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의에 의한 복귀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서구 열강으로서도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일본으로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본은 늘 중국과 대등하다고 천명하면서도 힘에서나 국제 무대의 권위에서나 동양 질서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것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중국이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열강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바쿠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힘을 앞세운 무사 집단으로 출발해 전국을 통일하고 지배했던 만큼, 바쿠후의 힘이 외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곧 권위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을 뜻했다. 마치 이런 기미를 눈치라도 챈 것처럼, 1846년 영국과 프랑스의 군함들이 일본 근해에 출몰하자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 간여하지 못했던 천황이 바쿠후에게 방위를 엄중히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이는 20년 뒤 천황이 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하리라는 것을 알리는 조짐과도 같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1842년 난징 조약이 체결된 이후 유럽 열강은 중국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에 닥친 열강은 유럽 국가가 아니었다. 1853년 우라가(浦賀, 현재 요코하마 남쪽의 요코스카)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증기군함 네 척은 바로 미국의 페리(Matthew Perry, 1794~1858) 제독이 이끄는 함대였다.
▲ 일본인이 본 페리와 실제 페리 왼쪽은 1854년에 제작된 일본의 판화에 나온 페리 제독이고, 오른쪽은 실제 얼굴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그의 매부리코를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사실 미국은 7년 전에도 일본에 함대를 보내 통상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의지가 그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페리는 군함들의 포문을 전부 열고서는 자신이 가져온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군함 위에서 직접 받아가라고 바쿠후 측에 요구했다. 만약 이 요구에 부응한다면 자신이 직접 에도까지 가서 쇼군을 만나겠으며, 그게 안 된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영국이 중국을 개항시키는 과정에서 이미 동양 세계의 힘은 충분히 가늠한 바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영국처럼 구차스럽게 외교 절차를 밟느니 처음부터 군함을 앞세우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요구라기보다는 행패였으나 바쿠후는 그것을 무시하지 못했다. 지금은 군함 네 척에 불과하지만 그 뒤에는 미국의 대함대가 버티고 있으리라. 아니,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이 불과 군함 20척으로 중국의 전 해안을 장악한 것을 감안하면 그 네 척조차 얕볼 수 없는 상대였다. 600년 전 막강한 몽골군을 막아내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섬이라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은, 해군력이 강한 나라가 침범해올 경우에는 오히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걸림돌이었다(몽골은 세계 제국이었어도 수군이나 해군이 전혀 없었다. 고려에 병선을 만들게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페리의 무력시위 오른쪽의 큰 배들이 1853년 우라가에 출현한 미국의 증기군함들이다. 바쿠후는 앞서 러시아의 경우처럼 나가사키로 물러가 다시 요구하라고 했으나, 페리는 말을 듣지 않고 위협 포격을 가하면서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받아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바쿠후는 일단 이듬해까지 회답을 기다려달라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잘 활용한 것은 바쿠후보다 미국이었다. 페리는 일본과의 일전에 대비해 오가사와라(小笠原, 요코하마 남쪽의 해상 열도)에 석탄 창고를 설치하고 이곳을 일본 공략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럴 필요도 없었다. 1854년 3월, 일본에 다시 온 페리는 요코하마에서 미ㆍ일 화친조약을 맺고, 2개 항구의 개항과 무역 개시, 영사 주재 등의 조건을 얻어냈다.
이것으로 250여 년에 걸친 일본의 쇄국은 끝났다. 과거의 쇄국은 자의에 의한 결정이었으므로 국내의 안정을 가져왔지만, 개국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렇지 않을 터였다. 과연 개국 이후 짧은 기간에 일본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뒤숭숭한 국제 정세에도 개의치 않고 미련스럽게 쇄국만 고집하던 바쿠후는 타의에 의한 개국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우선 바쿠후의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러자 그동안 일본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추 역할을 했던 바쿠한 체제가 무너지고, 유력 다이묘들의 발언권이 커졌다. 이들 중에는 개국에 찬동하는 자도 있었고 여전히 강경한 쇄국파도 있었으나 모두 시대가 달라졌음을 통감하고 있었다.
이후 몇 년 동안 러시아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바쿠후의 권위는 끝없이 추락해갔다. 바쿠후 정권을 장악한 다이묘들은 실추된 바쿠후의 권위를 되살리자는 파(주류)와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바쿠후를 개혁하자는 파(비주류)로 갈렸다. 그러나 바쿠후파나 개혁파나 한 가지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쿠후의 권위를 되살리는 개혁하는 바쿠후나 바쿠한 체제로 급변하는 새 시대에 대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 일본으로 밀려오는 열강 미국에 의해 개국된 뒤 일본은 계속되는 서구 열강의 침입에 시달렸다. 1864년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4개국 연합군이 조슈의 시모노세키를 공격했다. 사진은 함포 사격을 하고 난 다음 날 연합군의 육군이 상륙하는 장면이다. 열강이 요구한 배상금은 바쿠후에게 큰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결국 바쿠후는 막대한 배상금을 다 지불하지 못해 또다시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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