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도적인 제국
굽타와 바르다나 시절은 인도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이민족의 침탈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토착 문화가 꽃을 피웠다.
중앙집권이 미약하고 속국들이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것은 이미 인도의 고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마우리아부터 굽타에 이르기까지 그 점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후진을 면치 못했어도 학문은 전에 없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은 당시 세계 첨단의 수준이었다. 인도인들은 당시에 세계 최초로 0의 개념을 발견했으며, 십진법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숫자 체계와 십진법은 사실 인도의 것을 아랍 세계에서 도입해 로마에 전한 것이었으니 근원을 찾자면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라 인도 숫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십진법은 로마 숫자 체계에 비해 훨씬 간편했다. 예를 들어 십진법에서는 78이라고 간단히 표기할 수 있는 숫자도 로마 숫자로 표기하면 LXXVIII라는 길고 복잡한 기호가 된다).
▲ 인도의 숫자 인도는 흔히 종교의 나라로 알려져 있으나 고대 인도에는 과학도 상당히 발달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아라비아숫자 체계는 사실 아라비아인들이 인도숫자를 가져다 서양에 소개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숫자들의 모양에서도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굽타 시대는 산스크리트 문학의 전성기였다. 어찌 보면 이것은 오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도의 고유한 문화가 변질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식적인 운동의 소산이었다. 굽타 왕실이 앞장서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와 산문을 적극 장려했던 것이다. 고대 인도의 2대 서사시인 『라마야나(Ramayana)』와 『마하바라타(Mahabarata)』는 이 시기에 정리된 산스크리트 문학의 정수다.
앞에서 보았듯이,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탄생한 간다라 양식은 부처를 형상화하면 안 된다는 미술의 금기를 깨주었다. 그 덕분에 불상의 조각이 자유로워졌고 종교 미술도 크게 성행했다. 수많은 불상과 힌두 신상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고, 동서양의 양식과 기법이 혼합되어 독특한 예술이 찬란하게 만개했다. 안타깝게도 그 상당 부분은 흉노의 침입과 이후 이슬람 세력의 지배기에 파괴되었다【10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인도를 지배하던 시대에 인도의 전통적인 문화 유적과 유물이 대거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이슬람교가 일신교이기 때문이다(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 세력에 의해 파괴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이 하나라고 믿는 일신교는 신앙 자체로야 누가 뭐라 할 수 없지만, 자칫하면 독선적이고 교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그래서 일신교에는 다신교에 없는 난폭하고 무지한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가 있다), 대표적 일신교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한다. 그러나 ‘우상‘의 규정이 모호한 탓에 다른 문화나 종교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배척할 수 있다는 위험이 늘 존재한다. 그것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다】.
다행히 아잔타와 엘로라 등지의 석굴 사원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비단길의 둔황 석굴도 굽타 시대 인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 날란다 사원 북인도 동부의 파트나에 세워진 날란다 사원은 불교 사원인 것만이 아니라 교육시설과 기숙사 등을 갖춘 일종의 국립대학이었다. 특히 이 시기 날란다에는 해외의 구법승들이 많이 찾아와서 불법을 배우고 토론했다.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종교 분야에서 볼 수 있다. 아소카 시절 이후 불교는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로 발달해왔다. 하지만 그런 불교가 인도에 널리 퍼지지 못한 이유는 바로 브라만교, 즉 힌두교 때문이었다(자이나교도 있으나 상인들을 중심으로 신도를 유지했을 뿐 교세가 불교와 힌두교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역대 제왕들은 대개 불교를 장려하고 포교에 힘썼으나 수천 년에 걸쳐 일반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힌두교를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불교의 보급에 앞장선 바르다나의 하르샤 치세에는 북인도 동부의 파트나에 세워진 날란다(Nalanda) 사원이 불교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날란다는 불교 사원인 것만이 아니라 교육 시설과 기숙사 등을 갖춘 일종의 국립대학이었다. 특히 이 시기 날란다에는 해외의 구법승들이 많이 찾아와서 불법을 배우고 토론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저술한 당의 고승 현장(玄奘)도 날란다에 유학했으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으로 유명한 신라의 혜초(慧超)는 날란다에서 이미 전에 다녀갔던 한반도 승려들의 이름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도에서 불교가 성행한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굽타 시대는 모든 분야에서 인도 고유의 전통이 부활하는 시기였다. 이 흐름을 타고 전통의 힌두교가 널리 퍼지면서 신흥 종교인 불교는 차츰 위축되었다. 그렇잖아도 불교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힌두교와 상당 부분 비슷해졌으므로 초기의 참신성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신의 모습을 조각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되자 불교보다 다신교인 힌두교가 포교에 더욱 유리해졌다. 힌두교의 3신인 브라마, 비슈누, 시바를 비롯한 수많은 신이 신상으로 만들어져 일반에 널리 퍼진 것이다.
이에 따라 불교는 점차 인도 내에서 세력을 잃고 동쪽의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로 옮겨갔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된 것은 후한 시대의 일이지만, 인도의 굽타 시대에 해당하는 남북조시대에 중국에서 불교가 크게 성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와 일본에도 바로 그 무렵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 불경을 짊어진 현장 날란다의 유학생 현장은 이렇게 불경을 잔뜩 짊어지고 당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 태종의 명을 받고 자신이 겪은 여정을 『대당서역기』로 펴냈다. 이 책은 당시 중앙아시아와 비단길 주변에 있는 138개국에 관한 사실을 전하고 있어 귀중한 문헌으로 꼽힌다.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이슬람이 지배한 힌두 (0) | 2021.06.06 |
---|---|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0) | 2021.06.06 |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고대 인도의 르네상스: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0) | 2021.06.06 |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짧은 통일과 긴 분열: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0) | 2021.06.06 |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0) | 2021.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