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자는 인을 편안히 여기고 지자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
4-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하지 못한 자는 오랫동안 곤경에 처하지 못하며, 또 오랫동안 즐거움에 처하지 못한다. 인자(仁者)는 인에서 편안할 줄 안다. 지자(知者)는 인에서 이로움을 취한다.” 4-2. 子曰: “不仁者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安仁, 知者利仁.” |
인간이 오랫동안 곤궁한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곤궁한 상황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는 극기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범인은 곤궁한 상황에서 쉽게 좌절하고 만다. 그런데 인간이 혜택받은 환경과 성공의 즐거움에서 오랫동안 처할 줄 아는 슬기를 발휘하는 것도 곤궁한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다.
‘약(約)’이란 궁핍하고 곤궁한 상황이다. ‘낙(樂)’이란 성공의 즐거움이요, 부귀의 획득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나 노자에게 있어서나 동양사상이 우리에게 심오한 삶의 지혜를 설파하는 위대한 힘은 바로 이러한 양면성의 전관(全觀)에 있는 것이다. ‘구처약(久處約)’과 ‘장처락(長處樂)’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세속적으로는 대립적인 가치의 양면이지만, 자연(自然)의 세계에서는 이것은 모두 상통하고 호생하는 전체적 도의 움직임 속에 있다. ‘반자(反者), 도지동(道之動)’의 양면일 뿐이다. 인이란 바로 이러한 양면의 동시성을 감지하는 데 있다. 인이란 예수의 말을 빌어 말한다면 천국을 도래시킬 수 있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힘이다. 그것은 천상의 천국과 지상의 천국을 전하는 지혜요, 「도마복음서」의 언어를 빌리면 ‘내 안에 있는 동시에 내 밖에 있는 천국’(제3장)이다.
인간은 곤궁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만 지혜를 발휘한다. 그러한 세속적 가치는 영웅적 행위로서 예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참으로 어려운 것은 행복한 순간들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고통의 극복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다.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하고, 이미 얻고나서는 잃을 것을 걱정하나니, 만약 잃을 것을 걱정한다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용악(庸惡)하고 누열(陋劣)한 비부(鄙夫)에 대한 공자의 탄식이다. 참으로 성인의 말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통찰이다. 무소유의 지혜란 불가의 특유물도 아니요, 도가의 생이불유(生而不有)적 사유의 전유물도 아니다.
인간이 즐거움에 오래 처한다는 것은 결국 도덕적 가치를 끊임없이 창출할 때 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가치는 순수하게 인(仁) 그 자체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인간다움의 감수성에서 절대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상대적, 혹은 공리적 결과를 위하여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인자(仁者)와 지자(知者)를 대립적으로 말하는 상황 속에서의 지자의 정확한 의미는 규정하기 어렵다. 뒤에 「옹야」 21에, 지자(知者)는 요수(樂水)하고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며, 지자(知者)는 동(動)하고 인자(仁者)는 정(靜)하며, 지자(知者)는 낙(樂)하고 인자(仁者)는 수(壽)하다는 공자의 말씀이 실려 있으나 이 말도 도무지 정확히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가치서열에 있어서는 인자가 지자보다는 더 구극적인 삶의 목표를 구현하는 것은 확실하다. 인자와 지자의 가장 큰 차이는 이 장에서 논하고 있듯이, 안인(安仁)과 이인(利仁)의 차이다. 안인이란 칸트의 말대로 무제약적(aus Pflicht) 도덕의식이며, 이인이란 합목적적(pflichtmässig) 도덕의식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인함으로부터 어떤 이로운 결과를 취하기 때문에 도덕적일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인한 자들은 인함 속에서 살고 단지 인함 속에서 편안히 느낄 뿐이다. 사회적 포폄에 관계없이 양심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다. 인의 도덕의식은 절대적이다. 동방인이 말하는 절대는 서양인이 말하는 선험적ㆍ초월적 절대가 아니요, 나의 양심에 구유되어 있는 절대적 당위의 가능성이다.
‘樂’은 ‘낙(洛)’이라 발음한다. ‘지(知)’는 거성이다. ○ ‘약(約)’이란 곤궁이다. ‘리(知)’는 탐한다는 뜻과 같다. 리(利)란 대저 깊이 알고 돈독히 좋아해서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함이다. 불인(不仁)한 사람은 그 본래의 마음을 잃어 곤궁함에 오래 처하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고, 즐거움에 오래 처하면 반드시 질펀하게 된다. 오로지 인자(仁者)만이 그 인함을 편안히 여겨 가는 곳마다 인한 자세를 잃지 않고, 지자(知者)는 인함으로부터 이로움을 취하여 지키는 바를 쉽게 바꾸지 아니 하니, 비록 깊고 얕음이 같지는 아니 하나, 인자나 지자나 모두 외물(外物)에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樂, 音洛. 知, 去聲. ○ 約, 窮困也. 利, 猶貪也, 蓋深知篤好而必欲得之也. 不仁之人, 失其本心, 久約必濫, 久樂必淫. 惟仁者則安其仁而無適不然, 知者則利於仁而不易所守, 蓋雖深淺之不同, 然皆非外物所能奪矣.
주희의 설명은 평이하고 정확하다.
○ 사현도가 말하였다: “‘인자(仁者)’는 마음에 내ㆍ외, 원근, 정조의 분별이 없어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바가 없어도 스스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바가 없어도 스스로 어지럽게 되지 아니 한다. 이는 마치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손이 잡으며 발이 절로 걸어가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지자(知者)’의 경우에는 보는 바가 있다고 말하면 괜찮지만, 얻는 바가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자는 보존하려고 노력해야만 없어지지 아니 하고, 다스리려고 노력해야만 어지럽게 되지 아니 하니, 의도적인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안인(安仁)’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이인(利仁)’에 있어서는 인자와 지자는 달라지는 것이다. 안인자(安仁者)는 안연이나 민자건 수준 이상 성인과의 거리가 멀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이러한 맛을 알 수가 없다. 공자의 제자들이 비록 탁월한 재능이 있으나, 도를 봄에 미혹됨이 없었다고 말하면 가할 것이나, 그들은 도로부터 이로움을 취함하는 얕은 지혜를 면치 못하였다.”
○ 謝氏曰: “仁者心無內外遠近精粗之間, 非有所存而自不亡, 非有所理而自不亂, 如目視而耳聽, 手持而足行也. 知者謂之有所見則可, 謂之有所得則未可. 有所存斯不亡, 有所理斯不亂, 未能無意也. 安仁則一, 利仁則二. 安仁者非顔ㆍ閔以上, 去聖人爲不遠, 不知此味也. 諸子雖有卓越之才, 謂之見道不惑則可, 然未免於利之也.”
사량좌(상채선생上蔡先生)의 주석은 노불(老佛)의 견해와 다를 바가 없 다. 인자(仁者)의 경지를 무위의 성인으로 푼 것이다. 상채를 탓할 것이 아니라 공자의 사상 속에 이미 노블이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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