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쌍띠망
아사노 유우이찌(淺野裕一)씨는 최근 중국철학 학계의 한 문제작이라 말할 수 있는 『공자신화(孔子神話)』(岩波書店, 1997)에서 유교의 근원으로서의 공자의 삶 자체를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ressentiment)’【독일어로는 Empfindlichkeit가 이에 해당되지만 니체는 독일어 개념이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전달 못한다 하여 보다 압축적이고 참신한 불어적 표현을 선호한다. 영어로는 resentment】으로 가득찬 종교적 신비주의의 한 전형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공자는 하급무사의 한 사생아로서 천한 신분의 인간이었으며 주공이 확립했다 하는 주(周)나라 예악의 사도(斯道)를 한 몸에 구현할 정도의 작위나 체험이나 연출이나 문화적 배경을 소유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나라 문화에 대한 집념은 마치 지금 어느 사람이 잉카제국 전성기의 왕조의례를 정확히 한 몸에 구현하고 있다고 호언하는 정도의 환상이나 사기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환상에 공자는 집착했을까? 그의 일생은 정치권력에로의 지향성 일변도였으며, 그 지향성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무기로서 그러한 환상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향성의 궁극은 노나라 삼환(三桓)의 전복, 노나라 국공의 지위 획득, 결국 주나라 천자가 되고자 하는 일념에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념이 없었더라면, 위기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구현된 사도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므로 인간세가 자기존재를 임의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태연하게 앉아있을 정도의 돈키호테적 망상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꿈에서도 주공을 항상 그린 것은 결국 자신을 주공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것이며 그것은 문ㆍ무ㆍ주공의 역성혁명과도 같은 어떤 혁명의 주체로서의 자기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정치혁명의 꿈은 좌절되었고, 그 좌절을 아사노 유우이찌는 공자의 르쌍띠망(원망, 원한)이라고 불렀다. 공자의 사후 공자학단의 문제의식의 주류도 바로 이 르쌍띠망의 해원(解怨)이었다. 그것은 ‘실의(失意) 속에 세상을 떠난 공자의 혼을 구제하려는 노력’이었으며 ‘복수와 진혼(鎭魂)’의 달성이었다. 그들은 이 명(命)을 받지 못한 사나이를 지고의 신적 인간인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자공(子貢)으로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자사의 『중용(中庸)』에서 이미 공자를 ‘무관의 제왕’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이론적 틀을 완성시켰고, 맹자(孟子)는 ‘500년 주기의 공자 왕자설’과 ‘공자의 춘추 저작설’을 유포시켰다. 순자 역시 그의 제자들이 그를 공자에 못지않은 제왕(帝王)으로 묘사함으로서【『순자(荀子)』 「요문(堯問)」편】 이러한 흐름에 가담하고 있다. 제왕으로서 신왕조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은 공ㆍ맹ㆍ순의 공통된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춘추』를 중심으로 전개된 공자소왕설(孔子素王說), 신비적 공자상을 날조하는 위서(緯書)들, 그리고 13경 중에서 유독 경(經)이라는 명칭이 당초로부터 붙여진 『효경(孝經)』 속에서 이미 공자는 선왕(先王)을 대치하는 지고한 존재가 되었으며, 전국말에 『효경(孝經)』을 제작한 공자학파의 음모는 효(孝)라는 개념을 충(忠)으로 전환시킴으로써【니체가 말하는 부정적 ‘가치의 전도’】 통일제국의 치론(治論)을 완성하고 암암리 그 제국을 효치(孝治)의 공자왕조(孔子王朝)로서 모델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뒤로 한고조 유방(劉邦)도 황제에 즉위한 후 곡부에서 공자제사를 지냈고(BC 195),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주공의 제사를 폐하고 그 자리에 공자를 선성(先聖)으로 승격시키고 주신(主神)의 좌(座)에 앉혔다. 천하 주현(州縣)의 학교에 공자묘(孔子廟)를 설치시키고 정관(貞觀) 11년(637)에는 산동 연주(兗州)에 공자묘를 신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공자에게 선보(宣父)의 시호를 증(贈)한다. 