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柳永模)의 언어세계
서양인에게 그런 책은 물론 『신약성서』이다. 여기서 서양인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제국문명의 직ㆍ간접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땅에 가톨릭의 역사는 교황청체제에 의한 교권의 확립에 주력한 역사이기 때문에, 순교와 정의로운 항거의 역사는 있을지라도 독자적인 사상의 역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데 비하면 그래도 개신교는 인간의 사유를 규제할 수 있는 중앙의 통제력이 박약하고, 교회(에클레시아) 단위의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구속력만이 일차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한 구속력을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신학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
이렇게 자유롭게 살면서 독창적인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전개한 격동기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우리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를 들 수 있다.
그는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이미 유ㆍ불ㆍ도를 통달한 달인이었으며 특히 조선 고유의 선(仙)의 전통을 몸으로 체현한 수련의 도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사유는 조선인 고유의 체질적 사유의 격의(格義)를 벗어날 수가 없다. 더구나 그의 사유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택스(syntax, 통사론)에 있어서나 세멘틱스(semantics, 의미론)에 있어서 서구화된 한국어가 아니라, 서구적 개념에 물들기 이전의 순결한 조선인의 언어소재를 자신의 고유한 생각의 어휘로서 개념화하기 때문에 이미 우리에게 상식화된 의미론으로써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파악하기가 어려운 만큼 고유한 언어의 색조(tonality)가 있고, 따라서 그만큼 매력(charms)이 있다. 사실 그의 언어는 난해한 영어나 독일어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다행히 그의 강의를 줄곧 수강했으며 그의 언어를 이해하고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 1919~2009)에 의하여 해설되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솔 출판사에서 나온 『다석일지공부』 전7권은 그 기념비적 저작이다】.
재미있게도 다석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효(孝)’라는 개념으로써 파악한다. 결국 기독교라는 것도 알고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이다【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은 상징어이며 구체적인 생리 언어가 아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라 할지라도 그 상징적 개념의 보편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엄마와 딸’이라고 말해도 그 상징성은 완전히 동일하다】.
유대교에서는, 즉 『구약』의 세계에서는 야훼라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종족의 신이며 우주의 창조자이며 인간 개인의 실존과는 거리가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의 평범한 삶의 세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실존적 체험에서 발하는 느낌의 ‘아버지’ 혹은 ‘아빠’【‘아바(Abba)’라는 아람어 표현】라는 표현으로써 호칭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실존적 체험 속의 ‘아빠’【희랍어로는 ‘파테르’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아람어 ‘아바’의 표상이다】로서 인식한다. ‘아빠’로서의 하나님 표상은 복음서에 170회나 등장하는데 공관복음서에 61회, 그리고 요한복음서에 109회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의 자기인식이 철저히 ‘아빠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즉 하나님이 아빠화되어 있고, 예수 자신이 아들화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초월적 질투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민족의 관계가, 자비로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보편적 인간 개개의 실존의 관계로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정으로 자애로운 아버지의 말씀에 순복(順服)하는 아들로서 예수가 자기를 규정할 때, 예수는 효자(孝子)일 수밖에 없다.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God) |
↕효(孝)의 교감 |
효자 예수(Jesus) |
다석에게 있어서 예수는 온전한 효자상이다. 사실 이러한 다석의 언어가, 말초적으로 서구신학의 세뇌만을 받아 온 천박한 식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개화기를 통하여 장옷으로 몸을 가리고 천막교회를 나들이하던 조선의 여인들이나 오늘날 대형교회에 우글거리는 신도들의 심층의식에 깔려있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의 시니피에(signifié)의 실상을 다석은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언어라는 기호는 발성을 통한 청각 이미지와 그것이 지시하는 개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 청각 이미지(sound image)를 시니피앙(signifiant, signifier) 혹은 기표(記表)라 부르고, 그 개념(concept)을 시니피에(signifié, signified) 혹은 기의(記意)라고 부른다. 소쉬르는 이 양자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보는 반면 라캉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은 항상 불안정하며 기표가 기의에 대하여 우월하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기표 즉 청각 이미지에 어떠한 개념을 부착시키는지는 의문부호로 남을 수밖에 없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석은 한국민중의 무의식 속으로 ‘미끌어져’ 내려가 버린 시니피에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바이’라는 이 한마디가 조선민중의 기독교의 실제적 의미의 전부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효경』의 통속화로서 생겨난 조선왕조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서 세뇌시켜온 ‘아버지’의 가장 온전한 모습을 바로 ‘예수의 아빠’ 속에서 발견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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