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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 - 술지(述志) 본문

한시놀이터/삼국&고려

길재 - 술지(述志)

건방진방랑자 2021. 4. 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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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을 서술하다

술지(述志)

 

길재(吉再)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冶隱先生言行拾遺卷上

 

 

 

 

 

 

해석

臨溪茅屋獨閑居

림계모옥독한거

시내에 가까운 초가집에서 홀로 한가롭게 거처하니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달은 환하고 바람은 맑아 흥이 남아 있네.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바깥 손님 오지 않아도 산새 지저귀고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나무 둑으로 평상 옮겨 누워서 책을 보네. 冶隱先生言行拾遺卷上

 

 

해설

산림에 숨어 자연을 벗하여 학문에 전념하는 은서 생활의 정취이다. 암운이 감도는 여말(麗末)의 흉흉한 관계(官界)를 떠나, 금오산(金烏山)에 은둔하던 작자 만년의 작이다.

 

달을 읊고 바람을 일컬었으니, 일견 음풍농월(吟風弄月) 같으나, 그러한 시에 으레 떠벌리게 마련인 주흥(酒興)’이 없는 대신, 또한 그러한 시에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독서(讀書)’의 일과(日課)에서, 넉넉히 그의 도학풍(道學風)을 엿볼 수 있다.

 

임계(臨溪)’에 내재(內在)해 있을, 간단없는 자연의 음악, ‘시냇물 소리가 들려오고, 에워싼 산 너머로 찾아드는 달과 바람이 있고, 공생(共生)하다시피 가까이 지내는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 나뭇그늘 따라 자리를 옮아가며, 고인들과의 대화에 해가 저문다.

 

냇물 소리는 증감(增減)에 따라, 달은 망삭(望朔)에 따라, 바람은 온량(溫凉)에 따라, 산새들도 시후(時候)에 따라, 때때로 철철이 갈아드는 그 청신미(淸新味)는 삶의 즐거움을 매양 새롭게 해준다.

 

산조어(山鳥語)’는 저들끼리의 지저귐만이 아니라, 주인과의 대화의 뜻도 없지 않다. 집둘레의 나뭇가지에 오롱조롱 모여 앉아 상시로 지껄이는 녀석들! 이제는 경계할 주인이 아님을 확신한 듯, 예사로이 접근하는 친압한 사이가 돼 있다. 무료한 때이면 가끔 이 요설(饒舌)꾼들의 의중을 읽어, 몇 마디씩 통역 없이 응수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시의 요처는 와간서(臥看書)’이다. ‘간서(看書)’는 고인과의 만남인 만큼 ()’의 자세에 이의를 제기한 이도 있어,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같은 분은 우정 ()’를 대입한, 다음과 같은 보운(步韻) 모작(模作)을 시도하기도 했다.

 

臨溪小屋獨閒居

시냇가 오두막에 고요히 사노라니

暖日輕風興有餘

따스한 볕 실바람에 사는 맛이 넉넉하다.

山鳥來窺人不到

산새 와 기웃거리고 사람은 안 오는데,

柳陰移席坐看書

버들 그늘로 자리 옮겨 앉아서 책을 본다.

 

그러나 보라. 작자는 이미 수학중의 서생이 아니다. 독서라 하여 언제까지나 정금위좌(正襟危坐)를 고집함은 교주고슬(膠柱鼓瑟)일 뿐이다. 깊은 물을 건너려면 치마라도 추어올려야 할 것이며, 건너다 물살에 휩쓸리면 비록 제수의 손목일지라도 잡아 끌어내야 도리라 하지 않았던가? 앉아서 읽다가 거북해지면 누워서 읽게 됨이야 극히 자연스러운 순리일 뿐이다. ‘()’자 형의 앙와(仰臥)면 어떻고, 탄복부와(坦腹仆臥)면 어떠며, 곡굉횡와(曲肱橫臥)면 또한 어떠리. 수수편편(隨隨便便), 종심소욕(從心所欲)으로 하되 불유구(不踰矩)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니, 틀 속에서 자라 마침내 틀을 깨고 더 높은 차원인 무애자득(無碍自得) 융통원전(融通圓轉)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 하겠다. ()의 경지에 이른 이 유자(儒者)의 자관(自寬)의 금도(襟度)가 이리 너그러우매 와간서(臥看書)’의 여운은 그 유장함이 그지없다.

-손종섭,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1992, 155~156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문학통사

용재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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