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 고려 개성부(高麗 開城府)⑤ 본문

한시놀이터/조선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 고려 개성부(高麗 開城府)⑤

건방진방랑자 2021. 4. 14. 08:42
728x90
반응형

고려 개성부(高麗 開城府)

 

유득공(柳得恭)

 

 

指點前朝宰相家 廢園風雨土牆斜

牧丹孔雀凋零盡 黃蜨雙雙飛菜花

 

 

 

 

해석

指點前朝宰相家
지점전조재상가
고려 재상의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廢園風雨土牆斜
폐원풍우토장사
해진 뜰에 바람과 비로 흙과 담장 기울어졌네.
牧丹孔雀凋零盡
목란공작조령진
목란과 공작이 시들고 영락해 다했고
黃蜨雙雙飛菜花
황접쌍쌍비채화
노란 나비만이 쌍쌍이 유채꽃에 나네.

 

 

해설

이 시는 우리나라의 강역(疆域)에 존멸(存滅)했던 21국의 도읍지를 회고시(懷古詩)로 노래한 것이다.

 

위의 시는 고려에 대해 노래한 것 가운데 한 수로, 모란(牧丹)과 공각을 통하여 사치와 자기 본분을 잃은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망국(亡國)에 대한 감회(感懷)를 읊은 것이다.

 

유득공(柳得恭)은 이 시 외에도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를 지어 역사지리 분야에서 위상을 높이고 있다. 그런데 유득공이 이 시를 지은 동기는 무엇인가?

발해왕조까지는 진취적, 행동적이었던 역사의지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약화되어 당시에는 단순한 잠재의식만으로 남게 된 북방경략(北方經略)의 문제를 겨레 앞에 다시 각성, 인식시키기 위해서 발해고를 편술하고 이십일도회고시를 읊었다(송준호, 유득공의 시문학 연구).”라는 견해도 있고,

애초의 창작의도는 중국 측에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체제와 내용 또한 중국 문사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이철희, 18세기 한중 문학 교류와 유득공).”라는 견해도 있다.

 

유득공은 제이십일도회고시(題二十一都懷古詩)에서, “회상해 보니, 무술(1778)년 무렵 종현(지금의 명동성당 부근) 부근 산턱에 우거하고 있었다. 낡은 집 세 칸에 붓과 벼루, 칼과 자가 뒤섞여 있었는데, 이런 것이 싫증나서 자그만 채마밭에 자주 앉아 있게 되었다. 콩 넝쿨과 무꽃 위에 벌과 나비가 한가로이 날아드니, 비록 밥 짓는 연기가 여러 번 끊겼지만, 의기는 소심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때때로 우리나라의 지지를 열람하면서 한 수의 시를 얻으면 여러 날을 고심하며 읊조리게 되니, 어린 아들과 계집아이 종이 모두 이를 듣고 외울 정도였다. 내 마음 씀이 얕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해에 무관 이덕무(李德愁)와 차수 박제가(朴齊家)가 연경에 가게 되어, 한 부를 베껴 반향조(반정균) 서상에게 부쳤다. 반향조의 답장을 받아보니, 크게 감탄하고 칭찬을 하면서, ‘죽기ㆍ영사ㆍ궁사 등 여러 체의 좋은 점을 겸하여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묵장 이정원(李鼎元)은 절구 한 수를 써 주었고, 축덕린(祝德麟)은 따로 또 한 권을 달라고 하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못 즐거워할 일이며, 후세에 전해지고 전해지지 못하고는 꼭 논하지 않아도 된다[憶戊戌年間 寓居鍾岡 老屋三楹 筆硯與刀尺雜陳 以是爲苦多 坐小圃之傍 荳棚菁花 蜂蝶悠揚 雖炊烟屢絶 意氣自如 時閱東國地誌 得一首輒苦吟 稚子童婢皆聞而誦之 可知其用心不淺也 是歲懋官次修入燕 手抄一本 寄潘香祖庶常 及見潘書 大加嗟賞 以爲兼竹枝詠史宮詞諸軆之勝 必傳之作 李墨莊爲題一絶 祝編修另求一本 異地同聲 差可爲樂 傳不傳不須論也 己亥以後被聖主恩 七年七遷官 俸祿足以資衣食 堂宇足以置筆硯 顧職務倥偬 不喜作詩 縱有作皆率易而成 非復疇昔之苦吟 公退之暇 見此卷爲兒輩所讀 不覺悵然 題之如此].”라고 하여, 이 시가 당시 중국에 관심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십일도회고시는 중국에 관심을 받았던 것이며, ()와 역사(歷史)가 공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다산(茶山)기연아무진동(寄淵兒戊辰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일을 인용하는데,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 모름지기 삼국사고려사국조보감여지승람징비록연려실기술과 기타 우리나라의 문헌들을 취하여 그 사실을 채집하고 그 지방을 고찰해서 시에 넣어 사용한 뒤에라야 세상에 명성을 얻을 수 있고, 후세에 남길 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유득공의 십육도회고시(이십일도회고시를 말함)는 중국 사람이 판각하여 책으로 발행했으니, 이것을 보면 증험할 수 있다[雖然我邦之人, 動用中國之事, 亦是陋品. 須取三國史高麗史國朝寶鑑輿地勝覽懲毖錄燃藜述(李道甫所輯), 及他東方文字, 採其事實, 考其地方, 入於詩用, 然後方可以名世而傳後. 柳惠風十六國懷古詩, 爲中國人所刻, 此可驗也].”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 295~297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전문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