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용(南有容, 1698 숙종24~1773 영조49, 자 德哉, 호 雷淵)은 영조 시대의 문풍을 주도한 관각문인(館閣文人)이었지만, 앞서 살핀 이들과 마찬가지로 천기론적 시론을 펼치면서 시작을 겸하였다. 남유용(南有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에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시이다. 그 항상된 것은 산천초목(山川草木)에 있고 그 변하는 것은 풍운연월(風雲煙月)에 있다
天下者皆吾詩也, 其常在山川草木, 其變在風雲煙月. 『雷淵集』, 「鐘巖詩卷跋)
이 발언을 통해 경물에 대한 관심을 시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남유용(南有容)의 시세계를 다음의 「기우(騎牛)」를 통해 보기로 한다.
春雨濛濛過一簑 | 봄비가 몽롱하게 도롱이를 스쳐지나는데 |
片雲出峽與婆娑 | 조각 구름은 골짜기를 너울너울 빠져나간다. |
極知牛背便如許 | 소 등이 이처럼 편한지 잘 알겠으니 |
笑殺齊人叩角歌 | 제나라 사람의 고각가(叩角歌)를 비웃노라. 『대동시선(大東詩選)』 권6. |
도롱이를 스치는 뿌연 봄비를 맞으며, 너울너울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조각구름 아래 여유롭게 소를 타고 가는 시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특히 바깥짝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영척(寧戚)이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 등용되기를 구한 일을 비웃으며 소등을 편안히 여기는 흥취를 드러내고 있어 관각의 문인으로서는 드물게 보이는 야인(野人)의 여유를 읽게 한다.
다음의 「과삼전도유작(過三田渡有作)」은 위 시와는 달리 남유용(南有容)의 역사의식도 함께 잘 드러낸 작품이다.
石生不願堅以穹 | 돌로 나려거든 굳고 높기를 바라지 말지니 |
試看三田渡口碑 | 시험삼아 삼전도 어구의 비석을 보라. |
人生不願才且文 | 사람으로 남에 재주있고 글 잘하기 바라지 말지니 |
試讀三田碑上辭 | 시험삼아 삼전도 비석 위의 글귀를 읽어 보라. |
三田日夜流沄沄 | 삼전도에 주야로 강물이 넘실넘실, |
下流直接東江涘 | 아래로 흘러 곧바로 동강(東江)가에 이어지네. |
他年若過東江去 | 훗날 만약 동강을 지나간다면 |
莫以吾牛飮江水 | 우리 소 이 강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리라. 『대동시선(大東詩選)』 권6, |
삼전도비는 1636년 12월 청 태종이 대병을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남한산성에서의 항전도 보람없이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함으로써 백성이 어육(魚肉)을 면할 수 있었던 사실을 돌에 새긴 치욕의 비이다. 이 삼전도비는 이후 이곳을 지나는 문인들로 하여금 비분강개의 시를 남기게 하였지만, 남유용(南有容)의 이 시는 쉽사리 강개에 흐르지 않고 진정(眞情)의 유로(流露)만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남유용(南有容)의 시를 두고서 이천보(李天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로는 고인에게서 법을 취하지 않고 아래로는 요즘 사람에게 영합하려 하지 않으니 오직 스스로 각자의 적성에 맞도록 할 뿐이다.
上不取法於古人, 下不求合於今人, 惟自各適其適. 「題鍾巖酬唱錄」
이는 곧 그의 시가 천기(天機)를 잃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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