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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조선전기의 다양한 전개 - 3. 초기의 대가들(김시습)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전기의 다양한 전개 - 3. 초기의 대가들(김시습)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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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17~1493 성종24, 悅卿, 梅月堂東峯淸寒子)은 타고난 재주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그 장래가 약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과 뜻이 서로 어그러져 지상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로써 즐길 거리를 삼으며 방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스스로 술회(述懷)한 대로 그는 소시적부터 질탕(跌宕)하여 세상의 명리(名利)나 생업(生業)과 같은 것은 돌보지 아니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산수(山水)로 방랑(放浪)하면서 경치를 만나면 시()나 읊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민병수, 梅月堂의 시세계, 人文論叢3,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1978 참조.

 

역대(歷代)의 소인(騷人) 가운데서 김시습(金時習)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써 말한 시인(詩人)은 그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어렵다. ()로써 자신의 정신적(精神的) 가치(價値)를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시적(詩的) 충격(衝擊), ()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적(詩的) 동기(動機)도 모두 시()로써 읊었다.

 

()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된 그는 시()를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했기에 시()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서 유출(流出)되는 모든 정서(情緒)가 시()로써 표현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與否)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를 자연발생적으로 표백하였을 뿐 시()를 짓는 데 힘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난잡(亂雜)하고 이속(俚俗)의 말이 많다는 비평(批評)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시()에서 추구(追求)한 이상(理想)은 오히려 오묘(奧妙)한 입신(入神)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운(聲韻)과 같은 것은 처음부터 그를 수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실천적인 유교이념(儒敎理念)으로 무장된 김시습(金時習)의 체질에서 보면, 그는 모름지기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했고 문장(文章)으로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에 이바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몸을 맡긴 곳은 자연(自然)이요 선문(禪門)이었으며 그가 익힌 문장은 시()를 일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문(禪門)은 이단(異端)이요 시작(詩作)은 한갓 여기(餘技)로만 생각하던 그때의 현실에서 보면, 그가 행()한 선문(禪門)에의 투적(投跡)이나 시작(詩作)에의 침잠(沈潛)도 이미 사회의 전범(典範)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적(行蹟)이 기괴(怪奇)하다든가 그의 시작(詩作)이 희화적(戱畵的)이라는 기평(譏評)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도학문학관(道學文學觀)이 지배하던 당시(當時)에 시()라고 하는 것은 한갓 선비들의 교양물(敎養物)이거나 여기(餘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김시습(金時習)에게 이것은 그 이상으로 심각하고 비극적인 것이다. ()를 위해 시()를 하는 낭비(浪費)를 일삼으면서도 시() 말고는 다시 할 일이 없었던 그였기 때문에,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시를 뿌리고 다녔지만 정작 이를 거두어 들이는 일을 그는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까지 그의 시문집(詩文集)에 전하는 시편(詩篇)만 하더라도 2,200여수(餘首)나 되지마는 실제로 김시습(金時習)의 시작(詩作)은 이보다도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문집(詩文集)을 편성하는 과정에서도 10년을 걸려 겨우 유편(遺篇) 3권을 수습하였다는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李耔, 梅月堂集序참조)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김시습(金時習)의 시()에서도 가장 흔하게 보이는 주제적(主題的) 소재(素材)자연(自然)’()’이다. 몸을 산수(山水)에 내맡기고 일생(一生)을 그 속에서 노닐다가 간 김시습(金時習)에게 자연(自然)은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그 일부(一部)가 되곤 했다. 평소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한 그는 특히 자연(自然)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현실(現實)에 대한 실의(失意)가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자연(自然)의 불변(不變)하는 영속성(永續性) 때문에 특별한 심각성(深刻性)을 부여하고 비극적(悲劇的)인 감정을 깃들게 했다.

 

일생(一生)을 두고 별일 없이 살아간 김시습(金時習)에게는, 어쩌면 ()’ 그것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인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가지고 자신과 자연(自然)이 함께 평화스런 상태에 놓여지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한의(閑意)가 일어났다가도 세사(世事)나 다른 사물(事物)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흔들어 놓곤 했다. 애써 신()과 세()에 무관심하려 한 그는 일체(一切)의 집념(執念)에서 초탈(超脫)하여 그야말로 태연하고 별일 없고 생각에만 잠길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놓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한의(閑意), 한극(閑極), 한적(閑適), 우성(偶成), 만성(漫成), 만성(謾成) 등 그의 시작(詩作)에서 보여준 그 많은 ()’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한일(閑逸) 속에서 자적(自適)하지 못했다.