그리고 개원(開元) 27년,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는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추증하는 조(詔)를 발(發)한다. 공자는 드디어 명실공히 왕(王)이 된 것이다. 그리고 송나라 3대왕 진종(眞宗) 조항(趙恒)은 1008년 태산에서 봉선제를 올린 후에 곡부의 문선왕묘(文宣王廟)를 방문하여 모든 위의(威儀)를 갖추어 배례하기에 이른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도 남경의 공자묘에 배례했고 곡부에 사자를 파견하여 공자제사를 올렸으나, 명나라 11대 황제 세종(世宗) 때에는 예송(禮訟)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그 여파로 공자를 상천(上天)의 제(帝)와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이 부당하다 하여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왕호를 박탈하고 그냥 ‘선성선사(先聖先師)’로 칭하고 제왕의 궁전을 의미하는 대성전(大成殿)도 묘(廟)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이족 왕조인 청나라가 들어서자 그들은 한족문화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공자에 관한 모든 신성성과 왕호를 회복시키고, 중화의 지배자로서의 정통성을 과시한다. 그리고 곡부의 공묘를 장대한 황제의 왕성(王城) 규모로 꾸미고 강희대제는 친히 공자묘를 방문하여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큰절 한다)’의 배례를 행하였다.
이러한 청조의 열광은 캉 여우웨이(康有爲, 1858~1927)의, 금문경학의 절대적 우위에 기초한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의 유교신학(儒敎神學)의 선양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캉 여우웨이는 선왕지도(先王之道)의 조술자(祖述者)로서의 공자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시ㆍ서ㆍ예ㆍ악ㆍ역ㆍ춘추 육경(六經)이 모두 공자의 창작이며, 따라서 육경에 나타나는 선왕의 예제(禮制)는 모두 객관적 사실(史實)이 아니라 공자가 구세(救世)를 위하여 선왕에 가탁(假託)하여 개제(改制)한 신제(新制)라는 것이다. 공자는 탁고개제(託古改制)의 제작권능을 발휘한 구세의 성왕이라는 것이다. 캉씨는 그가 산 시대의 변혁의 논거를 공자에 구하여 결국 공교(孔敎: 공자종교)를 만든 것이다. 아사노 유우이찌씨는 이 모든 국가종교로서의 유교의 죄악의 근원이 공자 자신에게 있다고 고발하면서 그의 장황한 논의를 하기(下記)의 신랄한 메시지로서 끝맺고 있다.
공자의 사기술사적인 인생이야말로, 그 이후의 모든 범죄행태를 결정적으로 방향지운 악의 원흉이다. 유교라는 것은 일개의 필부에 지나지 않았던 공자가, 실제로 공자왕조를 창건했어야만 했던 무관의 제왕(소왕)이었다고 믿고, 『춘추경』을 비롯한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기만 한다면 중국세계(中國世界)에 태평성세가 도래한다고 믿는 종교이다. 범부 한 사람의 과대망상과 원념(怨念, 르쌍띠망)이,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부정하고 세계에 복수를 성취하려고 하는 어두운 정열이, 이 세계에 기만과 허구에 가득찬 종교, 유교를 탄생시켰다
-『공자신화(孔子神話)』, 319
나는 예수에게 다양한 비판의 메스가 가해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공자에게도 다양한 시각의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사노씨는 근원적으로 너무 편협한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한문의 세계를 접근하고 있다. 한문의 세계를 해석하는 그의 논리는 너무도 서구적이며 너무도 평면적이다. 그러한 논리의 틀로써 한문의 자료를 나열하면 그 나름대로 매우 그럴듯한 구조가 부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의 르쌍띠망이 아닌 아사노씨 자신의 천박한 르쌍띠망의 소산일 수가 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아사노씨가 르쌍띠망을 니체철학의 전체적ㆍ유기적 맥락 속에서 근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은 단순한 ‘좌절과 복수’, 이런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예도덕(slave morality)과 관련되어서만 의미를 갖는 개념이며, 약자에게 나타나는 도덕적 이원성의 허구를 전제로 한다. 르쌍띠망은 약자가 겪는 경멸, 굴욕, 억압, 잠복된 증오, 무기력한 복수심으로 야기되는 반동적 감정이며 쓰라린 좌절의 반응체계이다. 니체는 말한다.
