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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은나라와 주나라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은나라와 주나라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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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나라와 주나라

 

 

우선 공자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일관된 거시적 축은, 바로 공자의 족보에 관련된 ()과 노()’라는 두 문화의 패러다임이다. 송과 노는 곧 중국고문명의 쌍벽인 은()과 주()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은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이다. 반경(盤庚)이 현재 하남(河南) 안양(安陽) 소둔촌(小屯村)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상은 탕()으로부터 반경에 이르기까지 이미 5(五遷)을 했다고 하는데, 반경 이전의 사적은 정확히 구성되지 않는다. 상은 은에서 제신(帝辛, )에 이르기까지 8, 12, 273년간 존속했다. 혹자는 나라이름을 부를 때는 상()이라 해야 옳고, 은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을 멸망시킨 주()가 경멸의 뜻으로 지역이름을 따라 부른 것이라 말하나, 실제로 상이라는 나라이름도 탕의 조상 설()이 분봉된 지역의 이름에서 온 것이므로, ()으로 도읍한 이후는 은나라로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상은 실제로 은으로 도읍한 이후에는 국호를 은으로 바꾸었다. 상대(商代) 전체를 부를 때는 은상(殷商) 혹은 상은(商殷)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자는 상()이라는 표현을 안 쓰고 은()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당시의 객관화된 상식적 용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폭군 제신(帝辛, 띠신, Di Xin) (, 저우, Zhou)의 이야기나,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탕녀 달기(妲己, 따지, Da-ji)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항상 한 왕조의 끝에는 음탕한 폭군이 자리잡게 마련이다. 사마천은 은본기(殷本紀)11에서 주()를 평가하여, 타고난 자질이 사리를 명료히 분변하며 판단력이 매우 빠를 뿐 아니라 듣고 보는 것이 매우 민첩했고 힘이 보통사람보다 출중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帝紂資辨捷疾, 聞見甚敏; 材力過人, 手格猛獸]. 사실 주()에 대한 실상은, 후대의 왜곡된 자료에 의해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백이숙제가 그토록 주를 정벌하러가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눈물 흘리며 불인(不仁)하다 간했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그 실상을 다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여하튼 주()는 실정을 거듭하여 국민의 원성을 샀을 것이고, 그래서 서백(西伯, 시뿨, Xi-bo) (, 츠앙, Chang)의 아들 무왕(武王, 우왕, Wu Wang)에 의하여 정벌되었을 것이다. 주는 바로 상()왕조의 마지막 임금이고, 무왕은 주()나라의 첫 임금이다. 오늘날 은허(殷墟, 인쉬, Yin-xu)에서 발굴되는 갑골문(甲骨文)이나, 여기저기 상나라의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는 정교하고 찬란한, 방대한 수량의 거대한 청동기 제기들은 상나라 문명이 얼마나 높고 섬세한 문화 수준을 과시하고 있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상문명(Shang Civilization)이 비록 시대를 앞서있다고 해서, 후대에 성립한 주문명에 비해, 초극(超克)되어야만 할 유치하고 난폭한 문명이었다는 식의 선입견을 우리는 배제해야한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양태의 고문명들이었다. 그리고 이 문명들은 순차적으로 기멸(起滅)한 것이 아니라, 상당기간 공존했던 문명들이었다.

 

