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쟁을 통해 독점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지도자가 죽고 나면 혼란이 뒤따르는 법이다.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초대 쇼군 요리토모가 1199년 쉰셋의 나이로 죽자 신생 바쿠후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바쿠후 체제의 수립에 공을 세운 지방 호족들이 점차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요리토모의 치세에 그들은 요리토모의 고케닌으로서 철저히 복종했으나 그의 아들 요리이에(賴家, 1182~1204)가 2대 쇼군이 되자 태도가 달라졌다. 특히 호조(北條) 가문의 도키마사(時政, 1138~1215)와 그의 아들 요시토키(義時, 1163~1224)는 요리토모의 미망인이자 요리이에의 어머니인 마사코(그녀는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으나 남편의 후광으로 ‘여승 쇼군’이라 불리며 여전히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를 등에 업고 요리이에에게서 재판권을 얻어내려 했다. 도키마사는 마사코의 아버지였으니, 또다시 일가붙이들 간에 치열한 정쟁이 벌어진 것이다.
한 세기에 걸쳐 타오른 내전의 불길이 한 세대 만에 완전히 꺼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전의 불씨가 되살아나자 바쿠후의 성립에 기여한 가지와라(梶原), 히키(比企), 하타케야마(畠山) 등의 호족 가문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일어났다. 그 와중에 요리이에가 피살되고 그의 동생 사네토모(實朝, 1192~1219)가 열두 살의 소년으로 3대 쇼군이 되었다. 그렇다면 미나모토 가문의 권력은 유지된 걸까? 하지만 그 소년을 쇼군으로 만든 게 호조 가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쿠후의 실권은 호조 가문에게 넘어갔다. 토끼를 잡은 마당에 어차피 유명무실해진 다른 성 씨의 쇼군을 살려둘 필요는 없다. 때마침 사네토모는 성장하면서 교토의 귀족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고 교토의 천황 세력에게 접근해 호조 가문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호조 요시토키는 요리이에의 아들인 구기요(公曉)를 시켜 사네토모를 죽이게 한 뒤 구기요마저 제거해버렸다. 이로써 쇼군의 가문은 요리토모의 사후 20년 만에 대가 끊기고, 바쿠후는 완전히 호조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한편 바쿠후 세력 내부에 분란이 일어난 것은 교토의 천황 세력으로서는 바라 마지않는 바다【일본 역사에서는 바쿠후 정권이 생긴 이후부터 교토의 천황과 전통적 귀족 세력을 구게(公家, 공가)라고 부른다】. 당시 교토에서는 고토바 상황이 원정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쿠후를 제거할 호기가 왔다고 믿었다. 때마침 요리토모의 대가 끊기자 호조 요시토키는 상황의 아들을 쇼군으로 모시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바쿠후를 제거하려는 판에 자기 아들을 적의 손에 넘길 바보는 없다. 그러자 요시토키는 요리토모의 핏줄을 이은 어느 귀족의 두 살배기 아들을 쇼군으로 옹립했다. 물론 요시토키 자신이 직접 쇼군으로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영웅 요리토모가 죽은 지 20년밖에 되지 않은 데다 미망인인 마사코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쇼군 가문의 성 씨까지 바꾸는 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천황의 입장에서는 바쿠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천황은 그저 바쿠후의 힘에 굴복하는 것뿐이다. 천황과 바쿠후의 잠재된 갈등은 작은 계기만 주어져도 균열로 터져 나온다.
▲ 농민들의 생활 말을 이용해 곡식을 실어 나르는 일본의 농민들, 전통의 지배 귀족이 무너지고 신흥 무사 계급이 득세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그 결과 농민들 가운데서도 점차 백성 묘슈들이 성장했다. 하지만 대다수 농민들은 종래의 영주만이 아니라 지토에게도 착취를 당해 나날이 궁핍해졌다.
마침 고토바는 자신의 애첩이 소유한 장원에 지토를 두지 말라고 바쿠후에 부탁했다가 거절당해 체면을 구겼다. 개인적인 원한과 정치적인 원한이 쌓여 1221년 고토바는 전국의 무사들에게 호조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모든 무사가 바쿠후 편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바쿠후조차 내분이 있었으니 지금이야말로 ‘좋았던 옛날’, 천황 독주 시대를 되살릴 기회다. 이게 고토바의 생각이었는데, 실은 완전한 착각이었고 과거 천황의 권위에 대한 환상이었다. 바쿠후의 내분은 무사 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순수한 무사 정권으로 도약하기 위한 진통일 따름이었다. 말하자면 가마쿠라 바쿠후의 탄생에 기여한 실력 가문들이 무력을 통한 ‘자유경쟁’을 벌여 승자인 호조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요시토키는 교토의 선전포고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대군을 거느리고 교토로 진격했다. 또한 각지에서 들고일어나 바쿠후와 맞서주기를 기대한 전국의 무사들은 오히려 바쿠후의 휘하로 모여 들었다. 요시토키는 가마쿠라를 출발한 지 불과 20여 일 만에 별다른 싸움 없이 교토를 점령했는데, 이것을 조큐(承久)의 난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비록 ‘반란’이지만 실상은 진정한 실권자(바쿠후)가 명분상의 실권자(천황)를 누른 것이니 반란이라 할 것도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토와 바쿠후로 나뉘어 있던 이중권력은 사라지고 바쿠후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바쿠후는 천황과 공가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어졌다(압도적인 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쿠후는 천황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바쿠후는 천황 측이 또다시 반기를 드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교토의 슈고를 강화하고, 이를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라고 부르며 출장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바쿠후는 전국의 요충지에 탄다이를 두고 감시 활동을 했다).
이때부터 천황은 실권을 모두 잃었다. 심지어 제위의 계승이나 연호의 제정과 같은 중요한 사항마저 바쿠후의 결재를 얻어야 했다. 또한 창업자의 가문을 잃은 쇼군의 직위는 이때부터 황족 가운데서 선출해 대를 잇게 되었다. 이리하여 전통의 지배자인 천황에 이어 신흥 지배자인 쇼군까지 유명무실해지고 권력은 바쿠후의 중심인 호조 가문의 수장들이이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바쿠후는 그때까지 손을 댈 수 없었던 황실과 공가 귀족들의 장원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절대 권력에 대한 추인으로, 바쿠후는 1232년에 조에이시키모쿠(貞永式目)라는 51개조의 독자적인 헌법마저 제정함으로써 일본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절대 권력의 천황이 중앙집권적 관료 기구를 통해 전일적으로 지배한 고대 천황제와 달리 바쿠후 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바쿠후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영지를 독자적으로 지배했다. 바쿠후는 그들의 지배 방식이나 수탈의 정도에 대해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일본의 봉건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유럽이나 중국의 역사에서도 고대의 절대 권력을 거쳐 중세의 봉건시대에 이르고 다시 근대의 절대 권력이 다른 형식으로 재등장하는 과정은 일본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러나 유럽의 중세에 봉건영주들 지배했고 중국의 중세에 사대부 사회가 전개된 것에 비하면, 무사 정권으로 일관한 일본의 중세는 확실히 특이한 면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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