도덕에 있어서 노예의 반란은 르쌍띠망이 그 자체로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생산하게 될 때 가동되기 시작한다. 진정한 반응체계, 행위의 보상이 거부되는 성격의 르쌍띠망은 가상적인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상받는다.
모든 고귀한 도덕은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전개해 나가지만, 노예도덕은 그 출발부터 항상 ‘밖에 있는 것’, ‘자기와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부정이 곧 노예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가치를 설정하는 시선을 이렇게 전도시키는 것, 즉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밖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 이런 것은 실로 르쌍띠망의 본질에 속한다. 노예도덕은 존재하기 위하여 항상 먼저 대적적인 외부세계를 필요로 한다. 생리적으로 말해도, 그것은 반응하기 위하여서 외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노예도덕의 작용은 근본적으로 반작용인 것이다(On the Genealogy of Morals, I-10).
니체는 또 말한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신뢰와 개방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 반해【‘겐나이오스’, 즉 ‘고귀한 혈통의’라는 단어는 ‘정직한’, 그리고 ‘순박한’이라는 뉘앙스를 강조하는 말이다】, 르쌍띠망의 인간은 정직하지도, 순박하지도 않으며, 자기자신에 대해서 솔직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만 일삼는다. 그의 정신은 숨을 곳, 은밀한 골목길, 뒷문을 사랑한다. 은폐된 모든 것을 자신의 세계로, 자신의 안정으로, 자신의 생기(生氣)로 유혹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할 줄 알며, 잊어버리지 않고 꽁할 줄 알며, 기다릴 줄 알며, 잠정적으로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고 굴종할 줄 안다. 르쌍띠망의 인간 종족은 어떠한 고귀한 종족보다도 훨씬 더 영리하게 된다(Ibid).
니체가 르쌍띠망의 모델로 삼은 것은 유대민족의 종교적 성향이었다. 유대민족은 현실적인 허약함을 도덕적 이원론으로 극복하려 했고, 자신을 억압하는 자들의 가치를 전도시킴으로써 정신적인 복수를 감행했다. 선과 악의 확연한 구분은 선민의 축복과 타민족의 저주를, 구원과 멸절, 천국과 현세, 빛과 암흑의 타협할 수 없는 홍구(鴻溝)를 노출시켰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에게만 신의 축복이 내려지고, 고귀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힘있는 자들은 오히려 사악한 자, 잔인한 자, 음란한 자, 무신론자, 저주 받은 자, 망할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 가치전환을 상속한 사람이 바로 유대교에 가장 대적적인 것처럼 보이는 예수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복수의 정신이 아무리 섬세해도 도대체 이보다 더 위험한 미끼를 생각해낼 수 있단 말인가? 유혹하고, 도취시키고, 마비시키고, 압도시키고, 붕괴시키는 힘에 있어서 ‘신성한 십자가’라는 저 상징에,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저 전율할 만한 역설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마지막 극단적인 잔인함의 미스테리에 견줄 만한 것이 있을까?”
