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안중근이 나라의 원수를 갚은 일을 듣고서
문의병장안보국수사(聞義兵將安報國讎事)
김택영(金澤榮)
平安壯士目雙張 快殺邦讎似殺羊
未死得聞消息好 狂歌亂舞菊花傍
海蔘港裏鶻摩空 哈爾濱頭霹火紅
多少六洲豪健客 一時匙箸落秋風
從古何甞國不亡 纖兒一例壞金湯
但令得此撑天手 却是亡時也有光 『韶濩堂詩集』 定本卷四
해석
平安壯士目雙張 평안장사목쌍장 |
평안 장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
快殺邦讎似殺羊 쾌살방수사살양 |
나라의 원수를 양 죽이듯 쾌활하게 죽였네. |
未死得聞消息好 미사득문소식호 |
죽지 않아 좋은 소식 들을 수 있으니 |
狂歌亂舞菊花傍 광가난무국화방 |
국화 곁에서 미치게 노래하고 난잡하게 춤추리. |
海蔘港裏鶻摩空 해삼항리골마공 |
블라디보스토크 항 속에 송골매 허공을 타다가 |
哈爾濱頭霹火紅 합이빈두벽화홍 |
하얼빈 어귀 우레 불꽃이 붉구나. |
多少六洲豪健客 다소육주호건객 |
얼마간의 육대주 호걸하고 굳센 나그네들이 |
一時匙箸落秋風 일시시저낙추풍 |
일시에 젓가락과 수저를 가을바람에 떨어뜨렸을까? |
從古何甞國不亡 종고하상국불망 |
예로부터 어찌 일찍이 나라가 망하지 않았겠는가? |
纖兒一例壞金湯 섬아일례괴금탕 |
소인배들이 한결 같은 예로 금성탕지를 무너뜨렸지. |
但令得此撑天手 단령득차탱천수 |
다만 하늘을 지탱할 수 있는 솜씨로 |
却是亡時也有光 각시망시야유광 |
도리어 망한 때에 빛나도록 하였네. 『韶濩堂詩集』 定本卷四 |
해설
이 시는 1909년 의병 안중근이 나라의 원수를 갚았다는 소식을 듣고 쓴 것이다.
황해도 평안 출신의 장사 안중근(安重根)이 두 눈을 부릅뜨고 양을 잡듯 나라 원수 시원하게 죽였다. 나는 죽지 않아 이렇게 좋은 소식 들을 수 있었으니, 국화 곁에서 미친 듯 노래하고 정신없이 춤을 춘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하늘에서 송골매 맴돌다가 하얼빈 가에서 권총을 쏘아 벼락불을 터트렸다. 얼마나 많은 육대주 호걸들이 모두 깜짝 놀라 동시에 수저를 떨어뜨렸을까?
예부터 어찌 일찍이 망하지 않는 나라가 있겠는가? 어떤 나라이든 다 망했는데, 소인배들이 하나같이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같은 강건한 나라를 무너뜨렸다. 다만 하늘을 떠받칠 수 있는 솜씨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망할 때 빛을 발하게 했다(1, 2수에 일었던 흥분이 세 번째 수에 이르면, 절제된 감정을 통해 ‘역사는 天運的이다.’라는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김택영(金澤榮)에 대한 평가는 ‘일제 침략에 반대하고 조선의 반침략 반봉건 애국투쟁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에선 애국시인(愛國詩人)이며, 문장(文章)으로 보국(報國)하겠다는 우국일념(憂國一念)을 가지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와 ‘동시대 시인들과 역사인식이나 현실인식에 차이가 있고 여타 시인들의 우국풍(憂國風)의 시와 차이가 있어 우국시인(憂國詩人)이라 하기는 어렵다.’는 비판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김택영은 1905년 중국으로 떠났고, 1910년 조선이 망하고 난 뒤 1912년 중국 국적을 취득한 행적으로 말미암아 양면의 평가가 발생한 듯함】.
창강(滄江)은 시(詩)뿐만 아니라 문(文)에 있어서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 김택영의 제자인 왕성순(王性淳)이 쓴 「여한십가문초서(麗韓十家文抄序)」에, “창강 김택영 선생이 개성에서 우뚝이 일어나 고문(古文)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니, 그 깊은 조예와 정밀한 지식은 이른바 ‘포정(庖丁)의 눈에는 온전한 소가 없다(기술의 오묘함을 찬양하는 말이다. 백정이 소를 19년 동안 잡고 나니, 소만 보면 갈라낼 곳이 눈에 환하게 보여 온전한 소가 없다고 한 고사가 있음. 『莊子』 「養生主」)’는 경지이다. 항상 ‘우리나라의 고문(古文)의 학은 김부식(金富軾) 공이 고려 때에 제창하여 이제현(李齊賢) 공이 계승하고, 그 후 3백 년에 장유(張維) 공이 조선에서 밝히고, 이식(李植)ㆍ김창협(金昌協)ㆍ박지원(朴趾源)ㆍ홍석주(洪奭周)ㆍ김매순(金邁淳)ㆍ이건창(李建昌) 공이 서로 계승하여 떨쳤으니, 체재는 다르더라도 모두가 문가(文家)의 정종(正宗)으로서 후인의 모범이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손수 그 글을 기록하여 ‘구가문(九家文)’을 만들었다가, 광무(光武, 대한제국 고종의 연호) 말년쯤에 배를 타고 회남(淮南)으로 가면서, 나에게 ‘구가문’을 주어 간직하도록 했다. 그 후 편지를 보내올 때마다 ‘구가문’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滄江金先生 崛起崧陽 以古文名天下 其造詣之深 識鑒之精 所謂庖丁氏之目 無全牛者 甞以爲本邦古文之學 金公富軾 倡之於高麗 而李公齊賢 繼之 其後三百年 張公維 明之於韓 而李公植,金公昌協,朴公趾源,洪公奭周,金公邁淳,李公建昌 相繼而作 雖或體裁之有別 而同爲文家之正宗 可以模楷後人 手錄其文 表爲九家 屬光武末 浮海之淮南 以九家者 畀性淳藏之 其後每抵書 未嘗不以九家爲言].”라 언급하고 있다.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하, 이담, 2010년, 372~373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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