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명사로서의 자연이 아닌 상사(狀詞)로서의 자연
‘자연(自然)’은 모든 고문(古文)에서 단 한번도 요즈음의 말처럼 명사로 쓰인 적이 없다. 모든 문맥에서 그것은 어김없이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일 뿐이다. 금세기 사이놀로지(sinology, 중국학)의 대가, 아더 웨일리(Arthur Waley)는 ‘자연(自然)’을 ‘What-is-so-of-itself’로 번역했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상태의 기술과 우리가 생각하는 명사로서의 자연은 너무도 먼 거리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어의 자연은 기껏해야 ‘그린 벨트(Green Belt)’를 의미할 뿐이다. 인공적 문명이 가해지지 않는 푸른 숲을 명사화해서 자연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노자에게는 그러한 명사로서의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푸른 숲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쉼이 없이 변하는 집합체일 뿐이다. 어떻게 자연이라는 명사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인간이 문명을 버리고 돌아갈 수 있는 자연이라는 명사가 기다리고 있겠는가? 허(虛)가 곧 실체로서의 빈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노자철학의 ‘자연(自然)’은 분명 실체화된 명사로서의 ‘그린 벨트’는 아닌 것이다. 홉스나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state of nature)’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自然)이란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모든 존재, 즉 만물(萬物)의 존재방식을 기술하는 상태어이다. 어떠한 존재이든 그 존재가 자연과 비자연이라는 명사적 개념으로 분류되는 상황은 없으며, 어떤 존재이든지를 불문하고 그 존재의 존재방식이 ‘스스로 그러하면’ 곧 그것은 자연이 되는 것이다.
소나무 한 그루가 곧 자연은 아니다. 그것은 서양인들의 명사적 개념 속에서의 자연일 수는 있다. 그러나 소나무 한 그루라도 그것이 분재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그러하지 못하게 자라날 때는 그것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하지 못한 비자연이다. 일본인들의 자연(名辭)은 대개가 자연(狀詞)이 아니다.
자연은 비단 소나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멘트는 비자연이고 소나무는 자연이라고 말할 근거가 과연 있겠는가? 세멘트도 다 자연에서 구한 것이다. 세멘트도 자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그러한 물리적 대상이 아닌 인간의 마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 그러할 때는 그것이 곧 자연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인격을 가리켜 그 사람은 퍽 ‘자연스럽다’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의 인격을 가리켜서는 ‘어색하다,’ ‘인위적이다.’ ‘억지스럽다,’ ‘가식적이다.’ ‘꾸민다’ 등등의 말을 쓴다. 우리의 통상어에 ‘자연스럽다’라는 표현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자연(自然)’의 의미에 가장 가깝게 오는 말일 것이다.
저 들판에 자라는 나무 하나 하나가 모두 스스로 그러하게 자랄 때 그것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모든 나무의 자라는 모습이 ‘생이불유(生而不有)’ 할 때 그것은 그 환경에서 가장 스스로 그러한 모습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안선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스스로 그러하게 형성된 것이고 그에 따라 갯벌과 생태계가 모두 스스로 그러하게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그 해안선이 새만금의 모습으로 비뀐다고 하는 것은 분명 스스로 그러하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스스로 그러하지 않게 인간의 조작이 가(加)해지는 것이다. 이 스스로 그러하지 않음이 바로 ‘인위(人爲)’요, ‘유위(有爲)’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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