 

그의 시작(詩作)에 대한 후대인(後代人)의 비평(批評)은 대체로 두 방향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힘들이지 않고서도 천성(天成)으로 시작(詩作)이 가능(可能)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 생각이 높고 멀어 초매(超邁) 오묘(奧妙)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前者)는 초보적(初步的)인 작시수업(作詩修業)을 논증(論證)한 천재론(天才論)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후자(後者)의 경우는 흔히 동양(東洋)의 시학(詩學)에서 추구(追求)하던 이상(理想)으로, 대개의 경우 이는 시인(詩人) 자신의 인격(人格)과 직결될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두 인상비평(印象批評)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인(詩人) 자신이 다만 오묘한 곳만 볼 뿐 소리와 연구에 대해선 따지지 않는다[但看其妙處 不問有聲聯]’이라 한 것을 고려한다면 김시습(金時習)의 시작(詩作)에서 체제(體制)나 성률(聲律)은 말하지 않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의 시작(詩作) 중에서 시선집(詩選集)에 뽑히고 있는 것은 20수에 이르고 있거니와 특히 다음의 시편(詩篇)들은 김시습(金時習)초매(超邁)”를 한눈으로 알게 하는 작품들이다. 산행즉사(山行卽事)(七律), 위천어주도(渭川漁釣圖)(七絶), 도중(途中)(五律), 등루(登樓)(五律), 소양정(昭陽亭)(五律),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五律), 고목(古木)(七律), 사청사우(乍晴乍雨)(七律), 등목교(獨木橋)(七律), 무제(無題)(七律), 유객(有客)(五律) 등이 그것이다.

 

등루(登樓)는 다음과 같다.

 

向晚山光好 登臨古驛樓 저녁 되자 산빛이 하도 좋아서 옛 역 다락에 올라 보았네.
馬嘶人去遠 波齧棹聲柔 말이 우니 사람은 멀리로 가고 물결 씹는 노젓는 소리 부드럽구나.
不淺庾公興 堪消王粲憂 유공(庾公)의 흥취도 얕지 않은데 왕찬(王粲)의 시름도 가시지 않네.
明朝度關外 雲際衆峯稠 내일 아침 관문 밖에 나갈 때에는 구름 가에 여러 봉우리 빽빽하겠지

 

조탁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흐름이 자재(自在)하여 군졸(窘拙)함이 없다. 유연(油然)히 피어 오르는 종편(終篇)의 의경(意境)은 꾸밈이나 일삼는 범용(凡庸)으로서는 감히 발돋움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중(途中)은 다음과 같다.

 

貊國初飛雪 春城木葉疏 맥국에 처음으로 눈이 날리니 춘천 땅에 나뭇잎이 듬성해졌네.
秋深村有酒 客久食無魚 가을 깊어 마을에는 술이 있는데 손 노릇 오래 하니 고기 맛을 모르겠네.
山遠天垂野 江遙地接虛 산이 멀어 하늘은 들에 드리우고 강이 머니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孤鴻落日外 征馬政躊躇 외로운 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가니 나그네의 말발굽 머뭇거린다.

 

이 광원(廣遠)한 경지는 스스로 깨달았을 때만 가능한 세계다. 초매(超邁)한 그의 시세계가 모처럼 이룩한 성과(成果)라 할 것이다.

 

산행즉사(山行卽事)는 다음과 같다.

 

兒打蜻蜓翁掇籬 아이는 잠자리 잡고 늙은이는 울타리를 고치는데
小溪春水浴鸕鶿 작은 시내 봄 물에는 물새가 멱을 감는다.
靑山斷處歸程遠 청산이 끝났지만 돌아갈 길은 멀어
橫擔烏藤一个枝 등나무 한 가지 꺾어 비스듬히 메고 가네.

 

등나무 가지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니다가 그것도 힘에 겨워 비스듬히 등에 짊어지고 떠나가는 횡담오등일개지(橫擔烏藤一箇枝)’의 경지는 바로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시습(金時習) 자신의 모습이다. 뛰어난 걸재(傑才)라 하더라고 상상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이밖에도 그의 관동일록(關東日錄)에는 특히 명편(名篇)이 많다. 유객(有客), 등루(登樓), 도중(途中), 독목교(獨木橋)등도 이 가운데 드는 것들이다. 마지막 시도한 환속(還俗)의 꿈이 실패(失敗)로 끝났을 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를 수레에 싣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하고 관동(關東)으로 떠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관동행(關東行)이며 이때의 시편(詩篇)을 모은 것이 관동일록(關東日錄)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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