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유민서사시의 전형을 담다
흉년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도는 노부부를 만나서 대화하는 형식으로 엮인 내용이다. 가뭄, 홍수, 병충해 등등 재난을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기에 흉년이 잦았던 데다가 국가기구의 수탈 또한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였다. ‘서사시적 상황’은 실로 전근대적인 왕조체제가 끝나는 시점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 한다”라는 옛날 속담이 있는데 ‘인정(仁政)’과 ‘애민(愛民)’을 이념으로 삼고 있었지만 가난 구제를 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었는지 의문시되는 터였다. 이는 조선조만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전지구적 현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흉작은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데 경우에 따라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사태가 야기되기 때문에 유민을 테마로 삼은 서사시는 거듭거듭 새롭게 씌어진 것이다.
이 노인과의 문답은 유민 서사시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어제까지 행복하기만 했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자식들과도 헤어져서 늙은 양주(兩主)가 길에서 탄식하는 정경이 그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절실하게 전해온다. 그리고 유민도는 유민시에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데 “유민의 괴로운 소리는 담기지 못했[鄭公雖有圖 苦語未寫得]”기에 지금 시인이 유민의 소리를 생생하게 들리도록 이 시를 쓴다는 말이 진정성을 더하고 있다.
이 시인은 유민에 대해 연민의 정서를 7언절구의 형식으로 담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기에 여기에 두 편을 소개해둔다.
객점에서 행인들의 주고받는 말
점야기행인상어(店夜記行人相語)
孤店秋宵悄不眠 | 객점의 가을밤 잠 못 이루고 |
臥聞征客說凶年 | 주고받는 흉년 이야기, 자리에서 듣노라. |
相逢各問家鄕事 | 만나는 사람마다 고향 소식 묻는데 |
太半流離死道邊 | 태반이나 유랑하여 길에서 죽어간다는군. 『白軒先生集卷之一』 |
촌로와의 문답
촌옹문답(村翁問答)
行見村翁問生事 | 길에서 촌로에게 “사는 형편 어떠오?” 물으니 |
答云今歲莫言豐 | “금년엔 풍년 들었다고 말도 마오. |
豐登未足償凶歉 | 풍년이랬자 흉년을 메우기도 부족한데 |
官府催科與昔同 | 관가의 부세독촉 예전과 마찬가지라오.” 『白軒先生集卷之一』 |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 1권, 창비, 2020년, 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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