니체의 이토록 화려한 레토릭의 언어들은 단순히 문학적인 현시가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치가 전도되었다는 자각인 동시에 그가 살고 있는 현세를 개벽해야만 하겠다는 피 토함의 절절한 언어들이다. 그가 말하는 르쌍띠망의 독소는 단순히 유대인의 역사적 좌절과 복수를 지칭하는 사태가 아니라, 그 정신적 복수가 초월적 세계에로의 집념을 낳았고 그것이 현실적 선악의 허구적 근원이 되었으며 인간의 대지에서의 삶을 거부하게 만든, 인류의 피 속으로 2천년 동안 서서히 번져나간 독소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초인은 초월적 인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지의 의미’인 것이다.
공자는 우선 르쌍띠망의 주체로서의 인종적 단위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선민적 고민이 근원적으로 없다. 그리고 자기의 철학적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르쌍띠망이 전제로 해야만 하는 대적적 외부세계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공자의 삶에는 르쌍띠망의 반사적 결정체인 초월적 세계가 없다. 공자는 그러한 모든 초월적 허구를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하여 삶을, 귀신에 대하여 인간을, 하늘에 대하여 이 땅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공자는 철저히 대지의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대지의 의미를 발견하고 대지의 인간으로서 죽었다.
공자의 삶을 관철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정치권력에로의 지향성이라는 것은 부정할 건덕지조차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르쌍띠망의 픽션이 아닌, 바로 니체가 말하는 ‘빌레 추르 마하트(Wille zur Macht)’인 것이다. 이것은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가 말하는 ‘마하트(Macht, 힘)’는 우주의 자연적 생명력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과 그의 권력의지는 모두 우주의 생명력 속에서 용해되는 것이다.
아사노씨가 말하는 중국정치권력의 제도적 장치로서의 공교(孔敎)의 위험성은 분명 경계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것은 결코 가톨릭교황청과도 같은 제도적인 압제성을 과시한 적은 없다. 아사노씨는 주자학이나 양명학 같은 운동을 가톨릭 본류에 저항하는 프란시스 어브 아씨시(Saint Francis of Assisi, 1182~1226)의 참신한 방계종파운동과 같은 느낌으로 바라본다. 개인이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흐름은 국가종교로서의 유교의 대세에서 본다면 마이너한 신흥종교일 뿐이라는 것이다. 매우 계발적인 역설이긴 하지만, 아사노씨는 유교의 대세에 있어서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사노씨의 문제의식이 근본적으로 일본사회의 유교적 허구성에 있거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의 유교적 국민도덕을 가장한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를 표방하고 있다면 매우 존경스러운 학자의 태도이지만, 그렇다면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심화시키는 방향이 보다 정직하고 용기있는 태도일 것이다.
왜 애꿎게 공자라는 ‘오토코(おとこ, 男, 사내)’를 그토록 사감(私感)서린 언어로 저주해야만 할까? 아사노씨는 중학교 2학년 때 『논어』를 사서 보고 공자로부터 감동을 받으며 자라났다가 생애 어느 시점에 니체를 읽고 보다 적극적으로 공자를 사랑해야겠다는 심정이 생겨 본서를 집필케 되었다는 애매한 소리를 하고 있으나, 어찌하여 니체로부터의 감동이 니체가 증오하는 유대교 - 기독교 전통의 허상을 공자와 유교에 뒤집어 씌우는 허구적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어찌하여 니체가 증오하는 도덕의 계보를 초극하려고 노력한 공자라는 사나이를 그 계보에 종속된 인간으로 규정하려고 애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규명하려는 것은 유교가 아닌 공자라는 역사적 인간의 소박한 다면적 실상이다.
