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을 두드리는 열강
일본 바쿠후가 쇄국의 기치를 드높이 치켜들고 있던 18세기 후반 무렵 유럽 세계는 유사 이래 가장 활발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륙 국가들에 비해 봉건제의 굴레가 약했던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자본주의의 새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미 17세기 초반부터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경영하는 데 앞장섰던 영국은 18세기 중반 프랑스를 꺾고 단독으로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했다(8장 참조). 영국에 패한 프랑스는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를 맞게 되었다. 바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이 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 전쟁은 전 유럽의 지각을 뒤흔들어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전통의 강호들 외에 새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나라들도 등장했다. 러시아는 18세기 초반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바탕으로 착실하게 근대화를 추진해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또한 유럽 세력의 식민지로 역사를 시작한 미국도 1776년의 혁명으로 독립에 성공해 열강의 막내로 당당히 끼어들었다.
문제는 서구 열강이 서구에서만 놀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국민국가와 자본주의를 확립한 열강은 비좁은 유럽을 벗어나 세계를 놀이터로 삼으려 했다. 적절한 후보지는 어디일까? 대서양 서편의 남북 아메리카는 북쪽에서 미국이 독립하고, 남쪽에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분점한 상태이므로 후보상에서 제외된다. 남은 것은 유럽 남쪽의 아프리카와 아시아다. 그런데 아프리카는 기후 여건이 나쁜 오지인데다 인구가 희박해 자본주의 시장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게다가 ‘서양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으므로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다(그래서 유럽 열강은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한다), 열강의 시선은 자연히 동양으로 쏠린다. 특히 영국은 인도라는 중요한 발판이 있으므로 동양 진출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중국과의 통상에 최대한 주력했다. 향료 산지인 동남아시아는 이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해상을 주름잡던 시대에 무역을 장악했고, 인도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최대 주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중국과 일본인데, 덩치가 크고 동북아시아의 중추를 이루는 중국에 비해 일본은 이차적인 관심 대상이었다(앞서 이야기했듯이 당시 열강은 한반도의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보았으므로 관심 밖이었다). 더욱이 중국과 달리 일본은 강경한 쇄국정책을 취하는 데다, 열강들 사이에서는 일본에 대한 네덜란드의 선점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있었다.
▲ 덧없는 세상 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 우키요(浮世), 즉 ‘덧없는 세상’이라는 일종의 허무주의 사상이 유행했다. 이 사상을 바탕으로 우키요에(浮世繪)라는 독특한 채색 목판화가 생겨났다. 우키요에 양식은 19세기 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에 수출되어 서양의 근대 미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시 유럽의 미술을 이끌던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 네덜란드의 반 고흐 등은 일본의 우키요에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위쪽은 18세기 후반의 우키요에 작품이고, 아래쪽은 이 작품에서 기법과 주제를 차용한 메리 커샛의 에칭 작품이다.
그런 탓에 일본에 최초로 통상을 요구해온 나라는 전통적인 제국주의 열강이 아니라 유럽의 ‘변방’인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세기 내내 끊임없이 동진해온 끝에 마침내 유라시아의 ‘땅끝’인 베링 해에 이르렀다. 그 동진의 목적은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동진하면서 러시아는 남쪽 방면으로는 무주공산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서유럽은 러시아로서 넘볼 수 없는 선진국이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는 막강한 튀르크 제국이 점령하고 있다. 더 동쪽으로 가보니 러시아의 영웅 표트르마저 국경 조약(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데 그친 강력한 청 제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동진은 베링 해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덕분에 러시아는 드넓은 시베리아 평원을 송두리째 영토화할 수 있었다).
1783년 러시아는 캄차카에 표류한 일본 선원들을 귀환시켜주면서 홋카이도에서 일본 바쿠후에 통상을 요구했다. 쇄국 이래 최초로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를 받은 것이었으므로 잔뜩 긴장한 바쿠후는 나가사키에서만 외교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거절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도 일본과의 통상이 급한 일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세기 초에 러시아는 나가사키에 사절을 보내 다시 통상을 요구했다. 이번에 바쿠후는 아무런 핑계도 대지 않고 쇄국정책을 내세워 정식으로 거절했다.
비록 아무 일도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바쿠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선방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운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쁜 운을 막아주는 것은 오로지 쇄국뿐이다. 바쿠후는 다시금 쇄국의 고삐를 단단히 죄었다. 심지어 그때까지 일본과 서구를 이어주는 조그만 창문의 구실을 한 란가쿠마저 탄압했다【집권 세력은 늘 체제 개혁과 문호 개방을 거부하게 마련이다. 같은 시기에 조선의 집권층인 사대부 세력은 중국을 통해 전해지는 서양의 문물을 초기에는 용인하면서 실학으로 수용하다가 나중에는 거부하고 탄압했다. 일본의 란가쿠에 해당하는 조선의 학문은 서학 혹은 북학이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세계정세는 이미 바쿠후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본의 개국을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1840년의 아편전쟁이다.
▲ 러시아의 접근 일본에 먼저 수교 제의를 한 서구 열강은 러시아였다. 1804년 러시아 사절 레자노프가 나가사키로 와서 정식으로 통상을 요구했다. 그림은 레자노프 일행이 안내를 받는 장면이다. 그러나 바쿠후는 러시아의 요구를 정식으로 거절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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