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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바쿠후의 몰락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바쿠후의 몰락

건방진방랑자 2021. 6. 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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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쿠후의 몰락

 

전통의 지배층인 다이묘들이 바쿠후에 집착하는 동안 새 시대를 담당할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다이묘와 번주(藩主) 들의 휘하에 있던 무사들을 비롯해 로닌, 지주, 상인 계층이었다. 그들은 정치 개혁에 뜻을 두었으므로 시시(志士, 우리말에서는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지사를 가리킨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시시들은 바쿠후 정권이 흔들리고 부패한 17세기 중반부터 성장한 민중 세력이 결집된 표현이었다(물론 그들이 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쿠한 체제가 붕괴하면서 시시들도 받들어 모시던 바쿠후와 번주 등 기존의 지배층과 어느 정도 유리되었으므로 비교적 발언과 주장이 자유로웠다. 그들은 바쿠후의 개혁에 동참하기보다는 바쿠후 자체를 거부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세운 대체 권력은 무엇일까? 이들은 놀랍게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고 나섰다. 왕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 이것은 수천 년 전 주나라 시대부터 중국 한족 왕조들이 늘 내세우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사실 존왕까지는 내세웠으나 원래 양이에 대한 비중은 크지 않았다. 다만 당시 정황에서는, 바쿠후가 미국에 굴복해 굴욕적인 통상조약을 맺었으므로 바쿠후를 지지하면 오랑캐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바쿠후에 반대하는 세력은 자연스럽게 양이를 구호로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존왕양이를 주창한 배경에는 물론 성리학의 화이(華夷, 중화와 오랑캐) 이념도 있었지만, 사상이나 신념의 측면보다는 정치적인 의미가 강했던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부활의 조짐을 보이던 천황은 존왕양이의 구호에 힘입어 다시 일본 역사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존왕파는 천황이 있는 교토로 모여들어 비밀결사를 이루고 정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바쿠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도 비밀 활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천황이다.

 

천황 고메이(孝明, 1831~1867)는 자신을 정치권의 핵심으로 부활시키려는 존왕파를 외면하고, 오히려 바쿠후 측이 내미는 손을 받아 쥐었다. 천황을 끌어들인 바쿠후 정권은 공공연한 정치 세력으로 떠오른 존왕파를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탄압을 가해왔다. 그러나 존왕파는 약화되기는커녕 전국적인 비밀결사망 외에 조슈(長州, 시모노세키 부근) 번을 공개적인 거점으로 확보했다. 조슈는 이를테면 존왕파의 해방구가 되었다.

 

이제 존왕파는 하고 싶어도 존왕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양이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존왕이데올로기가 실현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굳이 양이도 외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존왕양이를 다 팽개치고 공식적으로 타도 바쿠후를 선언했다. 양이가 없어진 마당에 외세를 꺼릴 이유도 없다. 오히려 바쿠후가 먼저 양이인 프랑스와 결탁해 정치, 군사, 무역의 자문과 지원을 얻고 있었다. 존왕파에서 반바쿠후파로 명패를 바꾼 그들은 자연스럽게 영국에 접근했다.

 

 

유신 전야 에도의 거리에서 로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 바쿠후의 무능을 틈타 에도에서는 이런 사태가 잇달았다. 로닌들은 부호에게 고용되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을 벌이기도 하면서 에도 시내의 치안을 위협했다. 이들은 나중에 조선에 진출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키는데, 야쿠자의 기원은 이들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쿠후는 이권을 제공하는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모든 측면의 지원을 받았으나, 반바쿠후파는 영국으로부터 군사와 재정 원조는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이는 무사 집단 특유의 강렬한 반외세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바쿠후파가 바쿠후보다는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일반 민중에게도 바쿠후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달할 즈음인 1866년 겨울, 드디어 고메이 천황이 죽고 열네살의 메이지(明治, 1852~1912)가 즉위했다원래 고메이는 10대 시절 일본이 강제 개항되는 것을 목격한 이후 외세와 바쿠후를 다 혐오했다. 그런 그가 바쿠후와 손잡은 것은 조슈파를 더 혐오했기 때문이다. 천황의 비중이 커지던 무렵 고메이는 서른여섯 살의 한창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는데, 반바쿠후파의 손에 독살되었다는 추측이 한층 설득력이 크다.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조사와 연구의 대상이다.

 

고메이가 죽었으니 반바쿠후파의 천황을 대하는 전략도 바뀔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다시금 존왕 이데올로기를 내세웠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메이지는 소년이 아니라 해도 사태를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바쿠후는 급속히 여론과 민심을 잃었고, 심지어 본거지인 에도 내의 치안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메이지는 소년이라 해도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명확히 깨달았다.

 

드디어 18681, 존왕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바쿠후를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왕정복고가 선언되고, 쇼군제와 간바쿠제가 폐지되었다. 그때까지 바쿠후와 쇼군은 700년 가까이 일본을 통치했고, 간바쿠는 무려 1000년이나 된 직책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일본 정치의 골간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단 하나, 바쿠후의 대항 쿠데타를 진압하는 일이다.

 

쇼군제가 폐지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마지막 쇼군이 되어버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는 아직도 에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새 천황 정부는 요시노부를 타도하자는 구호로 대군을 편성해 에도로 진격했다. 요시노부는 휘하 군대를 총동원해 새 정부군과 대대적인 결전을 준비했다. 자칫 대규모 내전이 될 뻔한 양측의 충돌은 다행히 현실화되지 않았다. 세 불리를 느낀 에도 측이 꼬리를 내려 극적으로 협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개국 이후 10여 년간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권력투쟁은 신흥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의 역사는 수백 년 만에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수백 년 동안 바쿠후의 중심지였던 에도는 이때부터 도쿄(東京)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그보다 더 큰 변화는 9세기 이래 셋칸 시대와 바쿠후 시대를 거치면서 내내 상징적 존재로만 군림해왔던 천황이 무려 1000년 만에 다시 현실 정치의 무대에 우뚝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공한 쿠데타 18681월의 쿠데타 장면, 왼쪽의 바쿠후군은 병력 수에서 두 배 이상 많았으나 서양식으로 무장한 쿠데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큰 전투는 아니었으나 이 사건은 시대를 역행하려 한 바쿠후의 몰락이자 20여 년간 권토중래한 존왕파의 최종적 승리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일본의 시민사회

닫힌 문을 두드리는 열강

타의에 의한 복귀

바쿠후의 몰락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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