남아인들이나 연변의 한인들, 즉 우리나라에서 저임금과 폭력, 차별 등 온갖 부당한 위협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미국처럼 우리도 차이의 인정과 타자의 배려 또는 보편적 인권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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