상왕조는 서백 창의 아들 무왕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그것은 정치적 좌절이었다. 정치적 지도자들의 무리수가 국권의 파탄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상왕조의 문화와 전통은 멸망될 수 없었다. 은말(殷末)의 삼인(三仁: 세 명의 현자. 미자(微子)1)으로 우리는 미자(微子, 웨이쯔, Wei Zi)ㆍ기자(箕子, 지쯔, Ji Zi)ㆍ비간(比干, 삐깐, Bi Gan)을 꼽는다. 비간이 바른 간언을 많이 하자, 주는 성인의 마음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가 하고, 비간의 심장을 갈랐다. 미자와 기자는 모두 주임금들의 서형들이다. 미자의 모친은 은나라 멸망 직전의 국왕인 제을(帝乙, 띠이, Di Yi)의 첩이었다. 그녀는 미자와 기자를 낳았을 때는 정비(正妃)가 아니었다. 정비가 죽고 첩이었던 미자의 모친이 정실이 되어 낳은 아이가 바로 수(, 서우, Shou) 즉 주(). 그래서 정비로서 낳은 아들이 주였기 때문에 비로소 적자로 간주되었고, 주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니까 미자와 기자는 실상 주임금의 친형들이었던 것이다. 기자는 주의 황음(荒淫)과 방종(放縱)을 간곡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면서 타인의 노비가 되었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히고 만다. 미자는, 부자간에는 골육의 정이 있어 간해서 안 들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울고불고라도 할 수 있지만, 군신 사이에는 의()로서 맺은 것이라 불의(不義)하면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떠나 버렸다. 무왕은 주를 벌하고 왕위에 즉위하면서 기자를 석방하였다. 무왕은 그에게 천지의 대법(大法)을 묻자, 기자는 홍범(洪範)의 대도(大道)를 술()하였다. 이에 무왕은 그를 조선(朝鮮)의 제후로 봉하였고, 그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宋微子世家).

 

그리고 무왕이 주를 벌()하자, 미자는 종묘 안의 제기를 가지고 무왕의 군문(軍門)에 이르러 상의를 벗고 손을 등뒤로 묶게 한 후, 무릎을 꿇고 앞으로 나아가 무왕에게 고()하였다. 무왕은 현인 미자의 작위를 종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었다.

 

무왕은 그의 동생 단(, , Dan)을 곡부(曲阜)에 봉하고, 그 지역을 노()나라라고 불렀다. 그러나 단은 무왕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아직은 위태로운 상황이므로 그를 보좌하는 일이 시급하다 판단되어 그의 아들 백금(伯禽, 뿨친, Bo Qin)을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계속 남아 무왕을 보좌하였다.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는 대업을 이루었으나 2년 후에는 신병으로 붕어하고 만다. 그의 어린 아들 태자 송(, , Song)이 대를 이었는데 그가 곧 성왕(成王, 츠엉왕, Cheng Wang)이다. 무왕의 동생, 단은 실상 우리나라의 세조처럼, 어린 조카 성왕의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은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어린 조카 성에게 깎듯한 신하의 예를 다하면서 섭정을 베풀어 주나라 초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 단이라는 인물이 바로 항상 공자가 꿈에서조차, 오매불망 그리는 주공(周公, 저우꽁, Zhou Gong, the Duke of Zhou)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후, 그 마지막 임금 주의 아들 무경(武庚, 우 껑, Wu Geng) 녹보(祿父, 루후우, Lu Fu: 무경의 이름)를 은나라 당지에 제후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은나라의 유민을 종속시켰다. 정복당한 은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으며, 혁명초기의 불안정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은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은나라 사람을 다스리게 하는 매우 현명한 정책이었으나, 그것은 곧 주나라가 방대한 은나라 영역을 일시에 관장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주공은 자기의 두 동생 관숙선(管叔鮮, 꾸안수 시엔, Guan-shu Xian)과 채숙도(蔡叔度, 차이수 뚜, Cai-shu Du)로 하여금 무경의 사부가 되게 하여 보좌하게 하였고, 은나라의 역법과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以續殷祀].

 

그런데 이렇게 후하게 대접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왕이 죽자 무경이 관숙과 채숙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 일어난 주왕조를 배반했다. 물론 그것은 주왕조 입장에서는 배반으로 기술하겠지만 무경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항명이었다. 당시 은나라 유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벌(東伐)을 감행하고, 무경을 주살하고 친동생인 관숙을 죽였으며, 또 채숙을 멀리 추방시켜 버렸다. 주공은 이에 은나라의 유민을 모아 주()의 형이며 현자인 미자(微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상치우 시엔, Shang-qiu Xian) 부근 은나라 고지에 송(, , Song) 나라를 세우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자(微子) (, 카이, Kai: 본명이 계인데 한나라 경제景帝의 휘자를 피해 개로 쓴다)는 송의 시조가 되었고, 송은 은나라를 이어받은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하남의 상구(商丘)에 자리잡은 송과 산동의 곡부에 자리잡은 노는 지도를 놓고 보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곡부에서 서남쪽으로 약 200km 정도의 거리에 상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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