은(殷), 송(宋) | 주(周), 노(魯) |
죽음의 문화 | 삶의 문화 |
종교의 문화 | 인문의 문화 |
바카스적 문화 | 아폴로적 문화 |
주색의 문화 | 논어의 문화 |
정(情)의 문화 | 리(理)의 문화 |
춤의 문화 | 문자의 문화 |
취함의 문화 | 깨임의 문화 |
신기(神氣)의 문화 | 인(仁)의 문화 |
제(帝)의 문화 | 천(天)의 문화 |
저 하늘의 문화 | 이 땅의 문화 |
소인(小人)의 문화 | 군자(君子)의 문화 |
소인유(小人儒)의 문화 | 군자유(君子儒)의 문화 |
공자의 삶은 소유적(小儒的)인 르쌍띠망을 초극하고 진정한 강자인 대유(大儒)의 가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의 철학이 후대의 독존유술(獨尊儒術)적 정치이데올로기로 활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로마세계에 있어서의 국교(state religion)적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 도덕이념이며 초월적 권위나 묵시적 환상은 아니었다. 그 세속적 도덕이념이 정치적 권력과 결탁되어 저지르는 문제는 일반 정치제도의 보편적 성향의 한 패턴일 뿐이다. 물론 그 죄악의 탓을 그 남상에 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 공자는 이미 역사 속에서 그러한 후대적 규정으로부터 항상 새롭게 초탈되어왔다.
공자의 삶의 출발은 ‘죽음’이었다. 비천(鄙賤)한 삶의 환경 속에서 죽음의 제식과, 그 제식에 동반된 시례악(詩禮樂)을 익혔다. 그러나 공자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탈출하느냐에 있었다. 죽음의 가치를 어떻게 삶의 가치로 전환하느냐?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공자는 철저히 이 현세 속에서의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알고 싶어했다. 공자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죽음의 세계를 철저히 삶의 세계로 이전시키고 싶어했다. 그것은 곧 자기뿌리와의 결별이었다. 죽음의 가치를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그 열쇠는 인간 공자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이 바로 학(學, 배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논어』라는 서물의 첫 글자인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학(學)이라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의 열음’이다. 끊임없는 대지의 삶의 가능성을 향한 도전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수용이다. 공자는 그의 삶에 대한 자서전적 고백 속에서 그 첫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발하고 있다(「爲政」).
나는 열 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15세 즈음, 그의 어머니가 죽을 즈음, 그가 양호(陽虎, 양 후, Yang Hu)라는 필생의 숙적 사나이와 첫 대면을 할 즈음, 비천하게 살아온 자기 삶을 반추하기 시작할 즈음, 그는 학 즉 배움이라는 삶의 행위로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열 가호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있을 거야.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걸!(「公冶長」)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이처럼 공자의 젊은 삶을 자신있고 정직하고 소박하게 그려낸 명구절은 없을 것이다. 공자가 낙양에 가서 노자(老子, 라오쯔, Lao Zi)를 만났다든가, 청년공자가 또 제나라에 가서 장중한 소(韶)의 오케스트라 음악에 충격을 받는다든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공자의 삶이 얼마나 강렬한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충격으로 가득찬 것이었나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학의 대상은 물론 예(禮)였다. 그러나 공자의 학은 이 죽음의 예를 어떻게 삶의 예로 전환시키느냐 하는 학이었다. 이 학은 곧 요새말로는 정치(politics)와 교육(education)을 의미한다. 공자에게서 정치는 곧 삶의 예의 정치였다. 공자에게서 교육이란 곧 이 삶의 예를 제자들의 삶에 구현시키는 것이었다.
예(禮)는 곧 삶의 질서(Order of Life)의 총칭이었다. 그가 바로 주공의 태묘(太廟)에서 자신을 힐난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다[是禮也。 「팔일(八佾)」 15]라고 말했을 때의 예가 곧 고착된 의례로서가 아닌 삶의 상황적 질서를 의미했던 것이다. 공자는 이제 개비적인 삶을 탈피하여 철저히 정치적 삶을 추구하게 된다. 정치적 권력만이 그에게 예악의 실현의 기회를 허용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인용
'고전 > 논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사(士)의 새로운 의미 (0) | 2021.05.26 |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공자는 대부(大夫)가 된 적 없다 (0) | 2021.05.26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다이애스포라송 (0) | 2021.05.26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은나라와 주나라 (0) | 2021.05.26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개비의 세계 (0) | 2021.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