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사당에서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며
단군사(檀君祠)
정두경(鄭斗卿)
有聖生東海 于時竝放勳
유성생동해 우시병방훈
扶桑賓白日 檀木上靑雲
부상빈백일 단목상청운
天地侯初建 山河氣不分
천지후초건 산하기불분
戊辰千歲壽 吾欲獻吾君
무진천세수 오욕헌오군 『東溟先生集』 卷之三
해석
有聖生東海 于時竝放勳 | 어떤 성인이 동해에서 나셔서 당시는 요임금 때【방훈(放勳): 『서경(書經)』 「요전(堯傳)」에 “옛 제요(帝堯)를 상고해 보니 방훈(放勳)이시니 공경하고 밝으며 문장(文章)이 나타나고 생각이 깊어 억지로 힘쓰지 않고 편안히 하셨네[曰若稽古帝堯 曰放勳 欽明文思安安].” 하였다. 방훈은 요의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큰 공훈’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에 동등했다네. |
扶桑賓白日 檀木上靑雲 | 부상에서 흰 해와 어울리고 박달나무에서 푸른 구름에 오르셨지. |
天地侯初建 山河氣不分 | 천지의 기후가 처음 세워질 때 산하의 기운은 나뉘지 않았네. |
戊辰千歲壽 吾欲獻吾君 | 단군이 즉위하던 무진년의 천년 장수를 나는 우리 임금께 바치고 싶어라. 『東溟先生集』 卷之三 |
해설
이 시는 단군의 사당에 대해 노래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회고적으로 영탄(詠嘆)하면서 민족사(民族史)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성인인 단군께서 우리나라에 나셨으니, 때는 중국의 성군(聖君)인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이다(우리 역사의 悠久함에 대한 自負心이 드러나 있음). 해가 뜨는 곳에서 흰 해를 맞이하노라면, 박달나무가 푸른 구름 위로 솟았으리라(당시 문화적 역동성에 대한 긍지). 무진년부터 누린 천 년의 수명을 나는 우리 임금님께 바치고 싶다(임금에 대한 忠情과 善政에 대한 기대를 표출함).
정두경은 의고주의적(擬古主義的) 시관(詩觀)을 지니고 있어서 영사시(詠史詩)ㆍ악부시(樂府詩) 등을 많이 지었다.
그는 「동명시화(東溟詩說)」에서, “선진과 서한의 문장은 읽지 않아서는 안 되며, 시 또한 올바른 것을 으뜸으로 삼으므로 마땅히 삼백 편을 종주로 삼아야 하고, 고시와 악부는 한위시대의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조식(曹植)ㆍ유정(劉楨)ㆍ포조(鮑照)ㆍ사령운(謝靈運)의 여러 명가와 도잠(陶潛)ㆍ위응물(韋應物)은 충담심수하여 자연스런 데서 나왔으므로 평소에 읽는 것이 좋다. 율시는 일정한 체제에 얽매이므로 본디 고체의 높고 원대함만 못하다[先秦西漢文, 不可不讀. 而詩又以正爲宗, 當以三百篇爲宗主, 而古詩樂府無出漢魏. 曹劉鮑謝諸名家曁陶靖節韋右司, 沖澹深粹, 出於自然, 可以尋常讀. 律詩拘於定體, 固不若古體之高遠].”라 하여,
학시(學詩)의 근본은 『시경(詩經)』이며, 고시(古詩)ㆍ악부시(樂府詩)의 경우 한위(漢魏) 이전을 배우되 진(晋)과 당(唐) 가운데서도 고기(古氣)가 있는 도잠(陶潛)과 위응물(韋應物)은 배울 만하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에서, “정동명의 시는 오로지 기(氣)를 주장으로 삼았다. 그 폈다 움츠리는 변화가 자못 이우린(李于鱗, 明나라 문장가 李攀龍)과 비슷하면서도 비교적 탁(濁)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 중에 거벽이라 할 수 있도다! 그의 시집은 다만 11권이 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그가 지은 「시풍(詩諷)」을 크게 찬양하기를 ‘관중(管仲)이 「지원(地員)」을, 왕후(王詡, 전국시대 鬼谷先生)가 「저희」를, 굴원(屈原)이 「이소(離騷)」를, 순경(筍卿)이 「비상(非相)」을 지었는데, 지금 군평이 「시풍을 지었다.’고 하였다. 나도 일찍이 사육문(四六文)을 보았지만, 과연 괴기하고 화려하였다[鄭東溟詩 專以氣爲主張 其伸縮變化 頗似于鱗而較滓 然東詩之巨擘歟 只有詩集十一卷 許眉叟嘗大許 其所著詩諷曰 管氏作地員 王詡作抵巇 屈原作離騷 荀卿作非相 今君平作詩諷云 余嘗觀其四六之文 果瑰奇爛燁矣].”라 하여, 정두경의 시를 거벽(巨擘)으로 꼽았다.
