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1.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의 한계
645년의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통해 일본은 비로소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7세기 중반이면 한참 늦은 출발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화권의 한반도보다 800년이나 늦게 신석기시대를 졸업한 일본 민족으로서는 비약적인 발전이라 하겠다. 그런 성과를 이룬 데는 섬나라라서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아울러 일본 민족 특유의 뛰어난 모방 솜씨가 큰 역할을 했다【섬이란 사실 양면적인 조건이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에는 더없이 좋지만 동시에 외부의 ‘영향’마저 가로막혀 폐쇄적으로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양면적 조건은 주체의 역량에 따라 좋게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다. 고대의 일본 민족은 열도 안에 갇혀 지내려 하지 않고 외부의 영향, 특히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고 모방하고자 노력했다. 그 덕분에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중세까지 일본의 성장에 플러스 요인이 된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면 일본은 외부에 위협 요소로 등장하는데, 여기에도 섬의 조건이 암암리에 작용했다】.
당시 중국의 당 제국은 동북아시아의 패자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선진국이었으므로 일본이 모방의 모델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한반도가 고대 삼국으로 분리되어 있을 무렵, 일본은 가까운 백제를 통해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을 이룬 뒤부터는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일본은 신라와의 교류를 끊지는 않았으나 신라를 상국으로 받들지는 않았다).
무역과 거래에서 수익을 올리려면 가급적 중간의 유통 과정이 적은 편이 좋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당의 문물과 제도를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당의 제도를 모방해 율령을 만들고,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 나라(奈良)에 새 수도인 헤이조(平城)를 건설했다(이때까지 일본은 특정한 수도가 없고 천황이 사는 곳이 수도의 역할을 했으므로 천황이 바뀔 때마다 수도가 달라졌다. 나라에 도읍을 정한 이때부터를 ‘나라 시대’라고 부른다). 또한 귀족들은 당의 문화라면 무조건 수입하고 모방했다. 가장 중국적인 것일수록 가장 크게 환영받았다. 천하의 중심 ‘대당국(大唐國)’의 이미지는 일본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제도와 문물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역사와 전통까지 모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본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선 수도인 헤이조(‘평평한 성’이라는 뜻)의 이름에도 ‘성(城)’이라는 글자가 버젓이 들어가 있지만, 그 성은 여느 성과 크게 달랐다. 헤이조에는 건물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 한 나라의 수도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성벽이 없었다. 성벽이란 외적의 침입을 막아 수도를 보위하는 한편 성 안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 근거지와 바깥의 일반 농촌 사회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본에는 중국이나 한반도와 달리 이민족이 없어 침입할 만한 외적이 없었고, 수도라고 해야 정치 행정만을 위한 장소일 뿐 시민 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성벽이 애초에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헤이조의 성은 순전히 중국의 문물을 그대로 모방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그보다 더 큰 모방의 한계는 율령이었다. 4장에서 보았듯이, 당의 율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한 제국과 남북조시대에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싹이 트고 잎이 자란 결실을 당 태종이 거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율령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와 관료제를 조화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하지만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전제군주는 있어도 관료제는 없었다(게다가 천황도 고대까지는 상징적 중심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 통치를 담당하지는 않았다). 관료제를 발달시키려면 행정 실무자인 관료를 발탁하는 제도가 필수적이다. 그것이 과거제(科擧制)이지만 이런 제도가 없다면 최소한 중국의 고대처럼 외척이나 환관 같은 관료의 역할을 맡아줄 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에는 그런 세력이 부재했다.
게다가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은 당 제국처럼 전대의 왕조를 실력으로 타도하고 들어선 게 아니라 예전의 지배 세력이 쿠데타로 명패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유지되면서 국가 체제를 바꾼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관리 임용제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율령제는 필수 요소인 과거제가 없는 기형적인 제도에 불과했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율령제는 일본의 중앙집권화에 제법 기여했지만 당시 일본의 체제상 그것이 꼭 율령제일 필요는 없었다. 결국 그런 모방의 한계는 이후 일본의 역사를 동북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 헤이조의 성문 새 수도 헤이조의 남쪽에 있는 주작문(朱雀門)이다. 헤이조는 당의 수도 장안을 모방한 성이지만 성벽도 없이 성문만 있는 어설픈 성이었다. 문 앞에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공간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방비보다는 제례의 구실이 더 컸던 듯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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