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나라 세 명의 인자(仁者)
此篇多記聖賢之出處, 凡十一章.
微ㆍ箕, 二國名. 子, 爵也. 微子, 紂庶兄. 箕子ㆍ比干, 紂諸父. 微子見紂無道, 去之以存宗祀. 箕子ㆍ比干皆諫, 紂殺比干, 囚箕子以爲奴, 箕子因佯狂而受辱.
孔子曰: “殷有三仁焉.”
三人之行不同, 而同出於至誠惻怛之意, 故不咈乎愛之理, 而有以全其心之德也.
楊氏曰: “此三人者, 各得其本心, 故同謂之仁.”
해석
此篇多記聖賢之出處,
이 편에선 성인과 현인의 출처를 많이 기록했으니,
凡十一章.
모두 11장이다.
미자는 떠났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微ㆍ箕, 二國名. 子, 爵也.
미와 기는 두 나라의 이름이다. 자(子)는 벼슬의 이름이다.
微子, 紂庶兄. 箕子ㆍ比干, 紂諸父.
미자는 주왕의 서형이다. 기자와 비간은 주왕의 숙부다.
微子見紂無道, 去之以存宗祀.
미자는 주왕의 무도함을 보고 떠남으로 종사를 보존했다.
箕子ㆍ比干皆諫, 紂殺比干,
기자와 비간은 모두 간언했는데 주왕은 비간은 죽였고
囚箕子以爲奴,
기자는 가두어 노예로 삼았고
箕子因佯狂而受辱.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함으로 욕을 당했다.
孔子曰: “殷有三仁焉.”
공자께서 “은나라엔 세 명의 인자가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三人之行不同,
세 사람의 행동은 같지 않지만
而同出於至誠惻怛之意,
같이 지극한 진심과 서글퍼하는 뜻에서 나왔다.
故不咈乎愛之理, 而有以全其心之德也.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치를 어기지 않아 마음의 덕을 온전히 했다.
楊氏曰: “此三人者,
양시(楊時)가 말했다. “이 세 사람은
各得其本心, 故同謂之仁.”
각각 그 본심을 얻었기 때문에 함께 ‘인(仁)’으로 일컬어졌다.”
○ ‘논어’ ‘미자(微子)’편의 첫 장이다. 은나라 말의 혼란기에 인(仁)의 덕을 실천한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의 사실을 기록하고 공자의 논평을 덧붙였다.
미자(微子)는 이름이 계(啓)이다. 은나라 제을(帝乙)의 장남으로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이복형이다. 주(紂)를 간(諫)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자 조상을 제사 지내는 제기들을 갖고 산서성(山西省) 노성(潞城) 동북쪽에 있던 미(微) 땅으로 갔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자 항복했는데, 무왕은 그를 미국(微國)에 봉하고 자작(子爵)의 지위를 주었다. 그래서 미자(微子)라고 한다. 뒤에 은나라의 뒤를 이어 송(宋)에 봉해졌다.
기자(箕子)는 이름이 서여(胥余)로, 주(紂)의 아저씨다. 주(紂)를 간했으나 듣지 않자,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노예(奴隸)의 신분으로 전락해서 숨어 지냈다. 주나라 무왕은 주(紂)를 정벌한 후 기자에게 천하를 다스릴 방책을 물었는데, 이때 기자는 홍범(洪範)을 진언했다고 한다. ‘사기’에는 기자가 조선(朝鮮)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다. 위지노(爲之奴)는 주(紂)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
비간(比干)도 주(紂)의 아저씨다. 미자가 떠나고 기자가 노예가 된 후 비간은 주(紂)를 강력하게 간했다. 그러자 주(紂)는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 구멍이 있다고 하니 심장을 열어보자’ 하고는 비간을 죽이고 심장을 열어보았다고 한다. 은나라는 기원전 1100년 무렵에 멸망당했다.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은 지성으로 군주를 섬기고 나라를 사랑했던 어진 이였다. 정약용은 세 사람의 행위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충효의 행위가 의(義)에 합치했으므로 그들의 인(仁)은 똑같다고 부연했다. 난세(亂世)에는 민족을 위하는 정의(正義)를 실천해야 진정 어진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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