정조(正祖) 역시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일찍이 듣건대 효종(孝宗)께서 항상 정두경의 시를 사랑하시어 『동명집(東溟集)』을 오래도록 어안(御案) 위에 놓아두었다고 한다[曾聞孝廟常愛鄭斗卿詩 長置東溟集於御案上].”라 하여, 그의 시가 유행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외에도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75에서 「백구(白鷗)」와 「기자사(箕子祠)」를 소개하고 다음과 같은 평을 실어 놓았다.
“동명 정두경(鄭斗卿)은 기운이 사해를 삼킨다. 선생의 눈에는 천고의 작가들이 보이지 않고, 문장이 한 시대의 태산북두라 할 수 있다. 그는 손으로 진한 성당의 유파를 만들어 내었으니, 달마가 서쪽으로 와서 선교를 혼자서 선양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갈매기를 읊은 시에, ‘강해의 흰 갈매기가, 겨울 여름 없이 둥둥 떠 있네. 새 종류 적지 않으나, 나는 이 새만을 사랑한다네. 해마다 해마다 기러기처럼 남북으로 떠나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물결 따라 오르내리는 갈매기. 너에게 말을 전하노니 나를 의심하지 말아다오. 나 또한 바닷가의 세상 욕심 잊은 이란다.’라 하였다. 시험 삼아 우리나라 고금 시인의 시를 살펴보니, 감히 이와 같은 시어를 쓴 자가 있었던가? 계곡 장유(張維)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시문은 비유하자면 좋은 말이라고 할 수 있어 걸어가려고 하면 걸어갈 수 있고, 내달리고자 하면 내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역시 말이라는 점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군평은 차라리 도롱뇽일 망정 용의 부류에 속하다고 하겠다.’라 하였다. 그리고 동명의 「기자묘」에 ‘해외에는 주나라 곡식이 없지마는【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니, 기자는 자연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킬 수 있었다】, 하늘에는 낙서【낙서는 하(夏) 우왕(禹王)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1에서 9까지 나열된 반점인데, 우왕이 이를 보고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지었다 하여, 역(易)의 원리와 함께 천지 만물의 중요한 원리로 간주되어 왔다】가 있구나.’를 읊조리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치면서 ‘이 시구는 사람의 의표를 벗어난 것이니, 이 사람의 뒤를 쫓을 수가 없다. 쫓을 수가 없다.’라 하였다. 동명은 이 정도로 인정받았다. 군평은 바로 동명의 자이고, 계곡은 동명보다 십 년 연장자였다[鄭東溟斗卿, 氣呑四海, 目無千古, 文章山斗一代. 其手劈秦ㆍ漢ㆍ盛唐之派, 可謂達摩西來, 獨闡禪敎. 其詠白鷗詩曰: “白鷗在江河, 泛泛無冬夏. 羽族非不多, 吾憐是鳥也. 年年不與雁南北, 日日常隨波上下. 寄語白鷗莫相疑, 余亦海上忘機者.” 試看吾東古今詩人, 怎敢道得如此語麽? 谿谷嘗語人曰: “余之文譬如良馬, 欲步能步, 欲走能走, 猶不免爲馬. 至如君平, 則寧蜥蜴, 不失爲龍之類也.” 因詠箕子墓詩, ‘海外無周粟, 天中有洛書.’ 不覺擊節. 曰: “此句出人意表, 不可及, 不可及.” 其見許如此. 君平, 卽東溟字也, 谿谷於東溟長十年云].”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하, 이담, 2010년, 213~216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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