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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논어해석사강 - 주자학에 대한 혐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논어해석사강 - 주자학에 대한 혐오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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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학에 대한 혐오

 

 

이제 다산후유(後儒)는 경을 해설하는데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삼아 고증이나 논거(考據)가 소홀할 수 있다[後儒說經而窮理爲主, 而考據或疎]’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이인(里仁)8에 누구나 잘 아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朝聞道, 夕死可矣.

 

 

이런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식적이란 말은 매우 위험한 말이다. 우리의 상식 자체가 이미 우리가 속한 세계의 가치관의 패러다임 속에서 물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도를 듣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떤 보편적 진리를 깨닫는다는 뜻으로 새긴다는 것 자체가 천리(天理)를 전제로 한 말이며, 그 천리를 깨닫는 인간의 심성의 바탕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전형적인 신주(新注)의 입장인 것이다.

 

고주(古注)에서는 이런 말을 신주처럼 해석하지 않는다. 문도(聞道)는 그런 일상적으로 우리가 깨우칠 수 있는 사물의 당연지리가 아니라[道者, 事物當然之理. 주자집주], 반드시 어떤 제도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그리고 공자의 생애의 구체적 상황과 직결되는 말로서 해설한다. 그러니까 도를 듣는다는 것은 도가 있는 세상의 실현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자기가 갈구하는 정치적 상황의 실현이 공자 삶의 말년에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는 말로서 풀이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아사노식의 풀이를 가하자면, 자기의 정치적 패권의 꿈의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한 말일 수도 있고, 제후간의 사이에서 유세객으로서 막강한 실세를 과시하고 있는 자공(子貢)이 좀 더 일찍 자기 꿈을 실현시켜주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는 탄식일 수도 있다. 소라이(徂徠)식의 해설을 빌리자면 문도(聞道)’는 어디까지나 선왕지도(先王之道)’이며, 선왕지도를 추구하는 공자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말일 수도 있다.

 

고주의 입장은 매우 구체적이고 착실(着實)한 해석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다 논어구절을 해석하다 보면 오히려 논어가 모두 우리에게서 하등의 의미를 갖지 않는 공자라는 개인의 이야기로 소외될 수도 있고, 또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서 발생했던 하찮은 이야기로 전락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너무 신주의 입장에 치우치면 보편적 의미는 생겨나지만 관념적이 되기 쉽고, 임의적인 해석이 개입되며, 너무 일상적인 평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신주와 고주의 입장이 장단점을 가지고 엇갈리게 된다. 그래서 보통 고주를 훈고지학(訓誥之學)이라 부르고 신주를 의리지학(義理之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주(古注) 신주(新注)
훈고지학(訓誥之學) 의리지학(義理之學)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주라 해서 의리(義理)가 없는 것이 아니고, 신주라 해서 훈고(訓誥)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21세기적 안목을 가지고 볼 때, 주자의 신주는 대체적으로 고주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상식적이고 대중적이며 풍요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신주에 대한 모멸감이나 경멸감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특히 청나라 때의 고증학(考證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주자의 신주적 입장을 버리고 고주적 입장으로 회귀하려는 기치를 내건 사람들이었다. 물론 다산의 미묘한 언급 속에도 이런 당대 시대정신의 텐션(tension, 긴장)이 숨겨져 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경서를 읽으면서 주자학에 대한 혐오를 키웠다. 우리 때에, 성균관에서 유학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사람이면 모르되, 대체로 양식이 있는 식자라면 반주자학을 논하기를 좋아했다. 안습재(顔習齋, 옌 시자이, Yan Xi zhai, 1635~1704)는 주자의 해독은 비상보다 독하다고 했고, 대동원(戴東原, 따이 똥 위앤, Dai Dong-yuan, 1723~1777)은 혹리(酷吏)는 법()으로 사람을 때려잡지만, 주자는 리()로써 사람을 때려죽인다고 혹평했다. 혹리에게 죽는 사람은 불쌍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나 많지만 주자의 리에 소리없이 죽는 사람은 연민의 정을 가지는 이웃조차 없다고 개탄했다. 모두 성리학의 병폐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을 나타낸 예봉(銳鋒)의 명언들이다. 시아버지에게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소박 맞는 며느리나, 시어머니에게 당하다 당하다 못해 우물에 빠져죽는 조선의 여인들의 가슴에는 습재나 동원의 개탄은 공감의 전율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주자학을 혐오했던 이유는 아마도 주자학이야말로 조선의 멸망을 가져오게 한 원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문명의 개화를 근대화 = 반주자학이라는 도식에서 바라보았던 20세기 지식인들의 무반성적인 전제가 암암리 나에게도 작용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도식이 얼마나 잘못된 도식인가, 그리고 이러한 도식에 기초한 실학이라는 개념이 파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독기학설(讀氣學說)에서 설진(說盡)하였다. 조선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기독교문명의 적극 수용을 불러오고, 또 그 기독교문명의 수용이 중ㆍ일과는 달리, 유독 조선에서 인류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대규모 전도주의로 비화하여 조선성리학의 폐해보다 더 극심한 경직과 망상과 온갖 초월과 종말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제 예수의 해독이 비상보다 독하다고 말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두 번 반복되는 명사로 주자는 참으로 힘이 세구나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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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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