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협소해져버린 문명인의 상상력
한편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재앙신이 바로 타타라 마을의 부족장 에보시의 총에 맞아 한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에보시가 가져온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여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응원을 보낸다. 화승총을 비롯한 무기 제작 기술에 뛰어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불로 연마한 철’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자연의 힘에 조화롭게 순응하던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 상징적인 이미지다. 불과 철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무기와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첨단의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추앙하는 에보시의 총에 맞은 멧돼지신이 재앙신으로 변했다는 사실, 재앙신의 저주는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때문임을 알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원령공주의 최대 적수도 바로 에보시다.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이끄는 부족장이자 걸출한 전략가로서 수많은 전쟁 경험도 갖고 있다. 에보시는 거리낌 없이 숲을 파괴하며 숲을 ‘자원’으로 이용하여 인간의 재화로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에보시가 타타라 마을 부족 전체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까닭은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 나병에 걸린 사람들, 사회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까지 모두 거두어주었기 때문이다(어쩌면 에보시의 선택은 ‘가장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자본가의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병에 걸린 노인은 에보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시타카에게 부디 그녀를 죽이지 말라고 애원한다. “자네의 분노와 슬픔은 잘 알겠네. 허나 저 분을 죽이진 말게. 우릴 인간 대접하는 유일한 분이라네. 우리의 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썩은 살을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셨지. 산다는 건 정말 힘들고 괴로워. 난 세상과 사람을 저주하지만 그래도 살고 싶어. 날 봐서라도 제발, 그분을 죽이지 말게.” 노인은 아시타카의 연민을 자극하지만 그의 에너지는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삶에 집착하는, 더 이상 새로운 삶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기연민처럼 보인다.
에보시는 ‘인간의 생존’과 ‘자연의 이용’을 등가로 판단한다. 자연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자신은, 그리고 자신이 속한 부족은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신들만 사라지면 괴물들도 보통 짐승이 되지. 숲에 인간의 빛이 들고 들개가 잠잠해지면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어. 원령공주도 인간이 될 수 있겠지. 시시신의 피는 병 치료에 유용해. 나병환자들도 고치고 자네 상처도 고칠 수 있을지 몰라.”
에보시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이자 용의주도한 정치가이자 주도면밀한 전쟁전문가의 원형으로 그려진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개발한 화승총은 그 시대 최고의 전쟁 무기였던 것이다. “이 총은 괴물이건 무사의 갑옷이건 모두 박살낸다.” 아시타카는 화승총의 위력에 놀라 타타라 마을 사람에게 말한다. “숲을 빼앗고, 산의 신들을 재앙신으로 만들고도 모자라 그 총으로 원한과 저주를 살 셈이오!” 아시타카는 아직 원령공주와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했지만 인간이길 포기해가면서까지 들개와 동거하며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녀의 뼈아픈 고독을 이해한다. 원령공주에게 숲의 빛깔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정확히 등가인 것이다.
그녀는 자연을 그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기를 선택한 존재다. 만약 바슐라르가 『원령공주』를 보았다면 자신이 꿈꾸던 낙원을 가꿀 용맹스러운 전사의 이미지를 바로 여기서 찾았다며 감탄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자신의 행복과 숲의 행복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숲의 수호신인 시시신의 피를 질병 치료에 이용하려는 문명인의 상상력으로는 결코 원령공주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잃어버린 반 고흐의 황금빛을, 잃어버린 원령공주의 초록빛을, 마르크 샤갈의 잃어버린 낙원의 빛깔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샤갈의 그림은 대지와 인간이 반목하지 않았던 시대의 바로 그 원초적 낙원을, 대지의 목소리에 인간이 귀 기울일 줄 알았고 인간이 ‘땅처럼 숨 쉬는 법’을 알고 있었던 시대의,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만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낙원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낙원에 대한 모든 몽상가의 원초적 몽상에 있어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 (……) 생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명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초벌그림이란 결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불꽃뿐이다. 샤갈이 그리는 존재들은 모두 최초의 불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정경에 있어서, 샤갈은 발랄함의 화가인 것이다. 그의 낙원은 싫증나지 않는다. 새들의 비상과 더불어 무수한 눈뜸이 하늘에 울려 퍼진다. 대기 전체에 날개가 돋쳐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이가림 역, 『꿈꿀 권리』, 열화당,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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