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류동에서 장난스레 쓰다
홍류동희제(紅流洞戲題)
이건창(李建昌)
紅流洞裏萬山靑 四壁周遭削玉屛
今古游人題姓字 多於八萬大藏經
大書深刻競纍纍 石泐苔塡誰復知
一字不題崔致遠 至今人誦七言詩 『明美堂集』 卷三
해석
紅流洞裏萬山靑 홍류동리만산청 |
홍류동 속 뭇 산 푸르고 |
四壁周遭削玉屛 사벽주조삭옥병 |
네 벽 둘레[周遭]가 옥 병처럼 깎였네. |
今古游人題姓字 금고유인제성자 |
고금의 놀던 사람이 성과 자를 써서 |
多於八萬大藏經 다어팔만대장경 |
팔만대장경보다 많다지. |
大書深刻競纍纍 대서심각경류류 |
다투어 거듭거듭[纍纍] 큰 글씨로 깊이 새겼지만 |
石泐苔塡誰復知 석륵태전수부지 |
돌이 깨지고 이끼가 메운다면 누가 다시 알랴? |
一字不題崔致遠 일자부제최치원 |
한 글자도 쓰지 않았던 최치원은 |
至今人誦七言詩 지금인송칠언시 |
지금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칠언시를 외운다네. 『明美堂集』 卷三 |
해설
이 땅의 경승지면 어디서나 보게 되는, 암석에 새긴 이름들…… 깎아지른 벼랑에 대서특필(大書特筆)로 새긴, 공사(工事)로도 큰 공사인 이름에서, 대소심천(大小深淺) 갖가지 필체로 새겨 놓은 올망졸망한 이름들이, 이 가야산의 홍류동에도 도처에 늘비함을 본다.
그 이름들은 서로 돋보이려고 전인(前人)들의 이름 사이를 비집고, 더 크게 더 깊게 새겨져 있다.
일찍이 이 땅에 산 적이 있었노라는 그 수많은 이름들이, 고금(古今)을 이웃하여, 저마다 ‘이리를 보아 달라.’, ‘나를 기억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안달하고 있는 듯한 정황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저렇게 남기는 이름이 어찌 남기는 이름이 되냐? 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누구의 몇 대손이며 몇 대조인지 어느 누가 알 것이며, 안들 뭣할 것인가? 더구나 풍마우세(風磨雨洗)하여 돌도 결 일어 이지러지고, 획마다 이끼 메여 판독(判讀)조차 못하게 됨에서랴? 실로 한심한 속물들의 짓거리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저렇게 하여 남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덕망이나 학문이나 인격으로 남는 향기로운 이름이 아니라, ‘산천을 훼손한 자가 바로 나 아무개요.’ 또는 ‘나 아무개는 요명(要名)이나 하는 외식인(外人)이요.’하는 자기 거풍의 냄새 나는 이름으로나 남는 외에 다시 또 무엇이 남으리요?
보라, ‘최치원’님이야 이 홍류동에서 생애를 마친 분이지만, 그는 성명 삼자의 어느 한 자도 새겨 둔 데가 없고, 그의 칠언 절구인 ‘가야산’ 시의 어느 한 구도 새겨 둔 곳이 없지마는, 그러나 천년이 지난 이날도록, 사람들은 그의 시와 함께 그의 이름을 두루 외우고 있지 않는가.
탄식하며 다시 한번 바라본다. 저 즐비한 ‘이름’의 공동묘지! 싸느라이 바래진 글자들이 해골(骸骨)처럼 고요히 풍화(風化)되어 가고 있다.
냉소적(冷笑的)인 해학 속에 경세(警世)의 일침을 가한 풍자시이다.
최치원의 칠언시 「제가야산(題伽倻山)」은 다음과 같다.
狂噴疊石吼重巒 | 바위 바위 내딛는 물 천봉(千峯)을 우짖음은, |
人語難分咫尺間 | 속세의 시비 소리 혹시나마 들릴세라, |
常恐是非聲到耳 | 일부러 물소리로 하여 귀를 먹게 함이다. |
故敎流水盡籠山 |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홍류동에 들어 무릉교를 건너면, 절을 향한 5ㆍ6리쯤 되는 곳에 최치원의 ‘제시석(題詩石)’이 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狂噴疊石吼重巒…’이라 했다. 인하여 후인들이 그 바위를 ‘치원대(致遠臺)’라 부르게 되었다[伽倻山海印寺之洞曰紅流洞 入洞口渡武陵橋 向寺而寺五六里許 有崔致遠題詩石 其詩曰 狂噴疊石吼重巒… 後人因名其石曰致遠臺].”라는 기록이 있으니, 이 곧 농산정(籠山亭) 맞은 편석벽에 음각한 고운의 전기 둔세시(遯世詩)의 각자를 두고 이름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조 후인들의 의각(擬刻)일 뿐이다. 아무튼 본시의 작자는 이러한 각자나 기록들을 아예 문제삼을 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넘겼거나, 아니면, 그것들을 보지 못했음이 아닌가 여겨진다.
-손종섭,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1992년, 605~606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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