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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이인 제사 - 16. 군자와 소인의 깨달음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이인 제사 - 16. 군자와 소인의 깨달음

건방진방랑자 2021. 5. 28.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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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군자와 소인의 깨달음

 

 

4-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의()에서 깨닫고, 소인은 이()에서 깨닫는다.”
4-16.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본 장의 해석은 ()’의 의미규정에 따라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를 깨닫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그 엄밀한 논리를 따라가면 소인(小人)이 결코 이원론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즉 군자는 의로움에서 깨달음을 얻고, 소인은 이로움에서야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깨달음의 층차의 단계적 고하를 나타낸 말로서만 해석되는 것이다고주나 신주나 모두 유()를 효()로 풀이했지만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군자는 인의(仁義)를 좋아하고, 소인은 재리(財利)를 탐한다는 식으로 풀이했을 뿐이다.

 

그런데 ()’민감하다는 뜻으로 풀면, 군자는 의()에 민감하고, 소인(小人)은 이()에 민감하다는 뜻이 되며 군자와 소인은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버린다.

 

맹자는 말한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얻으면 살고 못 얻으면 죽는 그러한 긴박한 상황일지라도, 쯧쯧 혀를 차고 꾸짖으며 주면 길 가는 사람도 받으려 하지 않으며, 발로 차고 주면 걸인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一簞食, 一豆羹, 得之則生, 弗得則死. 嘑爾而與之, 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 인간이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속하는 사태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을 버리더라도 의()를 취하는 자가 있으니, 인간이 인간다웁게 살고자 하는 도덕적 의지는 이러한 인간의 사실로써 입증되는 것이다.

 

19세기 조선에서 벼슬한 적도 없고 최근까지 그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던 무명의 학자 심대윤(沈大允, 1806~1872)은 이 장의 주석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범접키 어려운 위대한 언어를 쏟아놓았다. ‘성즉리(性卽理)’가 아닌 성즉리(性卽利)’를 말하는 그의 독특한 세계관에 있어서는 명리(名利)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삶의 본질이다. 정주학(程朱學)이 바로 이러한 삶의 본질을 거부했기 때문에 인성에 있어서 천리(天理)의 발현을 폐색(閉塞)시키고, 인간을 위선적 존재로 만들었다고 그는 예리한 필봉을 휘두른다.

 

 

이익을 자기 개인에게 편중시키는 것을 이()라 하고, 타인과 더불어 이익을 나누어 갖는 것을 의()라고 하는 것이다. 소인은 이()만 알고 의()를 모르나, 군자는 이()를 알면서도 의()를 취한다. 알고 보면 의()라는 것은 이()의 큰 것이다. 군자라고 이()를 실천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부()를 버리고 가난에 거한다. 왜냐하면 부자로 살아서 화를 입는 것이 가난한 것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다. 또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삶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진정한 의라고 할 수가 없다. 만약 군자가 이해(利害)를 모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며, 천지의 성()이 아니다.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없는 놈에게나 가능한 얘기일 것이다. 또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이익을 버리고 명예를 취한다. 이런 자는 과대망상자이다. 과대망상자가 몸을 바쳐 명예를 위하여 순직하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돈이 없어 사람을 해쳐서 이익을 구하는 것이나, 명리(名利)의 측면에서 보면 매일반이다. 오히려 과대망상자가 더 나쁘다. 불선한 짓을 하여 본성을 상실하는 데 이르는 것은 매일반이다. 군자라면 몸도 망치지 말아야 하고 타인도 해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명예[]와 이익[]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사람들과 이익을 나누는 것을 의라 하고, 명과 이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을 의라 한다).

偏利己曰利, 與人同利曰義. 小人知和而不知義, 君子知利而取義. , 利之大者也. 君子非不爲利也. 有時乎棄富而居貧, 知當爲福, 甚於貧也. 舍生而取義, 爲生之利, 不若於義. 若曰君子不利害, 是僞也, 非誠也. 無 天理人情而後可也. 若曰舍利而取名, 是夸也. 夸者亡身而殉名, 貧者賊 人而求利, 名利一也, 而夸爲甚. 其爲不善而喪性, 一也. 君子不亡身, 不賊人, 故能名利兩遂也.(與人同利曰義, 名利兩遂曰義.)

 

 

본 장의 의미를 잘 발현시킨 좋은 주석이라 할 것이다.

 

 

()‘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라는 것은 천리의 마땅한 바요, ‘()’라는 것은 인정이 욕심내는 바이다.

, 猶曉也. 義者, 天理之所宜. 利者, 人情之所欲.

 

정이천이 말하였다: “군자의 의에 대한 관계는 소인의 이에 대한 관계와 같다. 군자는 오직 깊게 깨달아서, 이 때문에 독실하게 좋아하는 것이다.”

程子曰: “君子之於義, 猶小人之於利也. 唯其深喩, 是以篤好.”

 

양중립이 말하였다: “군자는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의를 취하는 자가 있으니, ()로써 말한다면, 사람의 욕심이 삶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사람의 싫어함이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어느 누구가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는가? 그 깨달은 바가 의()일 뿐이요, ()의 이익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다. 소인은 이와 반대이다.”

楊氏曰: “君子有舍生而取義者, 以利言之, 則人之所欲無甚於生, 所惡無甚於死, 孰肯舍生而取義哉? 其所喩者義而已, 不知利之爲利故也, 小人反是.”

 

 

심대윤은 바로 양중립의 주석을 읽고, 그것을 반박하는 주석을 단 것이다. 심대윤은 말로는 그렇게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의를 취한다고 하면서 항상 실제 행위는 명리(名利)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유학의 병폐가 바로 그러한 유자들의 허위의식에 있다고 그는 예봉을 휘두른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복리전서(福利全書)라는 책을 썼다(1862).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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