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은 비성서적 논쟁
그러나 이러한 세 개념의 병치가 삼위일체(Trinity)의 논쟁을 불러 일으킬 하등의 이유는 없다. ‘성부ㆍ성자ㆍ성신’이라는 말은 복음서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가톨릭교회내에서 성립한 삼위일체 논쟁 이후의 독단론적인 교리개념일 뿐이다. 복음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버지(파테르)와 아들(휘오스)’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자기이해 속에서 일차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유대인 가정 속에서 지극히 일상적으로 쓰였던 토속적인 개념일 뿐이며 예수는 아예 아람어로 ‘아바’(Abba)라고 말한다(막 14:36, 로 8:15, 갈 4:6).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아주 친근한 호칭이다. 아버지(파테르)는 요한복음에서 115회나 사용되고 있다.
유대인 가정이나 한국인 가정이나 매우 유사한 가부장적 가치관에 지배되고 있으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의미를 매우 쉽게 감정이입하여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는 공경의 대상이 되는 권위로운 존재며, 아들에게 공부하라고 일하라고 명령하는 존재며, 재산을 쥐고 관리하는 존재며, 아들을 타지로 파견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의 일차적 의미를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의 대상으로 파악하질 않았다. 예수의 아버지는 자애로운 존재며,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편협하지 않게 파악하는 존재며, 아들에게 무한정의 사랑을 퍼붓는 존재이다. 요즈음은 좀 악독한 아버지도 있기는 하나 우리가 자식을 기르면서 느끼는 정상적 감정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우리가 자랄 때도 엄마는 매섭게 야단을 잘 치지만, 아버지는 옆에서 응석을 받아주는 자비로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누가복음의 그 유명한 탕자(Prodigal Son, 눅 15:11~32)의 비유가 아주 드라마틱하게 표현해주고 있듯이, 아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고 어떠한 방탕한 생활을 했더라도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주는, 천번 만번이라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즐거워하는 아버지,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풍류의 잔치를 열어주는 아버지가 곧 예수가 인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신적 존재’(Divine Being)라기보다는 ‘자비의 품’(Bosom of Benevolence)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 느낌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하여 아들은 내가 아버지보다 못한 열등한 존재라고 느낄 수도 있고(요 14:28), 또 아버지와 동격의 존재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자신감을(요 10:30)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러한 표현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하는 존재론적 문제가 생겨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나의 『요한복음강해』 100 참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병렬되었다 해서 이것이 하나냐 둘이냐 셋이냐 따위의 문제가 생겨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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